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조물주 위에 건물주’라는 말이 유행한 적이 있었다. 단기간에 온갖 수법을 동원해 터무니없이 임대료를 올리는 악덕 건물주 때문에 생긴 말이렷다. 인상된 임대료를 감당하지 못하는 자영업자들은 잘살아 보겠다는 꿈을 가지고 개업한 점포를 옮기거나 폐업할 수밖에 없다. 현재도 이런 악덕 건물주들이 곳곳에 있지만, 시간과 비용을 들여가며 법에 하소연하기엔 자영업자들의 생활은 어렵기만 하다.
나도 약 7년간 산후조리원을 운영했었다. 역시 건물주는 조물주 위에 있었다. 첫 임대 계약 기간은 5년이었다. 특이 사항 란에 적힌 ‘임대료는 물가 상승률에 따라 3년 후 조정될 수 있습니다.’라는 작고 흐릿한 문구에 목덜미를 잡혔고 3년 후 내가 어쩔 도리도 없이 임대료는 인상됐다. 5년 계약 만료일이 거의 다 되어갈 무렵, 건물주는 재계약 의사를 물었고 조리원 실내 인테리어 상태가 양호했으므로 당연히 재계약에 동의했다. 나는 5년 재계약을 원했지만, 건물주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오랜 협상 끝에 2년 연장을 했고 월세는 이런저런 핑계를 댄 건물주 뜻대로 대폭 인상됐다. 다시 또 2년이 지나갈 무렵, 건물주는 역시 대폭 인상한 임대료를 제시하며 재계약 의사를 물었고 이번에는 내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엄마, 조물주 위에 건물주라잖아. 근데 이번에는 교수님 위에 이모님이야.” 숨 가쁘게 퇴근한 딸내미가 한 말이다. 딸아이는 K 대학병원 마취과에서 간호사로 일하고 있다. 수술이 늦어지는 날이 많아서 제시간에 퇴근하는 날이 그리 많지는 않다. 그날은 딸아이 표현대로 칼퇴를 해서 기분이 좋았던 모양이다. 칼퇴가 뭐라고 입가에 웃음이 조랑조랑 매달렸다. 교수님 위에 이모님이라니 그게 무슨 말이냐고 묻는 내게 딸아이는 자세하게 설명해 주었다.
병원 내에 꼬장꼬장하고 꼼꼼하기로 소문난 젊은 교수님이 있단다. M 교수는 한 시간이면 충분한 수술을 세 시간으로 늘리는 재주를 가지고 있었다. 지나치게 세심하고 꼼꼼한 성격이었다. 환자 입장에서는 고마운 교수님이지만 수술실이나 마취과 스태프 입장에서는 꺼려지는 분이었다. M 교수의 수술이 오후 3시나 4시에 잡히면 모두들 인상을 찡그리게 되고 칼퇴근은 물 건너간다는 것이다. 보통 퇴근 시간이 오후 5시이니 그럴 수밖에. 그날 M 교수 수술 시간은 오후 3시였다. 수술 팀과 마취 팀의 정시 퇴근은 이미 안드로메다로 날아간 상태였다. 그런데 이게 웬일일까. 교수님 손끝에 귀신이라도 붙었던 것일까. 메스가 춤을 추며 날아다니더니 수술은 정확히 한 시간 만에 끝이 났다. 보통의 경우라면 세 시간은 너끈히 걸릴 수술인데도 말이다. 말끔하게 마무리를 한 그에게 담당 레지던트가 물었다.
“어쩐 일로 이렇게 빨리 끝내셨습니까?”
“우리 아기를 돌보는 베이비시터 이모님이 오늘은 개인 사정으로 5시에 퇴근하셔야 한다잖아. 그 이모님 놓치면 다시는 그런 분 못 구해.” 그렇게 말한 그는 모두에게 수고했다는 상큼한 인사를 남기고 수술실 문밖으로 나갔더란다. M 교수님 부인도 일한다니 둘 중 누군가는 이모님 스케줄에 피해가 가지 않도록 서둘러 퇴근해야 하는 입장이었다.
내가 운영했던 산후조리원의 건물주는 60대 중반의 남자로 얼굴에 기름기가 질질 흐르며 느물 느물하기 짝이 없는 인물이었다. 소문이 좋지 않아서 모두 꺼리는 사람이었다. 나중에 알았지만 나 말고 같은 건물에 입주해 있던 안과와 약국 운영자도 같은 수법에 당해 적잖이 속이 상했었단다. 건물주는 임대 기간 동안 조리원 내부에 들어와 본 적이 거의 없었다. 그랬던 사람이 7년이 거의 다 돼 갈 무렵 조리원을 둘러보며 이용 금액을 물은 적이 있었다. 딸아이가 출산을 앞두고 있다나. 우리 조리원에서 조리하게 된다면 분명 공짜를 원할 것이다. 하여 나는 출산 예정 달에는 예약이 꽉 차 있다고 거짓말을 하고 돌려보냈다.
지금쯤 건물주의 손주는 두어 살이 되었을 것이다. 혹여 그 집에서 베이비시터 이모님을 구하진 않을까? 그렇다면 M 교수님 댁 이모님을 추천해 주고 싶다. 그리고 맞벌이를 하는 딸과 사위를 대신해 조기 퇴근하는 이모님 발아래서 건물주가 설설 기는 모습을 고소해하며 보고 싶다.
세상 모든 악덕 건물주의 코를 납작 눌러주고 자영업자들의 얼굴에 내 딸아이 입가의 미소를 얹어줄 이모님은 어디에도 없는 것일까. ‘건물주 위에 있을 이모님을 구합니다.’ 이것이 오늘을 사는 임차 자영업자들의 뼈아픈 외침이진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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