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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은실 Apr 16. 2024

기다리는 사람

정치인 그들은 누구인가

                                   

모처럼 한가로운 날이었다. TV 채널을 돌리다가 인기 프로 「나는 자연인이다」와 눈이 마주쳤다. 매몰차게 피하려다 적선하는 셈 치고 눈 맞춤을 하기 시작했다. 한참을 보고 들으니 오늘 주인공은 한때 잘나가던 사업가였는데  어찌저찌 사업을 거덜 내고 산속으로 줄행랑을 친 사연을 가진 남자였다. 이 프로에 나오는 사람 중에는 자연치료를 위해 산으로 들어온 환자도 있지만, 대부분은 오늘의 주인공과 비슷한 사람들이었다. 산속에서는 몸을 움직이지 않고는 절대로 생활이 불가능하다. 섣부른 생각일지 모르나 그동안 이 프로를 외면한 이유라면 그들이 산속을 현실도피처로 택했기 때문이었다. 그들이 굳이 산중을 택한 이유가 내심 못마땅했다. 

‘치, 본인들이 소를 타고 자연 속으로 들어갔다는 노자쯤 되는 줄 아시나 보네.’라고 생각하며 곧바로 채널을 바꿔버렸다. 
  

이번에는 휴대폰을 뒤적이다 몇 달 전 지인이 보내온 사진과 눈이 마주쳤다. 찍은 이 말에 따르면 인도 어디쯤이라더라. 초로의 남자가 벼룩시장 귀퉁이에 좌판을 연 모습을 담은 사진이었다. 

사진 속 시간은 맵찬 바람이 잦아들고 이제 슬슬 봄이 오려 포근한 햇살이 퍼지는 오전이다. 남자의 턱에 돋은 수염은 허옇게 세었지만 구릿빛 피부에 미간으로부터 곧게 내리뻗은 콧대가 만만찮도록 고집스러워 보인다. 양지 녘 볕은 따사롭지만 아직 메마르고 건조한 바람 탓에 넣어두었던 털 잠바를 다시 꺼내 입었나 보다. 남자는 자전거 뒷자리에 오늘 팔 물건 몇 가지와 물 한 병 그리고 조간신문을 잊지 않고 챙긴 다음 덜컹거리며 산속 비탈 집에서 내려왔을 터이다. 한때 하늘을 날아갈 푸른 꿈도 꾸었다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는 듯, 색이 바래 푸르스름한 낡은 담요를 땅바닥에 펼치고 앉아있다. 그리고 그  위에는 짐 자전거에 몸소 싣고 온 물건이 가지런히 널려있다. 모두 다 해야 열 가지가 조금 넘으려나. 보석이라 하기엔 소박한, 돌멩이라고 하기엔 앙증맞고 빛 고운 액세서리가 접시 위에 앉아서 손님을 기다리고 있다. 제일 고급져 보이는 건 터키색 목걸이다. 누군가의 사랑을 꽤 오랫동안 받았었는지 손때가 제법 두텁게 묻은 두꺼운 책도 나와 있다. 소원을 들어주지 않아서 버림받았을까? 빛을 잃은 누런 십자가 목걸이도  고개를 바짝 치켜들고 손님을 기다리고 있다. 물건들이 앞을 다투어 호객 행위를 하는 이때, 반짝이는 보석도 누군가에게 절대적이었던 신도 타인의 몫이라는 듯 낡은 담요를 깔고 앉은 남자는 무심히 조간신문을 펼친다. 

‘하, 이 냥반, 자기가 유유자적 세월을 낚았다는 강태공인 줄 아시나?’ 
  

강태공은 기원전 12세기 사람이다. 평생 책에 빠져 생활이 궁핍했던 그는 매일 위수에 나가 낚시를 했다. 강태공의 낚시법은 취적비취어取適非取魚, 물고기를 잡는 행위만 하고 정작 물고기는 취하지 않는 것이었다. 강가에서 그는 정치판에 나가겠다는 큰 그림을 구상한 것이다. 물고기가 걸리면 구상에 방해가 될 것이 당연하니 일부러 물고기를 잡는 낚싯바늘을 사용하지 않았다. 결국 그는 낚시터에서 주 왕조 문왕과 조우한다. 나이 일흔이 넘어서 그제야 정계 입문을 해 나랏일을 도모했고 훗날 전국칠웅 중 하나인 제나라의 제후가 된다. 
  

참말로 강태공의 환생일까. 좌판을 펼친 남자는 물건 팔기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 듯하다. 얼굴에는 삶에 지친 기색이 없다. 그렇다고 봄볕이나 쪼이러 나왔다는 분위기도 아니다. 허름한 차림은 궁핍해 보이지만 물건을 팔아 생계를 꾸리자고 나선 것 같지는 않다. 강태공이 부인 마 씨에게 매일 구박을 맞았듯이 어쩌면 이 남자도 오늘 아침 유난스런 아내 잔소리를 피해 이곳 벼룩시장으로 나왔는지 모르겠다.

물건이야 팔리든 말든 신문을 읽으며 항간의 소리나 듣자고 벼룩시장에  낚싯대를 드리운 건 아닐까. 
   


나뭇가지마다 새순이 터져 나오던 새봄 무렵, 우리는 한바탕 선거를 치렀다. 덩굴장미 향기 가득한 여름 초입에 또 선거 바람이 분다. 푸른 나무들 사이로 연초록 이파리들이 반짝인다. 

국민밖에 모른다는 위정자들의 목소리가 확성기 너머로 한창이다. 진정 국민을 걱정하며 부단히 낚싯대를 드리웠던 사람, 그런 사람을 기다린다. 그러고 보니 어쩌면 내가 못마땅해했던 자연인들도 애타는 기다림에 지쳐 산속으로 들어간 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눈빛을 바꿔 곱고 순한 눈으로 「나는 자연인이다」에 다시 채널을 맞춰놓는 모처럼 한가로웠던 날이 저물어 가고 있다.(2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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