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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은실 May 24. 2024

혼불

최명희 대하소설

여류작가여서일까. 표현이 세밀하고 구체적이다. 이 책에는 관혼상제 전통의식이 자세히 나온다. 미처 다 옮기지 못하겠다. 그 시대 여인들의 운명이 가슴 아프다. 작가가 작품을 완성하지 못하고 타계했다. 이 또한 가슴 아프다.

오래 전에 읽었던 책이다. 긴 겨울에 뜨끈한 아랫목에서 읽으면 좋을 책으로 추천한다.


  ♧♧



이렇게 두드린  옷감을 다시 홍두깨에  편편하게 말아서 홍두깨틀에  얹고, 틀 아래 다듬잇돌을 받쳐 놓아 방망이질을 하노라면,  다듬잇돌 위에서 홍두깨는 방망이를 맞으며 저절로 조금씩 돌아가게 마련인데. 두들겨 맞은 방망이  자리마다 옷감에는 구름무늬, 물결무늬,  햇살 무늬, 이내 무늬, 아른아른 아련한 얼이 어리는 것이다.
맞으면서 제 살결에 피어나는 무늬.

그 무늬를 사람들은 얼이라 하였다.

그것은 색실로 수놓은  매화나 모란, 화조같이 한눈에 도드라져 뜨이는 것 아니면서, 빛깔도  없이, 속으로 번지는 것  같으나 그윽하고 휘황한 아른거림으로 피어나 추상의 문양을 이룬다. 움직일 때마다 결이 달라져 보는 이를 사로잡는 그 정취.
  무심한 피륙이 홍두깨에  감기어 다듬잇돌 위에 얹힌 채, 단단하기  바위도 쪼갤 만한 방망이를  온몸에 맞으면서, 맞은 자리마다 피멍이 비명을  토하는 대신 저토록 고운 얼을 무늬로 이루는 것이 어찌 예사로운 일이랴.

-최명희,《혼불》7권 10쪽



“그늘에 말려야 빛이 안 바래거든요.”

금방 건져낸 연분홍 한지를 널판자에 펼치는 도환의 말에 강호가 웃는다.

“이상하게도 안 변해야 할 것들은 꼭 그늘에서 말리지요?”

“그늘……그것 참 좋은 것입니다.”

“관목(棺木)도 그렇고, 거문고 만들 오동나무도 그렇고, 집 지을 서까래 기둥목도 그렇고, 이런 종이 한 장까지도.”

“그것뿐입니까? 아, 저 판소리에서도, 또랑또랑한 목은 별로 치고 소리에 그늘이 있어야 심금을 울리는 깊은 맛이 오묘하게 우러난다지 않아요?”

“세상의 이치가 묘할 따름입니다.”

-최명희,《혼불》9권 8쪽



춘복이는 그 말을 다시 한번 되뇌인다.그리고 둥그런 달이 하늘 높이 떠오르는 광경을 마음속에 그린다.

달님. 내 소원 하나만 들어주시오.

 부디 매안에 작은아씨. 내 사람 되게 해 주시오.

 그 말을 삼키고 있는 춘복이의 가슴  한복판에서 달이 둥두렷이 떠오른다. 참으로 희고 맑은 달이었다. 눈이 시릴 만큼 차가운 달빛을 투명하게 머금은 달은, 그의 흉중을 미동도 하지 않고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마치 너무나도 맑아서 손 끝만 스쳐도 그대로 지문이 찍히는 명경처럼.

 그 달은 바로 강실이의 얼굴이었다.

춘복이는 행여 그 달이 흔들릴세라 숨도 크게 쉬지 않았다. 그리고 동녘 하늘 저만큼을 숨죽이어 바라보았다.


 P225

가슴을 도려내 버린 그 자리에는 메마른 연달만이 가슴에 걸린 가시처럼 드러나 있고, 그 구멍으로는 하늘이 그대로 푸르게 비치는 것이었다. 애(肝腸)도 창자도 없이 비어 버린 연의 가슴을 푸른 하늘이 대신 채워 주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그저 빈 집을 아무 뜻 없이 통과하는 바람처럼 하늘은 비치는 것일까.

강실이는 사립문간에 선 채로  하염없이 연들의 뚫린  가슴을 올려다보았다. 그 연들은 가슴에 하늘이 시리게 박힌 것처럼도 보였다.

 "왜 연에다가는 구멍을 뚫는대요?"

 어린 날 강모는 그렇게 물었다.

 "그래야 잘 날지. 그게 바로 연의 비밀이니라."

 기응은 웃으면서 대답했었다.

 "비밀?"

 "비어야 상하. 좌우. 자유자재로 날 수 있는 것이다."

-최명희,《혼불》5권 170쪽,225쪽


사람은 누구라도 앞모습보다 뒷모습이 실해야 한다.

살고 난 뒷자리도 마찬가지라.

앞에서 보면 그럴듯해도 돌아선 뒤태가 이상하게 무너진 듯 허전한 사람은, 그 인생이 미덥고 실하지 못하다.

앞모습은 꾸밀 수 있으나 뒷모습만큼은 타고난다는 뜻도 있으리라.

사람 귀천은 뒤꼭지에 달려있느니. 뒷모습은 숨길 수가 없다.

관상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전상이 불여 후상이라. (前相 不如 後相)

사람의 앞모습 좋은 것이 뒷모습 좋은 것만 못하며,

후상이 불여 심상이라. (後相 不如 心相)

뒷모습이 아무리 보기 좋아도 그 사람 마음의 모습이 바르고 훌륭한 것만 못하다 했다.


-최명희,《혼불》5권 170쪽,22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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