콩나물 시루와 열녀상
친정집 창고 한쪽 구석에서 할아버지의 시계를 발견했다. 할아버지가 일제강점기 때 7원을 주고 사셨다던 옻칠이 된 나무 벽시계이다. 오랜 세월의 흔적을 말해주듯이 군데군데 칠은 벗겨졌고 창고 가운데가 아닌 가장 깊숙한 구석에서, 뽀얗게 먼지를 뒤집어쓰고 앉지도 서지도 못한 채 웅크리고 있었다. 그래도 한때는 넓은 대청마루 한가운데 제일 높은 곳에서 뎅뎅 시각을 알리며 행세깨나 부린 인사가 아니었던가.
현대식으로 집을 리모델링하면서 시계추를 잃어버려 이제는 쓸모없게 된 벽시계를 보자, 대청마루에서 따르륵따르륵 시계 밥을 주시던 할아버지 모습이 떠올랐다. 그리고 잃어버린 시계추가 기억 속에서 되살아나니 푸스스 퍼지는 창고의 먼지 속에서 쪽을 진 두 할머니의 모습도 떠올랐다. 벽시계 소리와 함께 두 분의 독백이 들려왔다.
형님, 내 얘기 좀 들어보셔유. 나도 땅속에 뼈를 묻은 지 40년이 넘어가니 이제야 속엣말을 해보려 하우. 속 모르는 동네 사람들은 나를 보고 안방 차지하고 있으니 권세깨나 부렸을 거라고 수군대지만 내가 무슨 권세를 부려봤겠수. 저 양반이 곳간 열쇠를 형님께 맡기고 있으니 쌀 한 톨인들 내 맘대로 써봤겠수? 줄줄이 딸린 코흘리개 자식들이 형님 방문 앞에 공손히 서서 월사금을 탈 때면 속으로 저 양반을 얼마나 원망했는지 모르우. 머슴처럼 집안일이란 일은 도맡아 하면서 시어르신들한테 치하를 받는 건 언제나 형님이셨으니 어떨 땐 형님이 재가라도 했으면 하고 바라보기도 했었수. 한겨울, 저이가 형님을 안방에 불러 앉혀놓고 『삼국지』며 『임진록』이며 낭랑한 목소리로 읽어줄 때면, 부아가 치밀어 일찌감치 혼자 된 상기 할멈을 찾아가 곰방대만 연신 물어댔지 뭐유. 시어르신 돌아가시고 나서도 꼭 부모 모시듯 애들 아부지와 형님을 겸상하게 해드리고 나는 아이들과 한 상을 쓰지 않았수? 어디 그뿐이유? 줄줄이 딸 셋을 두고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첫아들을 낳았으나 결국 형님 자식으로 올렸을 때, 뒤꼍 장독대 옆에 붉게 익은 꽈리를 쥐어뜯으며 행주치마가 다 젖도록 울었수. 나는 종손이니 종중이니 이런 거 잘 모르우. 그저 남편 사랑 후하게 받고 병아리 같은 자식들 품에 끼고 사는 게 여인의 행복이라고 생각할 뿐이유. 홍홍, 그래도 내 형님과 함께 다듬잇방망이질 할 때면 박자가 잘 맞아 신바람이 나기도 했었지요. 칠십 평생 살면서 영감 손 잡고 비행기 타고 제주도까지 가 보고 죽은 년은 동네에서 나 혼자뿐이니 호강 못 했다 할 바는 아닌 듯도 하구유.
