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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재효 Sep 12. 2023

녹족부인






(7) 녹족부인, 우중문을 만나다






“어서 오시오. 통역사 진진(秦眞)이라 합니다. 나는 평양을 수백 번도 더 다녀온 사람입니다. 이제부터 그대들을 자랑스러운 별동대 총사령관이신 우중문 대장군에게 안내하겠습니다. 미안하지만, 대장군님을 만나기 전에 간단한 몸수색을 하겠습니다.”


통역사라는 자는 유창한 고구려 말을 구사하였다. 병사들이 달려들어 웅록 일행의 몸수색을 하려고 했다. 웅록은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수나라 병사들이 몸수색하다가 웅록이 여자라는 게 밝혀지면 곤란한 일이 벌어질 것만 같았다.


“이보시오, 진진 통역사. 우리는 좋은 일로 우중문 장군을 만나러 온 고구려 전령이오. 그런데 이렇게 대접을 하면 되겠소이까? 너무 무례하오. 우린 그냥 돌아가겠소이다. 보시다시피 우리는 병장기를 가지고 있지 않소이다. 자, 보시오.”


웅록이 소리치자, 진진 통역사가 놀라서 웅록에게 다가왔다.


“알겠소이다. 미안하게 되었소이다. 몸수색은 높은 분을 만나기 전에 하는 의례적인 것이니 크게 신경 쓰지 마시오. 내가 봐도 그대들은 분명히 고구려 전령이 맞소이다. 자자, 얼른 안으로 들어가 우중문 대장군을 알현합시다. 이 사람 진진 통역사를 따라 들어오시오.”


진진 통역사가 앞장서서 커다란 막사 안으로 들었다. 웅록 일행이 막사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깜짝 놀랐다. 대형 막사 안에 고구려 복색의 아리따운 여인 두 명이 뚱뚱해 보이는 한 사내를 가운데 놓고 술 시중을 들고 있고, 막사 가운데에서는 역시 고구려 복색의 무희(舞姬) 서너 명이 풍악 소리에 맞춰 춤을 추고 있었다.


사내는 아직 해가 중천에 오르기 전인데 이미 대취한 듯 얼굴이 불콰해 보였다. 진진이 가운데 앉아 있는 사내에게 다가가더니 귓속말로 속살거렸다. 두 사내가 소곤대는 와중에도 앉아 있는 뚱뚱한 사내는 웅록 일행을 응시했다.


“하오. 흔하오.”


가운데 앉아 있던 사내가 벌떡 일어나더니 웅록 일행을 보고 미소를 지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그이 키는 8척은 되어 보였고 황금색 비단옷을 입고 있는데, 겉모습을 봐서는 전장에 나온 군인 같지 않았다.


기름이 번들거리는 얼굴은 보통사람 두 배나 되어 보이고 배는 남산만했다. 그러나 눈빛만은 살아서 반짝거렸다. 진진이 웅록 일행에게 다가왔다.


“어서, 우중문 대장군님에게 허리 굽혀 인사를 올리시오.”


웅록 일행이 예의를 갖춰 우중문에게 절을 하였다. 웅록 일행의 절을 받은 우중문이 웅록에게 다가왔다. 그가 뭐라고 말을 하는데 웅록은 그의 말을 전혀 알아들을 수 없었다. 웅록이 진진을 바라보았다.


“장군께서 그대들을 환영한다고 하십니다.”

진진이 웅록 일행에게 우중문의 말을 통역했다.


“이것은 을지문덕 장군께서 우중문 장군께 전하는 서신입니다.”


웅록이 서신을 품에서 꺼내 우중문에게 건네자 진진이 웅록의 말을 통역하였다. 우중문은 웅록이 건넨 서신을 받아들고 다시 탁자에 앉더니 그 서신을 유심히 읽어내렸다.


서신을 읽는 우중문의 얼굴이 차차 밝아지면서 빙그레 웃었다. 마치 전장에 나간 자식에게서 온 편지를 읽는 아버지의 모습이었다. 웅록은 우중문의 표정과 행동을 빠트리지 않고 살폈다. 그는 을지문덕이 보낸 서신을 보고 만족한 듯 했다.


