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을지문덕, 계략을 세우다
을지문덕은 수군 별동대의 이동 경로와 진영 배치를 그린 지도를 펼쳐놓고 웅록과 세밀한 작전을 짜기로 했다. 지도 위에 나타난 양군의 대치상황으로 볼 때 고구려군은 압록수 남동쪽으로 이십 리쯤에 군영(軍營)을 갖추고 있고, 수나라 군영은 압록수에서 북서쪽으로 30여 리 떨어져 진을 치고 있었다.
얼핏 지도에 그려진 양군의 배치도를 볼 때 고구려군은 수나라 군대를 이길 수 없을 것만 같았다. 30만 5천 명의 수나라 별동대를 5만이 채 안 되는 고구려 정예병으로 대적하기에는 무리였다.
“장군님, 우중문의 군영에 홀로 가신다니 소관이 가만히 있을 수가 없습니다. 하여, 압록수에 중선(中船) 한 척을 띄워 장군님께서 우중문의 진영에 가시는 데 어려움이 없도록 지원하고 싶습니다. 고구려의 전군을 지휘하시는 장군께서 말도 없이 걸어서 가실 수는 없습니다.
며칠 전 장마가 끝나 압록수의 물도 조용하게 흐르고 있습니다. 제가 단신으로 먼저 수나라 진영에 가서 장군의 방문을 알리겠습니다.”
을지문덕은 자진해서 전령이 되겠다는 웅록의 제안을 받고 고심하다가 승낙했다.
“고맙네. 그리하시게. 혼자 가면 위험하니 날랜 군사 두 명과 동행하시게. 내가 우중문에게 보내는 서신을 써주겠네. 몸조심해야 하네. 그리고 듣자 하니 웅부관은 조의선인으로 훈련을 받을 때부터 동료들과 방을 같이 쓰지 않는다고 하는데, 군영에는 막사가 부족하네.
웅부관이 무슨 사정이 있는지는 모르지만, 사람마다 자라온 환경이 다르고 습관이 다양하니 내가 이해는 하네. 급할 때는 급한 대로 환경에 적응하는 것도 군대를 지휘하는 군관으로서 덕목이 될 수도 있네.”
“참고하겠습니다.”
두 사람은 늦은 밤까지 함께하며 작전을 구상하였다. 먼저 을지문덕이 우중문의 군영을 찾아가는 방법, 우중문에게 말할 내용, 우중문 군영에서 살펴볼 시설이나 병마(兵馬), 적의 진영에서 무사히 빠져나오는 방법 등을 논의했다.
을지문덕이 사전에 전령을 우중문 진영에 보내 ‘고구려 장수 을지문덕이 방문하겠다’는 내용을 전달하는 것으로 두 사람이 의견의 일치를 보았다.
그다음에는 을지문덕이 직접 별동대 진영으로 건너가 우중문을 만나는 문제에 대해서도 머리를 맞댔다. 만약 우중문이 을지문덕을 억류할 경우 문제는 복잡해질 수 있으므로 적진을 빠져나오는 방법에 대해 여러 가지 대안을 두고 논의했다.
을지문덕이 제안하고 웅록이 세밀하게 살펴본 다음 보완하는 것으로 대략적인 작전 방안이 마련되었다. 밤이 깊어지자 웅록은 별도로 마련된 자신만 사용하는 막사로 돌아갔다.
“형님을 뵙습니다.”
우중문의 진영에 배속되어 좌우 공격대장으로 활약하던 삼록(三鹿)과 구록(九鹿)이 잠시 한가한 틈을 이용해 맏형인 일록(一鹿)의 막사를 찾았다.
서로 모시는 상관이 다르므로 녹족 삼 형제는 자주 얼굴을 볼 수 없었다. 긴 장마로 수나라 병사와 고구려 군사들은 휴전을 하고 있는 상태였다.
“아우들아, 그동안 잘 지냈느냐?”
“형님, 저는 고구려 평양으로 진격하는 이 전쟁이 썩 마음에 내키지 않습니다. 우리의 조국이 고구려 아닙니까? 그렇다고 우중문 장군의 명령을 거역할 수도 없으니 어쩌면 좋습니까?”
구록이 일록을 보자 불평을 토로했다.
“형님, 저의 심사도 편치 않습니다. 차라리 구록이 하고 탈영하여 고구려로 도망칠 생각도 해봤습니다. 그러나 우리 두 형제가 탈영하게 되면 형님에게 위해가 미칠까 두려워 주저하고 있습니다.”
