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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재효 Jan 27. 2024

녹족부인


(10) 녹족 형제의 계략








“우리 아홉 형제 중 네 명이 어려서 비명에 갔고, 나머지 다섯 명 중 두 명은 서역(西域)으로 팔려갔으며, 이곳에 있는 삼 형제는 이십 년 만에 꿈에 그리던 어머님을 만났습니다. 우리 삼 형제가 번회(樊回)같이 올곧은 의부(義父)를 만난 것도 모두가 삼생(三生)에 걸친 인연에서 맺어진 관계입니다.


그러나 인간사는 오늘의 호연(好緣)이 내일은 악연(惡緣)이 될 수도 있습니다. 두 분 형님, 이제 우리들의 정체성을 분명히 알았으니, 늘 가슴 속에 묻어둔 상흔을 깨끗이 지우고 본성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우리는 단군 할아버님의 정통성을 이은 고구려의 자손입니다.


지금까지는 어쩔 수 없이 수나라 오랑캐의 주구(走狗)가 되었지만, 이제부터는 조국 고구려를 위해 목숨을 바쳐야 합니다. 저는 이십 년 만에 어머님을 뵈면서 느낀 바가 참으로 많았습니다.


이후부터는 우리 삼 형제는 인간답게 살아야 합니다. 조국을 위하고, 우리를 낳아주신 부모님을 위하여 목숨을 바쳐야 합니다. 어쩌면 장승 스승님께서 우리 형제에게 칠정을 말씀하신 것은 이런 날이 올 것을 예견하신 것이 틀림없습니다.”


언변이 좋은 삼록의 말에 일록과 구록은 속에서부터 끓어오르는 증오를 억누를 수 없었다. 수나라 해적에게 납치되지 않았더라면 지금쯤 아홉 형제는 고구려군에 몸담고 수나라군과 전쟁을 벌이고 있을 터였다.


“삼록이 말이 맞는다. 우리는 이제 조국 고구려의 안정과 어머님의 평안을 위해 살아야 한다. 앞으로 한 달이 고구려에게 가장 위험한 시기가 될 것이다. 당장 내일 을지문덕 장군께서 우중문을 만나러 오신다니 우리가 만약을 위해서 미리 손을 써놔야 한다.


미친 양광이 을지문덕 장군이 휴전을 위해 스스로 찾아오거나 자수를 하면 즉시 체포하여 요동에 있는 대본영(大本營)으로 압송하라는 밀명을 두 장군에게 내린 바 있다. 을지문덕 장군이 체포되어 양광이에게 끌려간다면 살해될 것이 뻔하다. 고구려의 운명이 지금 풍전등화와 같은 상태인데, 그분이 희생된다면 고구려는 위험에 처하게 된다.”


일록이 두 아우와 을지문덕을 구할 방안을 논의했다. 세 형제가 이마를 맞대고 묘안을 짜내느라 고심했으나 뾰족한 수가 떠오르지 않았다.


“그래. 그거야.”

일록이 무릎을 쳤다.


“큰형님, 무슨 기발한 방안이 떠올랐습니까?”


“우리 병진(兵陣)에 양광과 비슷한 허룹숭이 유사룡이 있다. 그는 우문술과 아주 친분이 있는 사이로 우문술의 각종 작전에 관여하여 조언을 해주고 있다. 그자를 이용하여 을지문덕 장군을 구해야겠다. 내가 지금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다. 아우들은 그만 물러가거라. 우리 형제가 너무 오랜 시간 함께 있으면 남들이 우릴 바라보는 시선이 곱지 않을 것이다. 나는 즉시 유사룡을 만나야겠다.”


일록이 자리에서 일어나려 하자 삼록과 구록은 서름한 표정을 지었다.


“그자는 허풍으로 유명한 자 아닙니까? 자기가 *강태공(姜太公)이나 제갈량보다 병법과 천문지리에 능통하다고 떠들고 다닌답니다.”

삼록이 제법 유사룡에 대해 아는 척을 했다.


“그러니 내가 그자를 골탕 먹이려는 거야.”


