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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재효 Nov 06. 2023

녹족부인




(8) 발가락이 닮았다









‘아아-, 이럴 수가. 이 아이들은 내가 낳은 자식들이 틀림없다. 이십 년이 아니라 백 년의 세월이 흘러도 나는 내 몸에서 나온 자식들을 알아볼 수 있다. 그러나 어떻게 내가 이 아이들의 어미라고 증명을 해야 하나? 그렇지. 내가 버선을 가져 왔지.’



웅록의 양 눈에는 벌써 눈물이 그렁그렁하였다. 웅록의 행동에 형제는 마치 최면에 걸린 것처럼 꼼짝도 하지 못하고 서 있기만 했다.



형제는 웅록의 행동을 유심히 보면서 뇌리에 무의식으로 잠자고 있는 아릿한 기억을 반추하는 중이었다. 웅록이 얼른 투구와 갑옷을 벗고 머리를 풀어헤쳤다. 그리고 군화를 벗고 버선을 벗었다. 웅록의 사슴 발이 드러났다.



순간, 형제는 벼락을 맞은 것처럼 전율하면서 심장이 빠르게 고동치는 것을 느껴야 했다. 형제는 여태껏 자신들과 같은 발을 가진 사람을 본 적이 없었다. 그들은 웅록과 뗄 수 없는 인연이 있음을 감지하면서 심경의 변화를 일으켰다. 그러나 아직은 앞에 있는 여인이 자신의 생모라는 확신을 하기에는 무리였다. 세상에는 자신들 이외에도 사슴 발을 가진 사람이 더 있을 것 같기 때문이었다.



“나는 고구려 여인으로 이름은 녹족부인이라 불립니다. 이렇게 남장(男裝)하고 고구려군에 입대하여 이십 년 전 수나라 해적에게 빼앗긴 아홉 명의 자식을 찾아 헤매고 있습니다. 내 아들의 이름은 일록, 이록, 삼록, 사록, 오록, 육록, 칠록, 팔록, 구록이입니다. 수나라 군영에 녹족 삼 형제가 있다는 소문을 듣고 행여나 하는 마음에 만나고 싶었답니다.



그러던 차에 오늘 을지문덕 장군의 서신을 가지고 우중문 장군을 만나러 왔답니다. 다시 고구려군 진영으로 가야 하는데, 우중문 장군께서 후하게 대접을 해주시는 바람에 잠시 휴식을 취하고 있습니다. 혹시, 두 분께서 나와 인연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이 버선은 이십 년 전 잃어버린 나의 자식들을 만나면 줄려고 만든 버선이랍니다.



나의 큰아들 일록이 등에는 점이 일곱 개 있고, 이록이 왼쪽 발등에는 어려서 뱀에 물린 흉터가 있으며, 삼록이 왼쪽 겨드랑이에는 푸른 점 세 개가 있고, 사록이 왼쪽 뺨에는 붉은 점이 하나가 있으며, 오록이 오른쪽 엉덩이에는 두 살 때 불장난하다 데인 흉터가 있고, 육록이 목덜미에는 사마귀 두 개가 있답니다.



그리고 칠록이 배꼽 위에 밤톨만 한 붉은 점 하나가 있고, 팔록이 오른팔에는 세 살 때 도랑을 건너다 넘어지는 바람에 살갗이 찢어져 의원이 꿰맨 자국이 있으며, 막내 구록이 등에는 어른 손바닥만 한 검은 반점이 있습니다.”



‘아아, 어떻게 고구려군 전령으로 온 여인이 우리 아홉 형제의 몸 구석구석을 손금보듯 훤히 알고 있단 말인가? 천지신명도 모르고 귀신조차도 모르는 것을 이분은 모두 알고 있다. 이분은 틀림없는 나의 어머니이시다.’



형제는 웅록의 말에 반쯤 정신이 나가 있었다. 말을 마친 웅록이 두 사내가 반응이 없자 가져온 버선 아홉 켤레를 형제에게 내보였다. 삼록이 고구려 여인이 버선을 아홉 개씩이나 가져 왔다는 말에 무엇인가 집히는 게 있는지 얼른 군화를 벗고 시커먼 버선도 벗었다.



