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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은실 Mar 26. 2024

민들레 연가

시절 인연

  우리 동네는 아차산이 동그랗게 품어 안고 있는 조그만 마을이다. 그 산은 야트막한 높이라 누구나 부담 없이 오를 수 있다. 주말이면 사람들이 우리 집 앞을 지나 산을 오르내린다. 평소 등산을 좋아하지 않는 나는, 주말이면 새벽부터 유별나게 등산 장비를 챙겨 산을 오르는 사람들이 솔직히 부럽지는 않다. 그런데 남편은 부부가 손잡고 주말 등산을 즐기는 모습이 늘 부러웠었나 보다. 어린아이 달래듯 큰맘 먹고 남편과 함께 연휴 중 하루를 남들처럼 지내보기로 했다. 힘겨운 등산보다는 편안한 산책을 할 수 있는 코스로 생각해서 정한 곳이 말로만 듣던 충북 괴산에 있는 ‘산막이옛길’이었다.    

 

호수를 따라 조성된 둘레 길을 걸었다. 짙푸른 녹음의 싱싱함 사이로 간간이 지저귀는 산새 소리가 눈과 귀를 통해 가슴속으로 파고들었다. 숲속의 맑은 공기를 들이마시니 찌뿌듯했던 몸도 가벼워지고 나누는 이야기 소리마저도 사근거리는 나뭇잎 소리처럼 청아하게 들렸다. 얼마쯤 가다가 갑작스레 소나기를 만나게 되었지만, 온통 초록 세상이라 내리는 비도 초록색일 것 같아서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그러나 축축 늘어진 파마머리, 착 달라붙은 티셔츠…. 말 그대로 물에 빠진 생쥐 꼴이라 평생을 같이 산 남편에게 보이는 것마저 조금은 민망하게 느껴졌다. 이런 모습을 보여주었던 때가 또 있었을까.

비에 젖은 옷 때문에 멀리서 불어오는 산들바람에도 싸륵싸륵 한기가 몰려왔다. 뜬금없이 연애할 때 생각이 나서 빗방울 묻은 남편의 팔뚝에 멋쩍고도 수줍게 팔짱을 껴보았다. 빗물 묻은 미지근한 온기가 소름 돋은 내 팔뚝의 냉기를 조금은 가시게 해주는 듯했다.
 

추위도 내칠 겸 파전에 막걸리 한잔을 하기로 하고 평상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한 잔 시원하게 마신 남편이 행복한 미소를 얼굴 가득 머금고 이런 말을 한다.

“내 친구들도 나처럼 이렇게 행복하게 살까.”

이 말은 평소 말수가 적은 남편이 어쩌다 기분이 아주 좋을 때만 읊는 나름대로의 한 줄 시이다. 남들에게는 일상일 수 있는 휴일의 어떤 날, 비 맞은 생쥐 꼴이 되어 함께 산책한 오늘을 추억의 책장에 고이 담아놓겠다고 후한 점수를 준다. 평상 위에 쳐진 차양 막 위로 투두둑 떨어지는 빗소리가 남편의 한 줄 시와 함께 그럴싸한 오케스트라 연주가 되어 은은하게 흐른다.

초록이 지천인 산중 풀숲에 노란 민들레 한 송이가 피어있었다. 한적한 산길에 시절도 모르고 혼자 피어 산객을 맞이하고 있는 민들레가, 지천명의 나이에도 세상 물정 모르는 나를 보는 것 같아 친근했다.


민들레, 성격 한번 급한 놈이다. 자리다툼을 하지 않아도 되는 이른 봄에 남들보다 먼저 핀다. 아직은 꽃샘추위가 채 가시지 않아 까딱하다간 얼어 죽을 수도 있겠지만, 질긴 생명력을 가진 녀석은 제 몸을 오그려 에너지를 아껴둠으로써 절대 얼어 죽지는 않는다. 민들레는 겸손의 꽃이기도 하다. 목련꽃같이 자태가 도도하지도 않을뿐더러 피어나는 자리를 고르는 법도 없다. 후미진 구석이든 돌 틈 사이든 찻길이든 맘만 먹으면 아무 데고 꽃을 피워 올린다. 여러 개의 노란 꽃잎이 모여있어 민중의 아우성처럼 보이기도 한다. 흔해빠져 귀한 대접을 받지도 못할뿐더러 자기 자신을 지킬 가시 하나도 지니지 못했다. 영락없이 고집스럽고 무뚝뚝한 시골뜨기 모습이다.

민들레는 나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는 고마운 들꽃이다. 일찌감치 봄꽃으로 피어 봄날이 채 가기도 전에 씨앗을 만들고 긴 동면을 한다. 동그랗게 홀씨를 만들어 어디서 어떤 모습으로 만나게 될지 모른다는 막연한 기대와, 인생 그거 아무것도 아니라는 식의 허무를 동시에 알려주는 철학적인 꽃이 바로 민들레다. 비눗방울 같은 씨앗을 후 불면 하늘 높이 날아가 희망을 가르쳐 주기도 하고, 오랫동안 침묵하는 기다림을 가르쳐 주기도 한다. 가슴속에 품은 연정 하나로 한여름 장대비를 견디고 깊은 고독의 가을을 지내고 매서운 한겨울 추위를 버틴다. 그다음 해 봄바람이 불 때까지 연정 주머니 씨앗을 가슴속에 꼭꼭 간직하면서 말라가는 숨줄을 움켜쥐고 우직하게 때를 기다리는 지고지순한 순정파 녀석이다.     

우리가 억겁의 시간이 흐른 뒤 저 노란 민들레 되어 다시 만날 수 있을까. 다시 만나 오늘처럼 빗속을 뚫고 파전에 막걸리 한잔을 할 수 있을까. 모진 소낙비와 한겨울 추위를 견디고 척박한 땅에서 꽃을 피우는 민들레 씨앗처럼, 아슴한 다음 생 어느 날에 지금 모습 그대로 촌스럽게 해후할 수 있을까. 하지만 그대여, 우리 새끼손가락을 걸진 말자. 얼어붙은 땅속 깊은 곳의 씨앗이 따사로운 햇살과 고운 바람의 때를 만나 꽃을 피우듯, 우리의 만남도 시절 인연에 가만히 맡겨두기로 하자.

그렇게 우리 두 사람은 이런 이야기를 나누며 늦깎이 노란 민들레가 핀 산길을 느릿느릿 팔짱을 끼고 내려왔다. 비 갠 서쪽 하늘에서는 아슴한 어떤 날 만나게 될지 모를 인연의 꼬리처럼, 이른 저녁 누런 노을이 행복 뭉치로 뭉실뭉실 번져 오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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