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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재효 Jan 27. 2024

녹족부인


 (11) 을지문덕 적장을 대면하다








“자네, 조금 전에 나하고 나는 이야기는 죽을 때까지 비밀로 해야 하네. 우리 두 사람이 나는 이야기에 수나라의 운명이 걸려있네. 그리고 나는 산에 올라가 천문을 관찰해야 하네. 미안하지만 나머지 술은 나중에 마시세.”



일록은 유사룡의 막사를 나오면서 배꼽을 잡았다. 일록은 자신의 막사로 돌아와서도 쉽게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뿐만 아니라 삼록과 구록도 마찬가지였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맑았던 밤하늘은 비가 내리려고 하는지 먹장구름이 끼며, 멀리서 천둥소리가 간간이 들렸다. 세 형제는 어머니 웅록의 모습을 떠올리면서 어렴풋하게 남아있는 옛 추억을 더듬었다.



“징쉐이. 징쉐이. 니먼 쉬세이?”

“니먼 쉬세이?”



을지문덕과 두 수행원이 말을 달려 십여 리쯤 갔을 때였다. 풀숲 좌우 측에서 한 떼의 군사들이 튀어나와 세 사람의 앞길을 막아섰다. 을지문덕과 두 수행원은 모두 고구려의 평복차림이었다. 다만, 두 수행원만 칼을 차고 있을 뿐이었다. 군사들은 수나라 별동대에서 파견 나온 척후병들이었다.



“*워문쓰 까오리 쉬첸.”



을지문덕 수행원 중 한 사람이 능숙하지는 않지만, 수나라말로 간단히 응답하자, 척후병들은 길을 터줬다. 그들은 조금만 더 가면 수나라 군대가 머무는 군영(軍營)이 나온다고 친절하게 설명까지 해주었다. 척후병들도 고구려군 총사령관 을지문덕이 온다는 소식을 알고 있었다. 을지문덕 일행은 다시 말을 타고 뽀얀 흙먼지를 날리며 시오리 길을 달렸다. 세 사람이 거대한 병영 앞에 세워진 출입구에 도착하자 한 떼의 기마병이 달려왔다.


* 워문쓰 까오리 쉬첸(我们是高丽使臣) – 우리는 고구려사신 이다.



“당신들이 을지문덕 장군 일행입니까?”

진진이 소리쳤다.



“그렇소. 내가 을지문덕이오. 우중문 대장군에게 안내해주시오.”

“나는 통역사 진진이라 하오. 나를 따라오시오. 우중문 장군과 우문술 장군이 계시는 본영(本營)으로 장군을 모시겠소.”



을지문덕 일행은 말을 타고 수나라 병영 안으로 들어갔다. 을지문덕 일행이 병영 안으로 들어서자 병영 안 좁은 길 좌우로 굶주린 수나라 병사들이 붉은 깃발이 달린 창을 들고 늘어서 있었다. 서 있는 병사와 병사 사이의 간격이 없이 서로 어깨를 붙이고 서 있는 모습이 무척 어색해 보였다.



웅록이 방문했을 때 보다 병영은 훨씬 깨끗하고 말끔하게 정리 정돈되어 있었다. 우중문이 병영 내 통행로에 병사들을 도열시킨 이유는 병영 내의 모습을 감추려는 조치였다. 을지문덕 일행은 말을 타고 진진의 뒤를 따라가는 도중에도 수나라 군대 진영을 매의 시선으로 살폈다.



아무리 병사들을 통로 좌우로 물샐틈없는 대형으로 세웠어도 말 잔등에 앉아 있으니 병영 내 막사와 시설물들 그리고 병마와 병사들의 일상을 엿볼 수 있었다. 아침 식사할 시간이 훨씬 지났음에도 막사 사이 사이에서 병사들이 앉아만 있을 뿐 어디에도 밥 짓는 연기가 보이지 않았다.



