눅진한 장마철이었다. 장마철이라 해도 빨래 말릴 햇살은 준다고 아침까지 내리던 비가 점심때를 지나자 환하게 개었다. 감나무 이파리에 붙어있던 빗방울 사이로 햇살이 반짝이며 비추던 오후였다. 장맛비로 물이 불어 큰물진 개울가로 나서지 못한 예닐곱 살 난 계집아이는 집 앞 도랑으로 빨간색 장화를 신고 나섰다. 행여나 비가 또 내릴지 모른다며 엄마가 손에 쥐여준 대나무 살이 부러진 파란색 비닐우산도 끌고 나왔다. 번듯한 우산은 언니들이 아침 일찍 골라 쓰고 학교로 갔으니 남아있던 바보 우산은 아이 차지가 될 수밖에 없었을 터였다.
“누렁아, 가자.” 도랑에 쭈그리고 앉은 아이는 모랫둑을 만들기 시작했다. 평소 이 도랑은 버스럭거리는 모래만 있을 뿐 물 한 방울 흘러내리지 않는 상태로 말라 있었다. 그러다 장마철만 되면 졸졸 소리를 내며 물줄기를 만들어 내곤 했다. 아이는 이때를 놓칠세라 모랫둑을 만들고 물레방아를 만들었다. 조막만 한 손으로 모래를 모아 둑을 만들면 물살은 모래를 흩어놓았고 모아놓으면 또다시 무너져 버리고…. 아이의 콧잔등에는 송골송골 땀방울까지 맺혔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저만치에 앉아서 물끄러미 바라만 보던 누렁이도 어지간히 애가 탔는지 도랑을 내려다보며 안쓰러운 발길을 동동 굴렀다.
누렁이는 아이네 집 강아지인데 진돗개처럼 뼈대 있는 품종은 아니었다. 메리는 엄마가 지어준 너무나도 세련된 누렁이 이름이었는데, 그저 마당 한쪽 귀퉁이 작은 집에서 평범하고 유순하게 식구들이 남긴 밥을 먹고 사는 그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엄마는 밥을 줄 때마다 우아한 목소리로 메리를 불렀지만 아이는 언제나 엄마 옆에 쪼그리고 앉아서 “누렁아, 밥 먹자.”라며 손을 내밀어 그를 불렀다. 아이는 누렁이가 메리라는 이름을 싫어할 거라 생각했다. 왜냐면 그의 털은 반지르르한 검은색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귀티 나는 흰 털을 가지고 있지도 못했다. 그는 아주 촌스러운 누렁 털옷에 가끔은 검댕이를 묻힐 만큼 털털했다. 게다가 엄마가 부를 때는 못 들은 척하던 그가 아이가 부를 때면 발딱 일어나 제집에서 걸어 나왔기 때문이다. 그리고 엄마는 눈치채지 못했겠지만, 유독 몸이 약해 친구들과 잘 어울리지 못했던 계집애에게 누렁이는 제일 친한 친구가 된 지 오래이기도 했다.
두어 시간은 족히 지난 듯했다. 조막만 한 손을 부지런히 놀린 덕에 열심히 쌓고 또 쌓아 드디어 도랑을 막은 모래성이 완성되었다. 아이는 얼른 집 앞 텃밭으로 달렸다. 그러고는 어른 손가락 굵기만 한 호박 줄기 하나를 잘라내어 나지막이 세워진 모랫둑 중간부에 꽂았다. 갇혀있던 도랑물은 오로지 호박 줄기만을 관통해 제법 힘 있게 아래로 흘러내렸다. 아이는 그것을 물레방아라고 이름 지었다. 드디어 아이만의 물레방아가 완성된 것이다. 아이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누렁이도 그제야 꼬리를 흔들며 네 다리를 꼿꼿이 폈다.
“아무개야 어서 밥 먹어라.” 멀리서 들려오는 엄마 목소리에 계집애는 쪼그린 다리를 펴고 일어나 손을 털었다. 일어서서 서쪽 하늘을 바라보노라니 저녁 하늘에 먹장구름 한 떼가 몰려오고 있었다. 행여 오늘 밤에 또다시 장맛비가 내려 애써 만들어 놓은 물레방아가 떠내려가면 어쩔까 하는 마음에 계집애는 집으로 가면서도 자꾸만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이의 마음을 아는지 누렁이도 아이 옆에서 고개를 수그린 채 땅바닥만 바라보며 무거운 발걸음을 옮겼다.
그날 밤 아이는 비가 오지 말기를 바라며 잠이 들었을 것이다. 다음 날 아침, 일찌감치 잠에서 깬 누렁이가 계집애보다 먼저 서둘러 도랑으로 내달렸을 것이다.
고층 빌딩 사이로 그때처럼 눅눅한 장마철이 시작되고 있었다.
「인공지능(AI) 시대의 수필 문학」이라는 제목의 심포지엄이 있는 날이었다. 내용은 대략 이러했다. 이미 사회 전반에 AI는 깊숙이 스며들어 있다. 그렇다면 바둑을 점령한 AI에게 과연 문학도 점령당하게 될까. 실제로 일본에서는 이미 AI가 쓴 소설이 나왔고 우리나라에서도 거액을 내건 공모전이 열렸다고 한다. 소설에 AI가 손을 댔으니 수필도 그에게 점령당하게 될까. 인공지능 개발자가 무수히 많은 자료와 정보를 수집한 데이터를 저장하고 전달하면 지극히 개인적이고 인간적인 한 편의 수필을 완성할 수 있을까.
오늘 밤 장맛비가 내려서 애써 만들어 놓은 모랫둑이 허물어져 버리면 어쩔까. 그래서 물레방아가 떠내려가면 어쩌지? 생각 끝에 집으로 오던 길을 되돌아가 살이 부러진 비닐우산을 물레방아 위에 갸우뚱 펼쳐두고 까무룩해져 돌아왔던 그날의, 누렁이와 나만 아는 걱정을 과연 AI가 알아낼 수 있을까? AI 괴물에게 들키고 싶지 않은 비밀인데. 그렇다면 그가 그걸 알아채지 못하게 기억의 창고 속에 꼭꼭 숨겨두어야 할까.
자못 묵직하면서도 한편 우스꽝스러운 고민을 머릿속에 떠안은 나이배기 계집아이는 장마철 습기로 눅눅해진 몸을 무거운 지하철에 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