구록과 삼록이 맏형 일록에게 자신들의 괴로운 심정을 하소연했다. 형제 사이이니 그러한 말이 가능했다. 다른 병사나 군관이 그러한 말을 들었을 때 삼 형제는 참수형(斬首刑)을 받을 것이었다. 두 아우가 만나자마자 속내를 토로하자 일록은 속이 쓰렸다.
“아우들아, 우리가 우리를 낳고 길러준 조국 고구려를 쳐들어간다는 게 말이 안 된다. 그렇지만 현재 우리 삼 형제의 상황이 탈영할 시기가 아니다. 나 역시 아우들과 같은 심정이다. 우선은 아우들은 우중문 대장군의 명령이라면 죽는시늉이라도 할 것처럼 잘 보여야 한다. 우문술 대장군은 중요한 사안이나 작전 회의가 있을 때마다 나의 의견을 물어보고 작전에 반영한단다.
우리가 수나라의 고급 장교가 되어 조국을 쳐들어간다는 일은 있을 수 없다.
기회를 보자. 지금 압록수 건너에는 고구려의 영웅 을지문덕 장군이 진을 치고 있다. 이제 압록수의 수위(水位)도 차츰 낮아지니 곧 강을 건너라는 명령이 떨어질 것이다. 우리 삼 형제는 별동대에서 용맹하기로 소문이 나 있다.
모르긴 해도 고구려 진영에서도 우리 삼 형제의 존재를 인지하였을 것이다. 아버님과 어머님이 우리 삼 형제가 수나라 군대의 좌장과 돌격대장이 되어 고구려를 쳐들어간다는 사실을 아시면 얼마나 가슴 아파하실까?”
일록이 부모님 이야기를 꺼내자 녹족 삼 형제는 잠시 숙연해졌다. 삼 형제는 지난 20년 동안 한 번도 고구려와 부모를 잊은 적이 없었다. 아홉 형제의 맏이로서 일록은 많은 상처를 입었다.
해적들에게 잡혀 와 배에 감금된 동안 이록, 사록, 오록, 칠록이 병에 걸려 죽었을 때 나머지 형제들은 절망과 함께 큰 상처를 입었다. 또한, 장안의 인간 시장에서 육록과 팔록이 페르시아 노예상에게 팔려 갈 때도 세 형제는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입었고, 그 상처는 멍에가 되어 가슴 속 깊이 응어리로 남아있었다.
“형님, 페르시아 상인에게 팔려간 육록 형님과 팔록 형님이 보고 싶어요. 요즘 들어서 부쩍 우리와 함께하지 못하는 형제들이 그립습니다. 우리 아홉 형제는 수나라 해적에 의해 이렇게 되었습니다. 사실 우리가 싸워야 할 상대는 조국 고구려가 아닌 수나라입니다. 당장 장군 막사로 달려가 우중문과 우문술의 목을 베어 고구려로 탈출하고 싶습니다만, 상황이 좋지 않아 참고 있을 뿐입니다. 언젠가 우리 삼 형제는 두 장수의 목을 취해 고구려에 바쳐야 합니다.”
“쉿-, 지금은 침착해야 한다. 경거망동하다가는 우리 삼 형제는 살아남지 못한다. 당장은 절대로 우문술과 우중문에게 복종해야 한다. 반드시 우리 형제에게 기회가 있을 것이다. 희망을 잃지 말고 괴롭더라도 참고 기다려 보자.”
압록수의 강물이 거의 장마 이전의 수준에 가까웠다. 탕탕 굽이치던 물결이 잔잔해지면서 수나라와 고구려 진영에 암운이 끼기 시작했다. 을지문덕은 아침 일찍 웅록에게 우중문에게 보내는 서신을 건넸다. 날씨가 청명했다.
웅록은 무예에 능하고 몸이 날랜 병사 두 명과 함께 쪽배를 타고 압록수를 건넜다. 배가 압록수를 다 건널 때까지 을지문덕은 물끄러미 웅록 일행을 바라보았다. 을지문덕이 들려준 ‘녹족 삼 형제’에 대한 이야기는 웅록을 괴롭혔다. 그녀는 밤새 한숨도 잠을 이룰 수 없었다. 그녀는 버선 아홉 켤레를 만들어 보관하고 있었다.
웅록이 언젠가 꿈속에서 아홉 아들을 만났는데 모두 맨발이었다. 그녀는 그 꿈을 어쩌면 머지않아 아들들을 만나게 될 예지몽(豫知夢)이라고 생각했다. 웅록은 이상한 예감이 들어 우중문의 진영으로 가면서 버선을 모두 가져갔다. 압록수를 건넌 웅록 일행은 30여 리 길을 걸어가야 했다.
