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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은실 Apr 30. 2024

속엣것

감자 까기와 닮은 꼴

                                                                         

저녁에 닭볶음탕을 먹고 싶다는 남편의 신청에 눈을 하얗게 흘겨주었다. 

‘하고많은 것 중 하필이면 닭볶음탕이람.’ 끌탕을 하면서 탕에 들어갈 감자 몇 알을 꺼내놓았다. 세상에서 제일 하기 싫은 것 중 하나가 그놈의 감자 까기다. 슬슬 감자 깎는 칼로 까면 간단한 그 일이 뭐가 어렵냐고 남들은 말하지만, 그 칼 운전하기가 왜 그리 힘든 건지. 어릴 적 엄마에게는 감자 까기 전용 숟가락이 있었다. 끝이 닳아 반쯤 사라져 있어서 감자 까기에 제격이었다. 엄마의 손놀림에 몸을 맡긴 감자들이 뽀얀 속살을 내놓고 동글동글 모여있는 것이 여간 예쁘지 않았다. 어느 날, 엄마가 감자를 까보라고 숟가락을 내밀었을 때 나는 부엌칼을 들고 설쳐댔었다. 내 손을 거친 감자는 삐쭉빼쭉 모가 난 건 당연했고 크기도 공깃돌만 하게 작아져 있었다. 그때 엄마는 기가 막힌 지 헛웃음만 짓고 있었다. 

감자 몇 알을 꺼내놓고 이런 생각을 하며 얼마나 앉아있었을까. 외모도 성격도 자기 아빠를 꼭 닮은 딸내미가 현관문을 열고 들어왔다. 부엌칼과 감자 까는 칼을 딸에게 슬며시 내밀며 감자 까기를 부탁했다. 예쁘게 까야한다는 잔소리를 하면서.

“이런 시 아니?”

순순히 부탁을 들어준 딸에게 보답 아닌 보답으로 권태응의 「감자꽃」이란 시를 읊어주었다. 감자를 올려놓은 쟁반 위로 투박한 아줌마의 목소리가 얹혔다.   

   

자주 꽃 핀 건 자주감자

파보나 마나 자주감자      

하얀 꽃 핀 건 하얀 감자

파보나 마나 하얀 감자     

   

“시는 참 좋은데 왠지 우리랑은 안 맞는 것 같아. 엄마는 하얀 감자꽃인데 난 피부색이 시커먼 게 꼭 자주감자 같단 말이지, 히히.” 딸아이의 소감을 들으며 싱크대 쪽으로 몸을 돌려 탕에 들어갈 나머지 재료를 손질했다. 토막 난 닭과 채소 손질을 마치고 뒤돌아서 식탁 위의 감자를 보는 순간 나는 깜짝 놀랐다. 거짓말 조금 보태서 주먹만 했던 감자가 메추리알만 하게 줄어들어 있었다. 보나 마나 부엌칼로 대충 깎았을 것이다. 아까운 마음에 감자 껍질을 이리 만지고 저리 만져봐도 되살릴 방법이 없었다. 살점이 뚝뚝 떨어져 나간 감자를 보니 헛웃음이 일었다. 딸아이가 까놓은 감자와 어릴 적 내가 까놓은 감자의 모양새가 크게 달라 보이진 않았기 때문이었다. 나는 엄마를 많이 닮았다. 작은 키에 뽀얀 피부, 쌍꺼풀진 커다란 눈…. 하지만 손끝이 야무진 엄마의 솜씨는 전혀 닮지 않았다. 어릴 적 내가 까놓은 감자를 보고 엄마가 지었던 헛웃음의 의미를 이제야 알 것 같았다. 그동안 딸아이가 해왔던, 나를 하나도 닮지 않았다는 말이 무색해지는 순간이었다. 

‘자식은 부모 못된 것만 닮는다더니 닮을 게 없어서 그런 걸 닮았을까.’ 나의 감자 까기 실력이 들통날까 차마 입 밖으로 내놓진 못했지만, 입 속에서는 그 말이 뱅뱅 돌고 있었다.    

“엄마, 자주감자는 속도 자주색이야?” 

“어릴 적 봤던 건 겉만 자주색이고 껍질을 벗기면 속은 하얀색이었어. 너도 겉만 자주색이지 어쩌면 속에는 하얀색이 조금은 들어있을지 모르지.”

갑작스러운 딸내미의 질문에 답을 하고 나니 목 언저리가 뻐근해져 왔다. 딸은 온통 제 아빠만 닮았다고 생각했는데 나를 닮은 점 한 가지를 발견한 것이 새삼 반가웠다. 그러나 모자란 내 솜씨를 닮았다니 속이 아려질 만큼 미안했다. 내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자신이 까놓은 감자가 예쁘다며 딸아이는 너스레를 떨어댔다. 오늘은 더 맛있는 닭볶음탕을 먹을 수 있을 거라고 흐뭇해하는 딸을 보며 또 한 번 웃을 수밖에 없었다.    
 


지금쯤, 친정집 텃밭에는 무명 저고리 색 하얀 감자꽃이 가득 피어있을 것이다. 땅속에는 크고 작은 감자들이 올망졸망 모여있을 테다. 어머니 자궁 같은 어둠 속에서 파보나 마나 어디가 닮았어도 닮았을 속엣것들이 영글어 가고 있을 테다. 줄기를 잡아당기면 꼭꼭 숨었다 들킨 아이처럼 햇살 아래 까르륵 뽀얀 웃음을 펼쳐 보여주겠지. 녹색이 짙어지고 있는 긴 여름의 중간 하지가 지나면, 친정 엄마를 닮은 내게 온 감자 한 박스가 어김없이 우리 집 베란다 구석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제 어미를 닮은 거라곤 감자 까는 실력밖에 없는 내 속엣것의 이름표를 붙이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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