“나는 을지문덕 장군을 기꺼이 맞이하여 환대할 것이다. 내일 정오쯤에 온다니 참으로 어려운 결단을 내렸구나. 참모는 제장(諸將)들에게 전하라. 압록수를 넘으려는 계획을 잠시 보류하라고. 내일 고구려의 을지문덕 장군이 나를 만나러 온다니 맛있는 음식과 술 그리고 고구려에서 맛볼 수 없는 산해진미를 풍족하게 준비하고 막사 주변도 깨끗하게 청소하라. 을지문덕 장군에게 책잡힐 일이 한가지라도 있으면 절대 안 된다. 그리고 압록수를 건너오느라 고생한 저기 있는 웅록 전령 일행을 후하게 대접해서 보내라.”


우중문의 명령에 따라 웅록 일행은 중간 정도 크기의 막사로 안내되었다. 막사 안으로 들어서자 내부는 아늑한 분위기였다. 마치 연인들이 사용하는 규방처럼 아기자기하게 꾸며져 있었다. 가운데 둥근 탁자와 의자가 있고 뒤로 수나라풍의 대형 걸개그림이 빙 둘러쳐져 있는데 마치 최고급 기루(妓樓)를 통째로 옮겨다 놓은 듯 했다.


 아무래도 방금 본 고구려 춤을 추는 무희들이 사용하는 막사 같았다. 잠시 후에 병사들이 수나라 요리와 술 그리고 처음 보는 과일을 잔뜩 가져와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우중문 장군께서 그대들에게 배불리 먹여 보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음 푹 놓고 많이 드시기 바랍니다. 여기는 외부 인사들이 오면 접대하는 곳이니 아무 신경 쓰지 마시오.”

진진 통역사가 크게 인심을 쓰듯 호탕하게 웃으며 말했다.


‘병영에 들어오면서 본 병사들은 모두 피골(皮骨)이 상접해 있는데. 우리에게 이런 호사를 부리다니, 우중문이 허세를 부리는구나. 좋다. 많이 먹어주마.’

웅록은 이미 우중문이 잔꾀를 부리고 있다는 것을 간파했다.


“고맙습니다. 우중문 장군께서 이리도 우리를 환대해 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과연 대국의 장수님은 다르십니다. 잘 먹겠습니다. 우중문 대장군께 고맙다고 전해주시오.”


“그럼요. 우중문 대장군은 대인입니다.”

웅록의 말에 진진이 거드름을 피우며 수염을 쓰다듬었다.


“진진 통역사님, 이건 제 개인적인 부탁인데 들어주실 수 있겠습니까?”

웅록이 주변을 한번 살피며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웅록은 진진은 야살스럽게 생긴 자가 아니라고 판단했다. 웅록은 적군의 진영에 들어와 진진 말고는 대화할 사람이 없었다. 웅록은 진진을 최대한 활용하기로 했다.


“좋습니다. 말해보시오.”


“이 병영에 녹족(鹿足) 삼 형제가 있다고 들었습니다. 녹족 삼 형제의 용맹과 기개는 우리 고구려 군사들에게도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수많은 고구려 군사들이 수나라의 녹족 삼 형제를 흠모하고 있습니다. 나 역시 그분들을 흠모하는 사람 중 한 명입니다. 하여, 내가 개인적으로 녹족 삼 형제를 만나 보고 싶습니다. 잠깐 얼굴이라도 한번 볼 수 있게 해주십시오. 진진 통역사님, 이 사람의 작은 소망을 뿌리치지 마시기 바랍니다.”

웅록의 말에 진진은 기분이 좋아져 입이 헤벌레 벌어졌다.


“녹족 삼 형제가 고구려 군사들에게도 이름이 알려졌다니 내가 다 기분이 좋습니다. 그러나 우중문 대장군 휘하에는 녹족 삼 형제 중 번삼록, 번구록 두 분만 있고, 한 분은 우문술 장군 휘하에 좌장으로 있답니다. 그런데 두 분이 지금 어디 있는지 찾아봐야 합니다. 두 분이 멀리 정찰을 나갔거나 낮잠을 주무시면 못 만날 수도 있습니다. 크게 기대는 하지 마시오.”