아침부터 내리쬐는 따가운 햇빛에 일행은 금방 땀으로 범벅이 되었다. 그들이 한 어촌 마을을 지날 때쯤 주인 없는 노새와 당나귀들이 나무 그늘에 앉아 있었다. 웅록 일행은 얼른 당나귀 한 마리씩 잡아타고 서쪽으로 내달렸다. 맨 앞장선 웅록이 하얀 깃발을 들고 있었다.
행여나 길가 수풀 속에 매복하고 있을지 모를 수나라 군사들에게 싸울 의사가 없음을 알려야 했다. 세 사람이 뽀얀 흙먼지를 날리며 달렸다. 그러나 당나귀는 말처럼 빠른 속도를 내지 못했다. 그들이 시오리쯤 갔을 때였다. 한 떼의 군사들이 풀숲에서 뛰쳐나와 길을 가로막았다. 창칼을 든 병사가 열 명, 활을 메고 말을 탄 병사가 한 명이었다.
“*징쉐이. 니먼쉬세이?”
“징쉐이. 니먼쉬세이?”
그들은 수나라 군사들이었다. 수나라 말을 모르는 웅록 일행 중 한 명이 수나라 발음으로 ‘까오리쉬찬(高丽使臣)’을 연발하자, 그제야 수나라 병사들은 웅록이 들고 있는 흰색 깃발을 보고 고구려 진영에서 보낸 전령임을 알았다.
수나라 병사들은 잠시 자기들끼리 이야기를 주고받더니 말 탄 병사가 웅록 일행을 안내하여 서쪽으로 이십여 리를 더 달렸다. 드디어 웅록 일행은 수나라 별동대가 설치한 진영에 도착하였다. 진영 입구에는 20여 명의 수나라 병사들이 장창을 들고 경계로 서고 있는데 하나 같이 얼굴이 하얗게 떠 있어 마치 병자들 같았다. 웅록 일행은 수나라 진영의 외곽 상태를 세밀하게 살폈다.
병영은 목책(木柵)을 드문드문 둘러쳐서 사이 사이에 병사 한두 명이 경계를 보고 있는데 대개는 목책 곁에 붙어 서서 졸거나 잡담을 하고 있었다. 병영 입구를 담당하는 군관인 듯한 자가 웅록 일행에게 가까이 다가오더니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지껄여 댔다. 웅록은 품 안에서 을지문덕이 건넨 서신을 군관에게 보여주었다. 그는 그 신신 봉투를 유심히 보더니 고개를 끄덕거렸다.
* 징쉬이, 니먼쉬세이 – 정지, 너희들은 누구냐?(停止, 你们是谁?)
“통궈(通過)”
군영 통과 명령이 떨어지면서 완전무장한 다른 수나라 병사들이 웅록 일행에게 달라붙어 병영 안으로 안내하였다. 수나라 병영은 조용했다. 웅록 일행은 두 눈을 부릅뜨고 진영을 두루 살폈다. 드물게 병사들이 모여서 잡담을 나누거나 병장기를 수리하는 모습이 보였다.
또한, 전마(戰馬)의 등을 쇠갈퀴로 긁어대는 병사, 군복을 빨랫줄에 너는 병사. 무엇을 잘못했는지 상관에게 몽둥이로 매를 맞는 병사, 막사 밖에서 엉덩이가 다 보일 정도로 바지를 내리고 이를 잡는 병사, 막사 사이에서 발가벗은 상태로 물을 뿌려가며 몸을 닦는 병사, 솥을 걸어 놓고 밥을 하는 병사 등 다양한 별동대 병영의 모습이 웅록의 눈에는 신기하게 보였다.
그런데 가만히 보니 수나라 병사들의 몸이 거의 바싹 마른 상태였다. 홑겹의 여름옷을 입은 병사들이 마치 허수아비 같았다. 얼굴에 핏기도 없고, 얼이 빠진 상태여서 발로 툭 차면 쓰러질 것만 같았다. 웅록 일행이 일반 막사보다 서너 배는 커 보이는 막사 앞에 도착하자 미리 연락을 받았는지, 한 사내가 밖으로 나오며 일행을 맞이했다.
막사는 창칼을 든 젊은 병사들이 이중으로 경계를 보고 있는데, 모두 피로에 지쳐 있는 모습이었다. 어디서 나는지 모르지만, 귀에 익은 풍악 소리가 들렸다. 웅록이 그 소리를 가만히 들어보았다. 고구려 음악이 분명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