그의 발도 웅록의 발과 똑같았다. 삼록이 자신의 발을 웅록의 발 옆에 대고 자세히 살폈다. 그리고 잠시도 주저함이 없이 웅록이 가져온 버선을 신어보았다. 웅록도 버선을 다시 신었다. 버선을 신은 두 사람의 발 모양이 똑같았다. 삼록이 신은 버선의 치수와 웅록의 발 크기와 똑같았다.



그 모습을 말없이 바라보던 구록이 군화를 벗고 버선을 신었다. 세 명이 모두 똑같은 버선을 신고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삼록과 구록의 눈에도 어느덧 눈물이 갈쌍갈쌍했다. 형제의 뇌리에는 동시에 사슴 발, 고구려, 20년 전, 아홉 형제, 아홉 켤레의 버선, 태어나면서부터 쓰고 있는 아홉 형제의 이름과 몸에 있는 특징 등이 혼재되면서 웅록이 자신들의 생모라는 것을 확신하였다.



“어머니, 소자(小子) 삼록이 입니다. 이십 년 전 수나라 해적들에게 끌려간 셋째아들 삼록이 입니다. 여기를 보세요. 저의 왼쪽 겨드랑이에는 푸른 점 세 개가 있습니다. 몰라 봬서 죄송합니다.”



삼록이 얼른 바닥에 엎드려 웅록에게 고개를 숙였다.



“어머니, 소자 막내 구록이 입니다. 여기를 보세요. 저의 등에 어른 손바닥만 한 검은 반점이 있습니다. 어머니를 몰라봬서 죄송합니다. 저희 형제의 절을 받으십시오.”



삼록과 구록이 웅록에게 수도 없이 절을 하면서도 고구려 말로 울먹였다. 더 이상의 말이 필요 없었다. 어머니와 아들들이 20년 만에 아주 낯선 곳에서 상봉하는 순간이었다. 웅록은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을 닦아내느라 정신이 없었다. 이곳이 수나라 군영이 아니라면 두 아들을 붙잡고 대성통곡이라고 하고 싶었다.



세 사람은 한참 동안 서로를 부둥켜안고 흐느끼며 떨어질 줄 몰랐다. 하고 싶은 말은 많지만, 지금은 수나라 우중문의 군영 막사 안이었다



웅록은 마음을 진정하고 두 아들과 대화를 나누어야 했다. 삼록과 구록이 지난 20년 동안 겪은 과정을 이야기하자 웅록은 쉴 새 없이 흘러나오는 눈물을 닦아야 했다. 시간이 없었다. 모자 상봉의 기쁨은 나중에 얼마든지 나눌 수 있는 일이었다. 웅록은 두 아들에게 고구려가 현재 처한 상황을 빨리 알게 하는 게 급선무였다. 그러나 만나자마자 그러한 이야기를 하면 분위기가 이상하게 변할 것만 같았다.



“삼록아. 구록아, 너희 형제들이 고맙게도 아버지가 지어주신 이름을 쓰고 있구나. 고맙다. 진정하고 이제부터 이 어미가 하는 이야기를 잘 새겨들어야 한다. 그래야 우리 모자가 다시 만날 수 있다.”



“어머니, 말씀하세요.”



웅록은 두 아들에게 가족관계와 조국 고구려의 상황 그리고 부모와 자식 간의 지켜야 도리 등에 관하여 이야기하였다. 황금 같은 시간이 빠르게 흐르고 있었다. 특히, 웅록은 고구려의 상황이 아주 좋지 않으니 형제가 어떻게 해야 조국을 위험으로부터 구할 수 있는지에 대하여 자세히 알려주었다.



웅록과 형제는 통역사 진진이나 함께 온 동료들이 막사 안으로 들어올까 봐 걱정되어 다시 옷매무새를 고치고 본래의 상태로 돌아갔다. 만약 진진이나 함께 온 두 동료가 웅록이 여인이며, 삼록과 구록의 친모(親母)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 세 사람의 운명은 나락으로 떨어질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또한, 고구려 군영에서 웅록이 자랑스러운 고구려의 조의선인 출신이라고 알고 있던 것이 한순간에 깨져버릴 수도 있었다. 두 아들과 이야기를 마무리할 즈음에 진진이 기침을 하며 막사 안으로 들어왔다.



“세분이 좋은 말씀을 나누셨는지요?”