여보게, 동서. 내가 자네를 얼마나 부러워했는지 아오. 열아홉에 한 살 어린 사람과 혼인을 했는데 자식 하나 남기지 않고 일 년 만에 남편이 저세상 사람이 되었다네. 남편 잡아먹은 년이라고 시어르신들이 고운 눈빛 한 번 주지 않더구먼. 청상과부라는 이름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으며 대문 밖 출입도 제대로 못 했네. 곳간 열쇠 열 개를 쥐고 있으면 뭐 하겠나. 저 사람이 또 입덧을 하는가 보다 하면 어느새 남산만 한 배를 내밀고 뒤뚱거리며 마당을 거니는 자네를 보고, 여자로서 부러움에 밤잠을 설친 적이 하루 이틀이 아니었다네. 잠 안 오는 밤, 콩나물시루에 물을 주고 마당에 나와 서서 새벽 찬바람에 홀로 떨고 있는 먼 하늘 별을 바라보며 처량한 내 신세를 한탄했던 적이 어디 한두 번이었겠나. 똑똑 떨어지는 콩나물시루 물소리가 멈출 때까지 내 눈물도 방울방울 베갯잇을 적시었었지. 어디 그뿐인가. 행랑을 쓰던 나는 밥상을 받을 때만 대청마루에 올라설 수 있었잖았나? 대청마루 위에 떡 버티고 있는 제국 시대에 받은 열녀상이 가문의 영광이라는 이름으로 내 발목을 붙잡아 놓은 누름돌이었다는 걸 자네는 모를 걸세. 자네도 눈치를 챘겠지만 얼굴도 가물가물한 남편 있는 저세상으로 가고 싶어 뒤꼍 감나무 가지를 몇 번이고 올려다보았었다네. 하지만 생떼 같은 첫아들을 형님 내외 자식으로 올려줌으로써 종부의 자리를 세워주고 가문의 대를 잇게 해준 자네 부부의 마음 때문에 자리를 지킬 수밖에 없었어. 자네를 땅에 묻던 날은 자네와 박자를 맞추던 다듬잇방망이 소리가 가슴속에서 멍이 들도록 울려대더군. 고맙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했던 내 마음을 지금이라도 알아주었으면 좋겠네그려. 호호, 자식 하나 두지 못한 내가 그래도 시동생과 동서 복이 있어 종손 자식도 얻고 권세도 그만큼 부렸으니 남자 못지않게 세상 살았다 자부하네.
안방 할머니신 친할머니는 내가 초등학생일 때 돌아가셨고 행랑을 쓰시던 큰할머니는 내가 중학생일 때 돌아가셨다. 허옇게 수염을 기르시고 평생 자린고비 영감으로 사신 할아버지는 내가 스무 살을 갓 넘긴 봄날에 여든여덟 해를 끝으로 세상을 뜨셨다. 결혼하고 한동안 전업주부로 집안 살림을 꾸려가던 나의 마음 한구석에는 두 할머니 중 어느 할머니가 더 행복하셨을까 하는 의문이 언제나 자리 잡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온통 여자들뿐인 직장에서 생활하며 크고 작은 갈등을 겪고 있다 보니 두 할머니의 행복 무게를 저울질하기보다는 집안을 탄탄하게 꾸려가신 할아버지의 판단과 리더십에 박수를 보내게 된다. 어쩌면 할아버지는 묵묵히 시계 밥을 주면서 당신의 각오를 다지지 않았을까. 아마도 지금쯤 할아버지는 저세상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계실 것만 같다.
내 할 일 다 하고 형님과 앉아 혼령끼리나마 장기 한판 둘 수 있으니 참 좋수. 내 우스운 얘기 좀 들어보려오? 전쟁이 나서 피난을 가는데 노망난 할머니를 어찌할 수가 없지 뭐요. 그래서 이불에 둘둘 만 노인을 커다란 장독에 넣어 지게에 지고 가지 않았겠소. 노망난 할머니도 돌아가시고 부모님도 모두 돌아가시고 집안의 어른이 되고 나니 어깨가 무겁더이다. 혼자 된 형수님에, 시샘 많은 안사람에, 먹이고 가르쳐야 할 자식들까지…. 부모님이 물려준 전답을 낭비할 수 없으니 밖에 나갔다 돌아오는 식솔들에게 검불 하나라도 들고 들어오라고 잔소리도 많이 했소. 동네 사람들이 나를 보고 자린고비 영감이라고 부르는 걸 내 모를 리 있었겠소? 집안 꾸리기에 여념이 없던 내게 그깟 별명이 대수였겠소? 내가 정신을 늦추고 흥청거려 자칫 잘못하면 집안이 풍비박산 날 지경이니. 내 바람이 무엇이었는지 아오? 내 자식 면서기 만드는 거였소. 다행히 종손인 첫아들이 아침마다 말끔히 차려입고 출근하는 군청 공무원이 되었으니 이만하면 형님께 치하받을 자신도 있소.
허허, 지내 놓고 보니 힘든 세월 살았소. 평생 외로우셨을 형수님을 형님과 합장해 모셔놓고 저는 마음고생 많았을 안사람 옆에 다리 펴고 누웠습니다. 느슨해진 시계에 밥을 주면서 내 정신 줄도 팽팽하게 조였지요. 내 생각을 알았는지 형수님과 안사람, 그리고 아이들이 두 개의 시곗바늘과 시계추가 되어 멋있는 시계를 만들어 준 것 같아 참으로 대견스럽기 그지없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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