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 환자의 어떤 날
돌아오는 길에 남편은 형부와 소주 한 잔 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언니가 싫어할까 염려되어 차마 그 말을 할 수 없었다고 했다. 차라리 말을 했으면 좋았을 성싶었다. 남편이 딸딸 따라주는 한 잔의 술을 받아 마시며 형부가 잠시 통증을 잊고 보석 같은 행복을 추억하며 달콤한 웃음을 지었다면 좋았을 것 같았다.
사는 내내 규칙을 적잖이 어겨온 형부였다. 드라마 속에 흔히 나오는 가장처럼 사업에 실패해서 막대한 돈을 잃기도 했고 보증을 잘못 서 집을 잡히기도 했다. 방황이라는 구실 하에 몇 년 동안 가출을 한 적도 있었다. 밉기도 했고 싫기도 했다. 만약 남편과 형부가 소주잔을 기울였다면 이제는 거의 남아있지 않은 미움 끝에 날을 세우며 나는 이렇게 물었을 것이다. “인생이 달면 술이 쓰고 인생이 쓰면 술이 달다면서요. 형부, 이 소주 맛은 씁니까, 답니까?” 치료와 통증만 있는 매양 그렇고 그런 날, 마지막으로 규칙을 어기고 마신 한 잔의 소주가 어쩌면 진통제보다도 여인네의 분 냄새보다도 달고 향기로웠을지 모른다. 혀끝으로 들어온 알코올 기운이 핏줄을 타고 지나며 다다르는 곳마다 좋은 기억만 살려놓았을 것 같았다. 남편 말대로 향불 앞에 따라놓는 술 한 잔이 무슨 소용이 있으랴. 그런 이유로 남편은 굳이 버스로 가자고 했나 보다.
형부 병문안을 다녀왔다. 설 쇠고 이제 막 쉰아홉이 된 형부는 암 투병 중이다. 전립선에서 시작된 암이 허리뼈로도 가고 간으로도 갔다니 무슨 암이라고 딱히 말하기도 어렵다. 항암제 투여로 힘없이 빠져나가는 머리카락처럼 생명이 소리 없이 빠져나가는 모습을 보았다. 무릇 생명이란 촉촉한 물기가 필수 조건일진대, 그의 피부는 심하게 건조하고 거칠었다.
진통제 챙겨 들고 형부와 가까운 곳으로 여행이라도 다녀오라고 언니에게 말을 건넸다. 심한 통증이 언제 올지 몰라 어렵다며 언니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과거 위급했던 날에 앰뷸런스를 불러 응급실로 울며불며 달렸을 언니 모습이 그려져 더는 강요하지 못했다. 내 의지대로 사는 것과 어찌하지 못해 살아지는 것의 차이를 알 듯도 했다. 남은 시간은 6개월 남짓이라고 지난가을에 담당 의사가 선고했단다.
나는 늘 죽음이 삶의 일부라고 생각해 왔다. 죽어가는 순간에도 먼 나라 여행 가듯 설레며 갈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물기 없는 형부 모습을 보니 죽어가는 것이 더없이 무겁고 쓸쓸한 일처럼 느껴졌다. 이미 시한부 삶이란 걸 알았기에 어떤 위로도 할 수가 없었다. 형부가 가끔 쓸쓸하게 흘리는 웃음은 남겨진 사람들에게 베푸는 배려인 것만 같았다.
의사가 지난가을에 6개월 남았다고 했다던 말이 자꾸만 목에 걸렸다. 지금은 2월이고 설 전날이 입춘이었고 가을 석 달 겨울 석 달. 손가락을 꼽다가 말아버렸다. 여섯 달 뒤가 멀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자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인천에서 병문안하고 돌아오는 길. 벚나무와 벚나무 사이에 버스 정류장이 자리하고 있었다. 버스를 기다리며 나는 벚나무 가지를 올려다보았다. 역시 살아있는 것은 달랐다. 겨울답지 않은 포근한 기온 덕에 나무는 벌써 가지 끝까지 물기를 끌어올리고 있었다. 미세먼지 가득한 겨울 하늘을 헤치며 봄은 기어이 오고 있었다. 활짝 피었다가 한 줄기 바람에 분분히 날리는 연분홍 벚꽃 잎. 해마다 봄이면 거리를 수놓는 꽃잎을 형부는 이번에도 볼 수 있을까. 퐁퐁 꽃망울 터지는 소리를 언니는 지난봄처럼 신기해하며 들을 수 있을까.
‘끼익’ 소리를 내며 정류장 앞에 버스가 섰다. 술은 독이 되기도 하고 약이 되기도 한다던가. 머리로 따지자면 소주 한 잔은 말기 암 환자에게 분명 독이다. 하지만 소주 한 잔으로 어차피 가야 할 길을 10년 뒤로 늦추진 못할 판이다. 형부가 원한다면 눈 딱 감고 차라리 한 잔 드릴 걸 그랬다는 짧은 후회가 가슴속으로 따지듯이 끼어들었다. 가는 사람에게도 보내야만 하는 사람에게도 약이 되었을 것 같기만 한 소주 한 잔을 남편은 끝내 아쉬워했다. 술기운이 돌아 발그레해져 연분홍이 된 형부 얼굴을 평생 기억하고 싶은 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다음에 와서….” 말끝을 얼버무리고 남편의 손을 잡아당겨 버스에 올랐다. 공기 중에 퍼져있던 부연 미세먼지가 폐 속까지 끼어들었는지 가슴속이 답답했다. 이놈의 미세먼지가 버스에 같이 올라타기라도 했는지 눈앞이 부옇게 흐려졌다.
연분홍 향기마저도 가뭇없이 사라져 버린 어느 늦봄, 향불 앞에 따라놓은 술 한 잔에 그날의 미련이 남아 그렁그렁 넘쳐흐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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