삼 형제는 헤어져 각자의 근무 위치로 돌아갔다. 일록은 평소 아껴두던 독주(毒酒) 두 병을 들고 유사룡을 찾아갔다. 그 독주는 독사와 각종 약초를 달여 만든 술로 일록은 그 술을 마실 때마다 꿀과 함께 마시곤 했다. 술에 약한 사람은 한두 잔만 마셔도 금방 취기가 오르고 정신이 몽롱해지기도 했다. 일록은 유사룡을 찾아가기 전에 꿀을 반 사발 정도 복용했다. 두 사람은 같은 병영에 있으면서 아주 가깝게 지내는 사이였다.


* 강태공 - 주나라 문왕을 도와 주나라를 건국한 일등공신으로 은나라를 격파하고 제나라의 후로 봉해졌다. 태공망(太公望)이라 불리기도 한다.


“이게 누구신가? 번장군이 이 밤에 나를 다 찾아오시고?”

“혼자 술을 마시다 위무사님이 생각나서 수작이나 할까 하고 왔습니다.”


“잘 왔네. 잘 왔어. 그렇지않아도 나도 적적해서 하늘만 바라보고 있었네.”

“상서님은 밤마다 하늘을 보신다고 하시는데, 하늘에 뭐가 있나요? 저는 밤하늘을 보면 희미한 별밖에 보이지 않던데요?”

일록이 더펄이처럼 두 손을 들며 농담조로 말했다.


“번장군이 몰라서 그런 말을 하는 거야. 하늘의 별들도 우리 인간들과 똑같다네. 특히 북두칠성의 움직임을 잘 관찰해야 우리가 고구려를 이길 수 있는지 없는지를 예견할 수 있네. 북두칠성의 움직임으로 인간사회의 길흉화복을 모두 점칠 수 있네.


유사룡(劉士龍)은 *홍농현(弘農縣) 사람으로 매우 영특하고 재주가 많이 황제 양광의 총애를 받았다. 제2차 여수(麗隨) 전쟁이 발발하자 우문술과 우중문이 이끄는 별동대에 상서우승(尙書右丞)의 벼슬에 있으면서 위무사로 종군하고 있었다.


우문술과 우중문도 양광의 총애를 받는 유사룡의 말을 무시하지 못했다. 그는 창칼을 들고 전투를 하는 무관(武官)은 아니었지만, 병법을 알고 별들의 움직임을 파악하여 우문술과 우중문에게 자문하였다. 그러나 그의 병법과 점성(占星)은 완벽한 것이 아니었다.


“상서님, 우선 잔부터 받으세요. 이 술은 제가 가장 아끼는 술이랍니다. 한 잔 드시면 근심이 없어지고, 두잔 드시면 두통이 사라지고, 석 잔 드시면 몽중인(夢中人) 찾아온답니다. 백 잔을 마시면 흰머리가 검게 변하고, 빠진 이가 다시 생겨나며, 밤마다 양물이 벌떡거려 짝없는 사내는 베개를 끌어안고 전전반측해야 한답니다.”


“번장군 입담이 세다는 것은 익히 들어 알고 있네만, 과연 헛소문이 아니었네그려. 오늘 코가 삐뚤어지도록 마셔보세.”


일록이 독주를 한 잔 따라 건네자 유사룡은 얼른 한잔을 목구멍으로 넘겼다. 이어서 두잔, 석 잔, 넉 잔을 유사룡은 안주도 없이 독주를 뱃속으로 붓다시피 했다. 유사룡은 호주가였다. 맛이 기가 막히게 좋은 술이라면 마누라도 주저 없이 팔아서 마실 인사였다. 유사룡이 금방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르면서 기분이 좋은지 혼자서 아무 말이나 지껄여 댔다.


* 홍농현 – 현재 중국 호남성 삼문협(三門峽)


“유상서님, 오늘 천문(天文)을 보신 결과는 어떻습니까?“

“번장군, 혹시 을지문덕이 태어난 연월일시를 아는가?”

일록의 물음에 유사룡은 엉뚱한 것을 물었다.