“진진, 자네 덕분에 나는 오늘 태어나서 처음으로 큰 기쁨을 느낄 수 있었네. 우리 형제의 이름이 고구려 진영에까지 알려질 줄 몰랐네. 참으로 고마워. 자네의 수고를 두고두고 잊지 않겠네.”



삼록이 진진에게 고마움을 전했다.



“장군님들께서 기분이 좋으셨다니 소인도 괜히 기분이 좋습니다. 부디, 고구려를 정벌하는 데 큰 공을 세우셔서 황제 폐하께 상을 받으셔야지요. 앞으로 이 진진이를 잘 부탁드립니다.”



진진이 두 손을 비벼대면 아양을 떨어댔다.



“걱정하지 마시게. 고구려에서 온 전령께서 무사히 돌아가시도록 잘 부탁하네. 우리 수나라 같은 대국은 적국의 사신이나 전령을 잘 모셔야 하네.”



구록이 진진에게 부탁하는 어조로 말했다.



“두 분 장군님, 저처럼 하찮은 사람을 만나주시어 정말 고맙습니다. 오늘 두 분 장군님을 뵈니, 소관이 듣던 바보다 더 용맹하게 보입니다. 마치 두 마리 맹호(猛虎)를 본듯한 착각에 빠졌답니다. 소관이 기회가 된다면 다시 한번 고구려의 전령으로 오겠습니다. 그때도 소관을 뿌리치지 마세요. 오늘 정말 감사했습니다.”



웅록이 두 아들에게 고개를 숙였다.



“반드시 그리하셔야지요. 웅록 전령님을 꼭 다시 뵙기를 희망합니다. 그럼, 무사히 돌아가시길 빌겠습니다.”



삼록과 구록이 웅록에게 목례를 하고 막사를 나가려다 다시 들어왔다.



“이것은 저희 형제의 선물입니다.”



삼록이 단도(短刀)를 웅록에게 건넸고. 구록은 옥패(玉牌)를 건넸다. 옥패는 수나라 황제가 장군들에게 하사한 것으로 전시(戰時)에 옥패만 있으면 말이나 병사를 징집할 수 있고, 어떤 지역이든 검문을 거치지 않고 통과할 수 있는 위력을 지닌 것이었다. 그리고 삼록이 건넨 단검은 손잡이가 상아로 되어있고 칼집 역시 상아와 보석으로 치장된 화려한 보검이었다. 보검의 값이 상당할 것 같았다.



“장군님들, 고맙습니다. 두 분께서 주신 선물은 가보로 대대손손 보관하며 장군님들을 생각하겠습니다. 부디, 몸조심하시고 다시 뵙기를 바랍니다.”



인사를 하는 웅록의 눈에 또 눈물이 갈쌍갈쌍했다.



‘어머니, 죄송합니다. 이렇게 다시 헤어져야 하는군요. 곧 저희 형제들이 어머님을 모시게 될 겁니다. 그때까지 몸 성히 지내셔야 합니다. 어머니, 사랑합니다.’



삼록은 웅록과 시선을 맞추고 무언으로 인사를 나누었다.



‘어머니, 소자가 반드시 어머님을 모시러 가겠습니다. 저희 형제의 조국은 고구려입니다. 그때까지 무탈하세요. 오늘 어머님을 만나 뵙게 되어 너무 감격스럽습니다. 안녕히 돌아가세요. 그리고 죄송합니다. 어머니, 사랑합니다.’



구록은 붉게 물든 눈자위를 감추느라 자주 헛기침을 하며 고개 좌우로 돌렸다. 웅록도 진진과 두 동료 모르게 흐르는 눈물을 닦아냈다. 형제는 속으로 무수히 ‘어머니’라는 말을 되뇌며 웅록과 헤어지는 것을 아쉬워했다. 그러나 세 사람이 모자(母子) 관계라는 사실은 철저히 비밀에 부쳐져야 했다.



“웅록 전령님, 무사히 돌아가십시오.”



웅록이 무사히 압록수를 건너 고구려군 진영으로 돌아왔다. 그는 우중문을 만나 나눈 이야기와 대접받은 사실 그리고 수나라 진영으로 들어갈 때와 나올 때 살펴본 세세한 내용까지 모두 을지문덕에게 보고하였다.



또한, 압록수에서 수나라군 진영까지 가는 30여 리 길의 상태로 상세하게 보고했다. 을지문덕은 웅록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수나라 별동대의 진영도(陣營圖)를 수정하였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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