일부 병사들은 병장기를 들고 무질서하게 뛰어가는 모습도 포착되었다. 말들이 병영 내를 어슬렁거리며 돌아다녀도 누구 한 사람 제지하지 않았다. 을지문덕은 특히 병영 내 막사의 방향과 여러 막사가 어떤 형태로 어울려 설치되었는지 유심히 살폈다. 막사의 설치는 전투 시 진법(陳法)과도 같아서 막사를 설치한 형태에 따라 군대의 성격과 규모를 파악할 수 있었다.



‘음-, 이놈들 병영을 엉망으로 설치했구나. 우중문이가 진법을 전혀 모르지는 않을 텐데, 이상한 일이군. 인분 냄새가 진동하는 것은 제대로 된 병영이 아니란 뜻이렷다. 개돼지만도 못한 오랑캐들이구나.’



을지문덕 일행 백여 보 앞에 대형 막사가 나타났다. 막사 앞에는 본영(本營)이란 팻말이 꽂혀 있고, 막사 좌우에는 ‘右翊衛大將軍 于仲文(우익대장군 우중문)’이란 이름이 쓰인 오색의 대형 장수 깃발이 십여 개가 꽂혀 있는데, 족히 어른 키 두 배는 되어 보였다. 막사 주위에는 다양한 종류의 화초가 피어있고 깨끗하게 청소도 되어있었다.



을지문덕 일행이 대형 막사 앞에 다다를 즈음 막사 안에서 서너 명의 무장한 군관들이 배가 남산만 한 배불뚝이 사내 한 명과 보통 키의 중년 사내 한 명을 호위하고 나왔다. 우중문과 우문술이었다. 우중문은 누런 비단으로 지은 *한푸(漢服)를 입었고, 우문술은 파란색 비단으로 만든 한푸를 입었는데, 자그마한 체구는 우중문의 어깨 정도밖에 안 되었다. 을지문덕이 우중문과 우문술을 만난 적이 없었다. 진진이 우중문 일행을 보자 얼른 말에서 내렸다.



“을지 장군, 어서 말에서 내려 대수나라 별동대를 지휘하시는 우중문 대장군님과 우문술 대장군님께 하배(下拜)하시오.”



“진진 통역사, 나는 고구려 태왕 이외에는 그 누구에게도 절을 하지 않소이다. 나는 고구려군의 총사령관으로 두 분 장군들과 강화협상(講和協商)을 하려고 왔소이다.”



을지문덕이 말 위에서 불쾌한 얼굴로 진진의 말에 대꾸하자, 배불뚝이 사내와 파란색 비단옷을 입은 사내가 얼른 을지문덕 앞으로 다가왔다.



* 한푸 – 중국 전통 남자 옷으로 아래위가 통으로 되어있다.



“어서 오시오. 나는 우중문이라 하오.”

“멀리 있는 길 오시느라 고생하였소. 이 사람은 우문술이라 하오.”



그제야 을지문덕은 말에서 내려 우중문과 우문술에게 예의를 갖추고 통성명을 했다. 모두 긴장의 순간이었다. 우중문과 우문술의 호위 군사들은 행여 무슨 변고나 일어나지 않을까 무척 긴장한 표정이었다.



“반갑습니다. 나는 대고구려군 총사령관 을지문덕이라 합니다.”



세 사람 모두 평상복 차림이었다. 간단한 인사가 끝나자 우중문이 을지문덕을 안내하여 대본영 막사 안으로 들어갔다. 본영 안에는 을지문덕, 우중문, 우문술 그리고 통역사 진진 등 네 명 만 있었고, 나머지는 밖에서 대기하고 있어야 했다.



우중문과 우문술을 호위하던 군관은 웅록의 세 아들과 그들의 수하였다. 을지문덕과 우중문, 우문술의 담화가 얼마나 시간이 소요될지 아무도 알 수 없었다. 담화가 막 시작될 때 유사룡이 술이 덜 깨 모습으로 대본영에 나타났다. 그는 일록을 보자 배시시 웃으며, 한쪽 눈을 찡끗했다. 간밤에 마신 독주가 아직도 덜 깬 것이 확연해 보였다.



