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박은실 Jan 01. 2024

오줌싸개 환쟁이

오줌 싸는 아이와 화가

                                         

고개를 뒤로 젖히고 마루 위에 걸려있는 그림을 올려다보며 소녀는 물었다.

“옆에 있는 저 할아버지 얼굴은 하얀데, 할아버지 얼굴은 왜 이렇게 빨개요?”

수염을 허옇게 기르고 호박 단추 마고자를 점잖게 차려입은 노인은 이렇게 대답했다.

“글쎄, 그날 술을 엄청 많이 먹었잖어.”     

소녀네 집 마루 위에는 양쪽으로 펼친 스케치북만 한 그림 두 점이 걸려있었다. 그것은 증조할아버지와 할아버지의 초상이었다. 그려질 당시에 무슨 이유가 있었는지 모르겠으나 종이가 아닌 광목천 위에 그려져 있었다. 그림은 도화지에만 그리는 줄 알고 있던 소녀는 옷감의 결이 가늘게 보이는 것이 마냥 신기하기만 했다. 채색을 별로 하지도 않았고 가늘고 세세하게 수를 놓듯 정성을 들인 부분은 수염뿐으로 특별한 기교를 부리지도 않았다. 광목 바탕에 먹을 갈아 유연하게 붓으로만 그린 초상화.     

희고 갸름한 얼굴에 눈매가 선하며 허연 수염이 입언저리부터 마고자 단추까지 가지런히 내려와 있다. 입술은 연한 살구색이며 두루마기를 입고 갓을 쓰고 있는 분이 소녀의 증조부시다. 그 옆에는 대춧빛 얼굴에 이글거리는 눈매, 호랑이 눈썹과 입언저리의 수염은 검고 숱도 많다. 머리에는 관을 쓰고 세상 무서울 것 없어 보이는 모습을 한 분은 소녀의 할아버지다.     

“그런데 이 그림은 누가 그렸는데요?”

왕방울 고무줄에 묶인 머리채를 흔들며 소녀는 또 물었다.

“오줌싸개가 그렸지.” 열 살짜리 소녀 옆에 서서 뒷짐을 진 채 함께 그림을 바라보던 할아버지는 대답했다.

“하하하…. 오줌싸개요?” 재밌어라 배꼽을 움켜쥐며 소녀는 웃었다.

“내 옛날얘기 해주랴?”

“네. 해주세요.” 소녀는 귀를 쫑긋 세우고 마룻바닥에 자세를 고쳐 앉으며 옛날이야기 들을 준비를 하였다. 여든을 코앞에 둔 노인도 길고 흰 수염을 매만지며 센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그리고 사랑채 지붕 끝 하늘가로 시선을 돌리며 케케묵은 이야기를 차분하게 시작했다.     


예전에는 초상을 그리려면 환쟁이를 집으로 불렀단다. 환쟁이란 지금으로 말하자면 화가를 이르는 말인데 그때는 누구나 그렇게 낮추어 불렀어. 아부지가 연로하시니 초상 하나를 그려놔야겠다 마음먹었던 차에 때마침 대문을 열고 허름한 옷차림을 한 환쟁이가 들어온 게야. 초상 하나만 그려도 사나흘씩 걸리는데 우리는 두 개를 부탁해야 하니 시간이 더 오래 걸릴 게 분명했지. 그래서 사랑방에 처소를 마련해 주고 먹여주고 재워주며 지내게 되었어.

한 열흘 걸려서 그림은 완성되어 가는 듯했고 드디어 마지막 날이 되어 그림값이 얼마냐고 물었잖겠니? 그랬더니 환쟁이는 마지막 손질을 하고 내일 아침 떠날 테니 그림값은 그때 받으마 하고는 커다란 술 항아리를 가리키며 술이나 마시자고 하는 게 아니겠누? 말이 떨어지자마자 우리는 마시기 시작했단다. 이 핼애비도 술이라면 동네에서 일등이었거든. 저녁 늦게야 술 항아리는 다 비워졌고 환쟁이는 곤드레만드레 몸을 가눌 수 없을 만큼 취하고 말았지. 하는 수 없이 다음 날 일찌감치 조반을 먹여 보내야겠다고 마음먹고 술에 취한 환쟁이를 사랑방에 데려다 재웠단다.

그런데 다음 날 아침 사랑방에 가보니 사람이 사라진 게야. 요와 이불을 들 수 없을 만큼 오줌을 잔뜩 싸놓고서 말여. 그림값은 고사하고 사는 곳도 이름도 성도 가르쳐 주지 않고 오줌 싼 것만 부끄러워서 새벽에 도망을 쳤던 모양이야. 그래서 초상을 그린 지 30년이 넘도록 오줌싸개 환쟁이로만 알고 있단다. 오줌싸개가 가고 난 다음에 완성된 초상화를 보니 내 얼굴이 저렇게 벌겋게 물들어 있지 뭐냐. 허허허. 아직 살아있다면 한 번쯤 찾아오기라도 하련만 바람결에라도 소식이 없는 걸 보면 아마도 저세상 사람이 된 게지.


그때까지 옛날이야기에 전념하고 있던 말똥말똥한 소녀의 눈이 할아버지에게서 마루 위에 걸린 증조부 초상으로 옮겨 갔다. 그러다 문득 소녀는 지금 옛날얘기를 해주는 할아버지의 눈매와 허연 수염이 증조할아버지와 닮았다는 생각을 슬며시 하게 되었다.     


어느덧 반백의 나이를 넘어가고 있는 소녀는 시절도 모르고 친정집 마당 위로 두덕두덕 쌓여가는 때늦은 눈이 지나온 시간처럼 느껴져 정겹다. 할아버지가 소녀에게 옛이야기를 들려주시던 그 마루에서 소녀의 친정아버지와 손자의 윷놀이가 한창이다. 앞니가 옴쏙 빠진 여덟 살배기 손자와 즐거이 윷놀이를 하는 아버지 얼굴 위로 자식에게는 엄하고 손자에게는 한없이 너그러우셨다던 증조할아버지의 초상이 흐릿하게 겹쳐진다. 증조할아버지처럼 수염을 허옇게 기르지도 않았고 두루마기를 입은 것도 아닌데 말이다.

늙어가는 소녀는 그림 보는 눈이 없다. 그녀에게 김홍도나 신윤복은 자신과 거리가 먼 화가들일뿐이다. 소녀의 생각 속에 있는 오직 한 사람, 무명의 오줌싸개 환쟁이만이 그녀가 알고 있는 최초의 화가였고 예술가였다. 훌륭한 예술 작품은 시공을 초월한다던데 낡고 오래된 초상화 두 점에서 면면히 흘러간 세월을 읽는다.

   
       당신은 오월을 닮았군요 - 예스24 (yes24.com)

작가의 이전글 소주 한 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