‘음-, 이자도 내일 을지문덕 장군이 찾아온다는 것을 알고 장군에 관한 것을 연구하고 있었구나. 참으로 잘 되었다. 을지문덕 장군의 생시는 아무도 모른다. 어느 나라든 최고위 장군의 사주(四柱)는 최고급 비밀이라 국왕이나 황제를 제외하곤 아무도 알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을지문덕 장군의 성(姓)과 이름에 사주가 들어있지 않은가? 을(乙)은 십간(十干) 중 두 번째에 해당한다.


한 달은 십간이 세 번 순회하는 기간이다. 그렇다면 태어난 날은 초이틀이나 열이틀 혹은 스무이틀이 될 것이라 본다. 그다음에 지(支)는 땅을 뜻한다. 나도 을지문덕 장군을 직접 본 적이 없지만, 호랑이 인상을 닮았다고 적당히 둘러대 보자. 과연 이자가 어떤 해석을 내놓을지 궁금하다.’

일록이 두꺼비처럼 눈만 껌뻑거리자 유사룡이 다시 물었다.


“번장군 을지문덕에 대해 아는 게 없는가? 번장군은 최전선에 나가 전투를 하는 무인(武人)이니 을지문덕이에 대해 좀 아는 게 있나 해서 물었네. 나는 오랫동안 그자의 사주를 알려고 백방으로 수소문해봤지만, 아는 자가 없더군. 그자의 사주만 알 수 있다면 그자의 운명을 손금보듯 훤히 알 수 있을 텐데 말이야.”


일록이 유사룡의 말에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한 달 전에 요동성을 공략할 때 고구려군 서너 명을 포로로 잡은 적이 있습니다. 그때 그 포로들을 고문하면서 을지문덕이의 사주와 고향, 가족관계, 그와 동문수학한 벗들 등 여러 가지를 취조했습니다. 그때 한 포로가 말하기를 을지문덕을 살파랑이라 부르더군요. 소장은 아직도 그 뜻이 무엇인지 모르겠습니다. 그밖에는 소장도 을지문덕에 대해 아는 게 없습니다.”

일록이 입에서 나오는 대로 아무렇게나 말했다.


“번장군, 방금 뭐라 했는가? 살바람이라 했는가?”

“아닙니다. 살파랑이라 했습니다.”


유사룡의 두 눈이 커지면서 놀란 토끼 모습 같았다. 일록은 살파랑의 의미에 대해 이미 알고 있었다. 유사룡은 옆에 일록이 있다는 것을 잊었는지 혼잣말로 중얼거리며 손가락으로 무엇인가를 열심히 계산하는 것 같았다. 일록은 유사룡의 어둔한 모습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살파랑이라? 죽일 살(殺), 깨트릴 파(破), 이리 랑(狼)자가 틀림없으렷다. 그렇다면, 그렇다면 을지문덕이가 살파랑이란 말인가? 북두칠성 중 파군성(破軍星), 칠살(七殺), 탐랑성(貪狼星)이 형성하는 격국을 살파랑이라 한다. 이거 큰일이로구나. 특히, 우문술 장군과 우중문 장군은 파군성의 살기(殺氣)를 경계해야 한다. 만약, 을지문덕에게 위해를 가한다면 두 장군이 살기를 맞아 죽을 수도 있다.


또한, 을지(乙支)란 땅의 강성한 기운을 뜻하지 않는가? 그렇다면 그자는 하늘의 살파랑과 땅의 기운을 받아 기문둔갑술을 쓰거나 상상할 수 없는 조화를 부릴 수도 있을 것이야. 막아야 한다. 황제가 이미 을지문덕을 보거든 반드시 사로잡아 오라고 했지만, 무슨 수를 쓰더라도 을지문덕에게 위해를 가하는 일을 막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 수나라 별동대는 몰살할 수도 있다.


우문술 장군은 나의 말이라면 들어주지만, 문제는 고집불통의 우중문이다. 이 일을 어찌하면 좋단 말인가? 하지만 나는 두 장군에게 군사행동에 대해 조언과 자문해주는 위무사 아닌가? 양광 황제가 위촉한 위무사.’

유사룡이 정신으로 돌아온 듯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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