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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은실 Apr 23. 2024

남편이 잠 든 사이

사이다 같은 일탈 한 모금

여자가 물었다.  

“러브가 무엇이오? 벼슬보다 더 좋은 거라 하더이다.”     

남자는 답했다.

“혼자는 못 하오. 함께 할 상대가 있어야지.”  

“허, 그럼 나랑 같이 하지 않겠소?” 

“총 쏘는 것보다 어렵고 칼보다 위험하고 그것보다 더 뜨거워야 하오.” 

요즘 한참 빠져있는 tvN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 중 남녀 주인공의 대사다.    

드라마는 조선을 둘러싼 열강들 틈바구니에서 나라를 지키려는 애기씨와 일본과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해 조선으로 파견된 미국 군인 유진 초이의 사랑 이야기로 전개된다. 애기씨는 지체 높은 양반가 손녀딸이지만 한편으로는 남장을 하고 총을 잘 쏘며 의병으로 활동하는 인물이다. 유진 초이는 노비의 아들로, 어린 시절 미국으로 도주해 미 해병대 대위가 된 조선인이다. 영어를 배우지 못한 애기씨는 러브의 뜻을 모른다. 그리고 그녀에게는 마음에 썩 들지 않는 정혼자가 이미 있다. 총보다도 칼보다도 다루기 어렵고 위험한 러브가 이들 사이에 끼어들기 시작한다.   

활쏘기를 좋아했다던 사랑의 신 큐피드는 장난삼아 화살을 쏘았다더라. 그의 장난질에 울고 웃는 청춘들이 그리도 많았다더라. ‘팅’ 활시위를 벗어나 ‘쑝’ 날아간 화살은 누군가의 가슴에 ‘탁!’ 꽂힌다. 그리고 잠시 후, 제대로 꽂힌 화살은 가슴팍에서 ‘파르르’ 제 몸을 떤다. 운명적인 사랑이다. 아무리 아파도 사랑은 이어나가야 하는 것이라고, 오직 그것만이 사랑이라고, 사랑은 그렇게 하는 거라고 믿었던 스무 살 청춘 시절이 있었다. 하늘 아래 땅 위에 이보다 더 아름다운 말이 또 있을까. 

“사랑.”  

사랑이 무얼까? 사랑이 뭐길래 팥쥐 같은 사람이 콩쥐로 보일 만큼 콩깍지에 씌고 개구리가 왕자인지도 모른 채로 기꺼이 입 맞추게 되는 걸까? 사랑은 눈꽃빙수처럼 달콤하기만 한 걸까? 사랑이 무에 그리 좋을까. 사랑하는 일이 좋은 게 아니라 사랑하는 순간의 떨림이 좋은 것이리라.      

가슴에 꽂히지 못해 미처 떨어보지도 못하고 땅바닥으로 떨어졌거나 혹은 허공으로 날아가 버린 화살들의 안부를 새삼 묻고 싶어진다. 그중 한 개를 찾아 파리한 떨림을 만들어 볼까. 복숭아 나뭇가지 위에 앉아있던 참새가 포르르 날아오를 때 진분홍 꽃가지의 흔들림만큼, 딱 그만큼만 흔들려 볼까. 그러면 가슴속 우물이 복사꽃 색으로 물들게 될까. 그도 아니면 어느 봄날 커피 잔을 들고 있는 누군가의 셔츠 소맷자락이 바람에 나풀거릴 만큼, 딱 그만큼만 나풀거려 볼까. 그러면 푸석푸석 마른 먼지만 날리는 심정이 연두로 물들게 될까. 정녕 그렇게 된다면 드라마 속 대사처럼 가슴속에 있던 심장이 배 속 한가운데로 툭 떨어지는 일이 정말로 생기게 될까.  


몇 해 전 무심히 흘려보냈던 시 한 수가 뇌리를 스친다.        

지아비 몰래

마음속 깊이

녹쓴 거울 하나 감춰 두었지만

그립다, 말하지는 않아요     

우물에 어린 달님

두레박으로 퍼 올리다

언뜻, 스치는 얼굴 있지만     

그런 밤, 지아비가 주는 술잔을

천연스레 받아 마셔요

- 신술래, 「난설蘭雪의 달」 전문
                                

드라마가 끝나기 무섭게 도롱도롱 코를 골며 자는 우리 집 남자는 과연 이런 시를 알기나 할까. 심장의 파리한 떨림을 이 남자는 진정 알기나 할까.    

규칙적으로 도롱도롱 소리를 내던 콧소리가 ‘컥’ 하며 들이쉰 남편의 숨에 갑자기 멈췄다. 순간 집 밖을 떠나 밤하늘 멀리까지 날아갔던 대책 없는 공상들이 컥 소리가 힘껏 잡아당기기라도 한 듯, 한꺼번에 남편 얼굴 옆으로 와르르 떨어졌다. 잠시 후 ‘푸우’ 하며 내뱉는 우리 집 남자의 날숨에 공상들은 허공 속으로 먼지처럼 흩어져 아예 자취도 없이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밥도 먹여주지 않는다는 얼어 죽을 놈의 사랑 타령에 여름밤이 파랗게 깊어만 간다. 드라마 속에 나오는 ‘러브’란 말에 아직도 떨리고 아직도 설레도 괜찮은 것인지, 연분홍으로 흔들려도 좋은 건지, 녹슨 거울 하나쯤 가슴속에 품어 연두로 물들어도 나쁜 건 아닌지 하는 궁금증을 품은 채로 두레박 없는 정수기에서 찬물 한 컵을 받아 들이켜 본다.  


비록 컥 소리에 놀랐다가 푸우 소리에 안심했던 짧은 시간이었지만, 밤하늘 멀리까지 날아간 잠깐의 일탈이 톡 쏘는 사이다처럼 짜릿하다. 매일 아침 하트 이모티콘을 날리는 게 사랑이라면, 휴대폰 키보드 기호 란에 있는 하트도 보낼 줄 모르는 나는, 아직도 사랑하는 일에 서툴다.      

내일 아침, 아무것도 모르는 우리 집 남자에게 어설픈 하트 이모티콘을 보내봐야겠다. 그건 어쩌면 훗날 생기게 될지 모를 어떤 남자 친구에게 보내게 될 애정 표현에 대한 연습이기도 하지만, 남편 덕에 꿀 같은 일탈을 맛본 데 대한 고마움의 표시이기도 하다. 

출근길, 뜬금없이 날아든 하트에 우리 집 남자가 어떤 표정을 짓게 될는지 벌써부터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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