진진은 또 거드름을 피우며 웅록의 부탁을 들어줄 듯 말 듯한 태도를 보였다. 웅록은 오늘 녹족 삼 형제를 꼭 만나야 한다는 의무감 같은 것이 아침부터 머릿속에 꽉 차 있었다. 그것은 그 어떤 임무보다 중요하고 하늘이 내린 지상최대의 명령과도 같은 것이었다.


 웅록은 무슨 일이 있어도 녹족 삼 형제를 만나야 한다고 결심했다. 그녀는 무슨 일이든 결심한 바는 꼭 이행해야 직성이 풀렸다. 진진은 녹족 삼 형제를 소개해 주는 대가를 은연중에 원하는 것 같았다.


“진진 통역사님, 내가 직접 두 분을 만나서 이야기를 나눠보고 돌아가서 고구려 병사들에게도 자랑하고 싶어서 그럽니다. 부탁이오. 내가 흠모하는 용맹한 녹족 삼 형제를 만나게 해주시오. 힘들다면 한 분만이라도 좋습니다.”

웅록이 얼른 품에서 은자(銀子) 한 개를 꺼내 진진에게 건넸다.


“험-, 험-. 이러면 안 되는데……. 조, 좋소이다. 그대가 녹족 삼 형제분을 만나는 게 그리 소원이라면 내가 알아보리다. 다행히 두 분이 영내에 있으면 내가 모시고 오지요. 안 계셔도 크게 실망은 하지 마시오.”


진진이 밖으로 나가자 웅록 일행은 음식을 들었다. 웅록은 술은 마시지 않고 고기와 과일을 맛보았다. 과일은 고구려에서 볼 수 없는 남국에서 생산되는 귀한 과일이었다. 웅록은 아침 일찍 압록수를 건너느라 아침 식사도 하지 못한 상태였다.


웅록과 함께 온 두 전사가 음식을 배불리 먹고 났을 때였다. 진진의 헛기침 소리가 들리더니 그가 두 사내를 데리고 막사 안으로 들어왔다. 진진이 데리고 온 사내들은 삼록과 구록이었다. 형제의 키는 9척에 얼굴은 귀공자풍으로 생겼으며, 투구와 갑옷을 입은 자태는 하늘에서 내려온 신장(神將)의 모습이었다. 두 형제는 웅록 일행을 보자 열없는 표정을 지었다.


웅록은 헌거롭게 생긴 형제를 보자 속으로 감탄하였고, 이상하게 가슴이 울렁거리면서 달뜨기 시작했다. 마치, 먼데 행상 나갔다 돌아온 지아비를 만나는 기분이었다. 삼록과 구록은 멀거니 서서 웅록 일행을 바라만 볼 뿐이었다. 형제는 진진이 찾아와 고구려에서 온 전령이 자신들을 보고 싶어 한다는 말에 웅록에 대하여 이런저런 한 사항을 물어보았다.


 고구려의 전령 이름 뒷자가 자신들과 같은 사슴 록(鹿)자를 쓴다는 데에 형제는 일단 호기심이 일었다. 형제는 항상 가슴 속에 고구려라는 나라 이름을 품고 있으면서 하루도 그 거룩한 국명(國名)을 잊은 적이 없었다.


“자네들, 잠시 자리 좀 내주시게. 나는 이 두 분과 할 이야기가 있네. 한 식경 정도면 되네.”웅록의 말에 함께 온 일행과 진진이 막사 밖으로 나갔다. 웅록은 삼록과 구록의 얼굴을 다시 한번 유심히 살펴보았다. 잠시 무언의 대화가 오고 갔다. 웅록은 다가가 형제의 손을 만져보고 얼굴도 만져보았다.


그녀의 이상한 행동에도 두 형제는 가만히 있었다. 그러나 웅록은 아직 녹족 형제가 자신과 인연이 있다고 확신할 수 없었다. 웅록은 자칫 자신의 언행으로 두 형제가 그냥 돌아갈까 봐 가슴을 졸였다. 그녀는 한없이 자비로운 시선과 부드러운 얼굴로 형제를 대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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