“빨리 노를 저어라.”


고구려군 진영에서 출발한 중선(中船) 한 척이 빠른 속도로 압록수를 건너고 있었다. 오전에 을지문덕 일행이 타고 강을 건넜던 그 배였다. 배가 수나라군 진영이 있는 방향으로 건너오자 수나라 척후들은 그 배를 유심히 살폈다. 척후들은 그 배가 을지문덕이 돌아갈 때 타고 갈 배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고깃배를 강안(江岸)으로 바싹 붙여라.”


그런데 수나라 척후들이 알지 못하는 장소로 또 한 척의 작은 어선이 북쪽에서 조용히 다가오고 있었다. 그 어선에는 웅록과 다섯 명의 고구려 무사들이 타고 있었다. 소형 어선이지만 어른 열 명이 충분히 탈 수 있는 규모였다. 작은 어선과 중선의 거리는 대략 5리 정도 되었다. 한여름이라 강가에는 수양버들이 우거져있어서 소형 어선이 버들가지 사이에 숨어있으면 찾기 어려웠다.



전쟁하는 두 나라 장수가 만나는 일은 휴전을 하거나 아니면 항복을 할 때 이외에는 거의 없었다. 우중문에게는 이미 전날 웅록이 고구려군 총사령관인 을지문덕이 강화를 하기 위하여 수나라 진영에 올 것을 알린 만큼 우중문과 우문술 그리고 그들의 휘하 참모진들은 큰 기대를 걸고 있었다.



웅록이 우중문에게 고구려군의 상태에 대하여 언질을 준 만큼 우중문과 우문술은 을지문덕이 항복하러 오는 것으로 짐작했다. 그러나 그들은 을지문덕이 고구려 왕이나 혹은 태자 정도는 대동하고 올 것이라고 예상했다. 우중문은 속으로 크게 실망하였지만, 을지문덕과 이야기를 나눠봐야 실상을 알 것으로 판단하고 자중하고 있었다.


을지문덕과 우중문, 우문술이 원탁에 앉았다. 수나라군의 본영이고 대장군 막사라 그런지 세 사람이 들어있는 막사는 무척 넓고 화려했다. 막사 안에 또 다른 작은 막사 서너 개가 있는데 침실이나 휴식공간으로 이용하는 시설 같았다. 가운데는 장창과 황금빛으로 치장한 군검(軍劍)이 진열대에 세워져 있는데 우중문이 사용하는 병장기 같았다. 우중문의 뒤로 대형 지도가 걸려있었다.



지도에는 산동반도와 요동반도 그리고 만주지역과 고구려의 강역이 그려져 있는데, 탁군(涿郡)에서 평양성까지 붉은 화살표로 수나라 별동대의 공격로가 그려져 있었다. 산동반도에서 황해를 지나 평양성까지는 청색 화살표가 덧칠되어 있는데, 그 표시는 수나라 해군을 이끌고 평양성으로 진출한 내호아의 공격로 같았다. 세 사람이 잠시 서먹한 상태에서 앉아 있을 때 시자(侍者)가 차를 내왔다.



“장군님들, 분위기가 너무 딱딱합니다. 차를 드시고 말씀을 나눠보시지요.”

통역사 진진이 촐랑거리며 세 사람의 눈치를 살폈다.



“을지 장군, 내가 즐겨 마시는 차입니다.”

우중문이 을지문덕에게 차를 권했다.



“우리 수나라에는 차가 아주 많습니다. 우리는 식사할 때나 일을 할 때 수시로 차를 마시지요. 고구려에도 대륙에서 차가 전래하였을 것입니다. 식기 전에 드시지요.”

우문술이 미소를 지어 보이며 을지문덕에게 수나라 차를 자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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