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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은실 Jun 18. 2024

요구르트 만남

플레인 요구르트 만들기


꽤 여러 해 전의 일이다. 모임이 있는 날이었다. 오랜만에 얼굴을 내보인 지인이 물통만 한 플라스틱 통에 순두부 같은 플레인 요구르트를 가득 채워 가져왔다. 아침에 미국에서 비행기 타고 온 귀한 놈이라고 우스갯소리를 하며 잘 키워 먹어야 한다고 당부했다. 우리들의 만남도 요구르트처럼 언제나 신선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덧붙이며 자그마한 통에 나누어 주는 것을 받아 집으로 가져왔다. 이것이 요구르트와의 첫 만남이었다.   
  

바짝 말려놓은 유리 볼에 귀한 놈을 넣고 우유를 가득 부었다. 식탁 옆 구석진 곳에 녀석을 놓아둔 뒤로 이삼일이 지났다. 뚜껑을 열어보니 뭉글뭉글한 플레인 요구르트가 가득하였다. 신기했다. 과연 귀한 놈의 능력은 대단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우유만  부어놓았는데 요구르트가 한가득이라니. 

새큼한 요구르트에 딸기잼을 넣어 떠먹으니 후식으로도 괜찮고, 먹다 남은 과일과 섞어 갈아서 샐러드에 드레싱으로 끼얹어 먹어도 맛이 좋았다. 시리얼과 견과류를 넣으니 간편한 아침 식사 대용으로도 그만이었다. 살아서 장까지 가는 신선한 요구르트 만드는 재미가 솔솔 피어올랐다. 

몇 달쯤 지났을까. 이제는 요구르트 만들기에 슬슬 흥미가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래서 꾀를 냈다. 자그마한 딸기잼 병을 식구 수대로 구해 각자 키워 먹기로 했다. 아이들은 퍽 재미있어했다. 자기 스스로 만드니 더 맛있다고 하면서 애지중지했다. 하루는 아들이 그만 자기 병에 있는 요구르트를 남김없이 다 먹어버려서 울상이 되었다. 요구르트를 먹기 전엔 다른 병에 씨앗을 미리 떠놓아야 한다고 일렀는데 먹다 보니 씨앗까지 다 먹었다는 것이다. 다른 병에 미리 조금 떠놓는 요구르트를 나는 씨앗이라고 불렀다. 씨앗에 우유를 붓고 기다리면 요구르트는 멍울을 만들며 보얗게 피어올랐다. 
 

사실 우유만 부어놓는다고 다 요구르트가 되는 건 아니다. 우유와 씨앗의 농도도 맞아야 하고 주변 온도도 맞아야 한다. 그리고 잘 피어 달라는 간절함도 섞여야 한다.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너무 묽게 되어버린 경우가 있다. 또 기간을 너무 오래 두어 상해버린 적도 있다. 마트에 가면 얼마든지 편하게 사서 먹을 수 있는데도 수년 동안 굳이 씨앗을 소중히 여기며 피워 올렸던 요구르트 사랑이 이제는 가족들 모두의 마음속에서 시들해졌다. 요구르트 사랑이 식어서였을까. 만나면 이런저런 이야기로 꽃을 피우던 우리 모임도 차츰 끈기를 잃더니 어느 날 아예 흩어져 버렸다. 지금은 씨앗까지 다 먹어버렸다고 울상 짓던 아들 녀석의 얼굴만 기억 속 어디쯤에서 웃음 짓고 있다.     
  

나는 요구르트 씨앗을 그리움이라 이름 지었다. 어느 유행가에서 그리움이란 사랑이라는 이름에 소망을 더하는 것이라 하더라. 나의 그리움은 기다림에 간절함을 보태는 것이라 우겨본다.      
  

인생 살아가다 보면 누구든 만남이라는 인연을 갖게 된다. 나는 어떤 만남으로 어떤 사람들과 기대며 살고 있는지 가끔 되짚어 보게 된다. 인생에 어찌 좋은 만남만 있으랴마는 좋은 인연으로 만들려고 서로 노력은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단순한 더하기 빼기의 원리만 강조하는 만남은 금방 시들기 마련이다. 흐지부지 길게 가는 경우도 있고, 짧지만 인생을 뒤흔드는 경우도 있고, 절대 이루어지지 말았어야 할 만남도 있다. 그러고 보면 만남에도 대상에 대한 열정의 농도와 적당한 온도가 맞아떨어져야 한다는 요구르트식 조건이 필요하겠다. 아침 일찍 만나 온종일 치대고 가슴 밑바닥까지 박박 긁어 쏟아내 볶아대다 헤어지면 머리가 지끈거리고 가슴속이 허하다. 그래서 잦은 만남이나 시간을 오래 허비하는 만남은 후회만 남기기 일쑤다. 그런 만남은 요구르트 씨앗도 남기지 않고 모조리 먹어버렸을 때의 아들 녀석처럼 울상을 짓게 한다. 헤어짐이 당장은 아쉽겠지만 요구르트를 만들 때처럼 그리움의 씨앗은 가슴속 밑바닥에 늘 남겨두어야겠다.        
  



좋은 만남은 농도와 시간이 맞춰져 잘 부풀어 오른 신선한 요구르트여야 하겠다. 가슴 밑바닥에 가라앉혀 둔 그리움의 씨앗에 기다림을 넉넉히 부어놓고 기다리자. 그리움이 요구르트 되어 뭉글뭉글 피고 부풀어 오를 때까지. 보얗게 피어오른 그리움에 간절함이 보태지면 그때 만나러 가자. 그래야만 미국에서 처음 내게로 왔던 신선한 요구르트처럼 만남도 언제나 귀한 대접을 받는 그런 놈이 되어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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