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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riting Choenghee Aug 24. 2023

우리는 걷고 있다.

우리 모두는 그 힘든 걸 해낸 사람들이다.

 딸이 돌을 갓 지났다. 최근 3차 영유아 검진을 받고 왔는데 결과는 대근육 영역에 추적 검사 요망이었다. 그 이유는 딸이 의자든, 소파든, 무엇을 잡고 서는 것은 가능하나 혼자 힘으로 서질 못했다. 돌이 지났는데 아직도 혼자 힘으로 못 서냐고 원장님이 말씀하실 때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서고 걷는 게 겁이 나서 그럴 수 있으니 겁먹지 않고 계속 시도할 수 있도록 부모가 옆에서 도와주라고 덧붙이셨다.


 터미타임도, 기어 다니는 것도 평균보다 빨리 시작했다. 그래서 돌잔치도 딸은 걸어서 들어갈 것이라 예상했다. 시어머니와 친정어머니께도 아마 돌 때쯤이면 걷지 않겠냐고 당연한 듯 말씀드렸었다. 그런데 혼자 서지도 못 할 것이라는 건 상상도 못 했던 것이다.   


 돌이 다가올 땐 우리 부부도 딸이 걸었으면 하는 마음에 딸의 손을 잡고 걷기 연습을 시키려고 시도했었다. 그럴 때마다 딸은 바닥에 주저앉곤 했다. 걷는 것이 겁이 나는 건지, 힘이 드는 건지, 자신의 손을 잡은 우리에게 의지하기엔 아직도 두려운 건지,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좀 걷게 하고자 노력했던 모든 것들이 딸이 주저앉음으로써 허투루 돌아갔다.  


 3차 영유아 검진을 마치고 친정에서 하룻밤 묵기로 했다. 친정어머니께 결과를 말씀드렸고,

 엄마는 "좀 있으면 걷겠지 뭐, △△네도 딸이 늦게 걸었다고 하드라."라고 말씀하셨다.

 검진 결과는 대근육 영역 추적 검사 요망이었지만, 동료 선생님의 딸은 9개월 때부터 걸었다고 하지만 사실 큰 걱정은 되지 않았다. '곧 걷겠지'라는 조건 없는 기대와 믿음이 있었다.


 친정에서 모처럼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친정어머니는 나와 사위 먹이겠다고 요리를 하고 계셨고, 아버지는 마트에 추가적으로 필요한 재료들을 사러 가셨다. 그런데 딸이 33평 넓이의 아파트 부엌부터 거실까지 커다랗게 빙글빙글 온 바닥을 돌며 왔다 갔다를 반복했다. 내가 있는 거실 쪽으로 왔다가 외할머니가 계시는 부엌으로 가기를 과장하지 않고 거의 50바퀴를 쉬지 않고 반복했다.

 친정어머니는 "OO이 왜카노. 머리 뒤에 땀 봐라."라는 말씀에

 나는 "그러니까. 오늘 왜 저러지. 진짜 잠시도 가만히 안 있네."라고 대답했다.

 친정어머니는 잠시 생각하시더니 "오늘 걸으려고 저러는 거 아니가?"라고 하셨다.

 정말로 딸의 기색에 오늘 뭔가를 이뤄도 이뤄낼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빨간 얼굴에 땀을 뻘뻘 흘리며 단 1초도 쉬지 않고 넓은 공간을 기어 다니는 것을 보고 운동선수들이 저렇게 훈련할까 싶을 정도였으니까. 


 그러더니 결국 혼자 힘으로 일어섰다. 약 3초간의 시간이었던가. 너무 반갑고 놀란 마음에 탄성을 질렀고 박수를 쳤다.

 내가 "우와! OO이 혼자 힘으로 일어섰네! 우와!" 하니 딸이 이내 콩 바닥으로 엉덩방아를 찧었다.

 "그렇게 빙글빙글 기어서 다니더니 혼자 일어서려고 힘 기르려고 그랬나 보다." 하는 친정어머니의 말씀이 뒤늦게 와닿아 무언가를 깊게 생각케 만들었다.




 걷는다는 게 그렇게 힘이 많이 드는 일인 줄 몰랐다. 그간 딸이 기어 다니고 주변 물체를 지지대 삼아 잡고 일어서던 것, 그 과정에서 땀을 뻘뻘 흘리며 수백 번, 수천번 넘어지던 일이 혼자 일어서서 걷기 위한 힘을 기르기 위함이었구나. 아직 걷지는 못하지만 지지할 것 없이 스스로 일어설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어떤 기적과도 같은 일을 본 것 같았다.


 또 생각해 보니 나 또한, 아니 나를 포함한 모든 사람들은 그 힘든 일을 다 해낸 사람들이었다. 사람마다 시기는 다를지언정 우리 모두는 땀을 흘리며 한 시도 쉬지 않고 다리에 힘을 기르려 애를 썼고, 셀 수 없이 넘어졌지만 결국 일어섰고 걷게 되었다.


 살다 보면 너무나 많은 책임을 어깨에 짊어져 힘이 들 때가 있다. 그 짐이 너무 무거워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갈 의지도, 새로운 무언가를 마주했을 때 할 수 있다는 자신감도 바닥을 향해 가라앉기만 하고. 그러다 보면 바닥이 아니라 지하 깊숙이 파고들어 간다. 차라리 그 지하 땅굴에 계속 숨어있고 싶은 마음이 들기도 한다.


 그러다 문득 주위를 둘러보면 '저렇게 많은 일들을 어떻게 저렇게 평온한 얼굴로 하나씩 빠르게 완수해 나가는 걸까?', '어떻게 다 잘할 수 있는 거지?' 등의 궁금증을 자아내는 완벽해 보이는 사람들이 있다. 그럴 때면 비교적 자신은 덜 완벽하다고 생각하는 지점을 넘어 더 밑으로 더 깊숙이 자신을 끌고 내려갈 때도 있다.


 살면서 자신감이 떨어질 때, 자신을 땅굴로 데려가고 싶을 때 한 번씩 기억을 떠올릴 필요가 있다. 나는 지금 걷고 있다고. 무릎이 닳고 엉덩이에 멍이 들도록 넘어지며 기어 다니고 또 기는 그 힘든 과정을 이겨내고 마침내 혼자 일어서서 걷기를 해냈다는 걸 잊지 말자. 그저 걸어가자. 앞으로.




 오늘도 딸은 혼자서 일어선다. 점점 그 횟수와 기립 자세를 지속하는 시간이 늘어나고 있다. 마음으로 응원한다. 걸어보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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