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최재효 Nov 06. 2023

녹족부인



(9) 을지문덕 적장을 만나러 가다










“장군님, 내일 가실 겁니까?”


“우중문에게 약속했으니 가야 하겠지. 내가 안 가면 그자가 얼마나 섭섭해하겠는가? 남아일언은 중천금 아닌가?”


“그렇지요. 내일 장군님을 압록수 건너편까지 모시겠습니다.”


“그리하세. 압록수를 건너면 나 혼자 우중문을 만나러 갈 것일세.”


“장군님, 안됩니다. 검술에 능한 군관 두 명을 대동하십시오. 수나라 사람들은 흉물스러워 믿을 수가 없습니다.”


“그럼, 웅부관의 말대로 하겠네.”



웅록은 중선(中船)을 준비했다. 중선은 돛대가 달리고 병력을 최대 50명까지 태울 수 있는 배였다. 중선을 준비한 이유는 군사 10여 명과 말 세필을 태우고 압록수를 건너야 하기 때문이었다. 장마가 끝나고 물이 빠진 상태라고는 하지만 아직은 수량이 많고 넓은 강을 건너려면 중선 정도가 필요했다.



압록수가 장마로 물이 불어나면 강의 폭이 10리 정도 되었다. 현재는 7리 정도의 폭이기는 하지만 물살이 세고 깊었다. 웅록은 을지문덕을 호위할 검술에 능한 수행원 두 명을 선발하고, 별도로 소형 선박 한 대를 준비하고 몸이 날래고 용감한 다섯 명의 병사를 뽑아 놓았다.



웅록은 저녁 식사를 마치고 을지문덕 휘하의 열 명의 고급 군관과 비장을 별도로 자신의 막사로 초치(招致)하였다. 군관들은 을지문덕이 웅록을 무척 신임한다는 사실과 압록수를 건너 우중문의 진영에 다녀온 것도 알고 있었다. 그들은 웅록이 수나라 군영에서 무엇을 보고 들었는지 무척 궁금해했다.



군관들은 한 명도 빠짐없이 웅록의 막사로 모여들었다. 웅록은 따끈한 차를 끓여놓고 군관들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우중문의 군영을 다녀온 웅록은 아직도 아들을 만난 희열과 행복감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웅부관께서 우중문을 만나고 오더니 얼굴이 환해졌습니다.”


“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는 게요?”



“혹시 우중문이가 술이라도 보냈다면 맛 좀 봅시다.”


“갈수록 웅부관의 얼굴이 점점 더 반반해지니 이게 무슨 조화요?”



군관들은 차를 마시며, 웅록에게 농담을 했다. 웅록은 군관들의 진한 농담도 받아 낼 정도로 군영 생활에 익숙해져 있었다. 웅록은 조금 전에 을지문덕에게 보고했던 내용을 그대로 군관들에게 설명했다.



수나라 군영이 그려진 작전 지도를 보며 세밀하게 설명하자 군관들은 고개를 끄덕거리기도 하고 중간중간 질문을 던지기도 했다. 군관들은 막연하게 알고 있던 수나라 별동대의 실체를 알게 되면서 얼굴이 굳어졌다. 그들이 알고 있던 수나라 별동대의 정황이 크게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었다.



“오늘 참으로 좋은 것을 알았소이다. 웅부관. 정말로 고생했소이다.”


“참으로 큰일을 해냈소이다.”



“내일 을지 장군께서 우중문을 만나러 가는 일도 잘 될 것입니다.”


“여러분, 목숨을 걸고 우중문 진영에 다녀온 웅부관에게 손뼉을 쳐줍시다.”



하룻밤이 빨리 지나가고 있었다. 웅록은 어제 20년 만에 만난 두 아들의 얼굴을 떠올리며, 옛일을 그려보았다. 그녀를 가장 가슴 아프게 한 것은 수나라 해적에게 잡혀갔다가 배 안에서 목숨을 잃은 이록, 사록, 오록, 칠록 그리고 페르시아 노예 상인에게 팔려간 육록과 팔록이의 일이었다.



이승을 달리한 네 명의 아들들은 다시 만날 수 없지만 멀리 페르시아 상인에게 팔려간 육록과 팔록이 지금도 어느 낯선 땅에서 자신을 찾고 있을 것만 같았다.



‘내가 죽기 전에는 반드시 육록이와 팔록이를 찾을 것이다. 이 세상 끝까지라도 뒤져서 반드시 내 아들을 만날 것이야. 이미 저승에 든 네 아이에게는 내가 먼 훗날 명부(冥府)에 들면 속죄를 해야겠지. 아마도 그 아이들은 아비를 만나 피안(彼岸)에서 잘살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웅록이 밤새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는 사이에 동이 트고 있었다. 그녀는 서둘러 아침 식사를 마치고 출발 준비를 마쳤다. 강가로 나온 을지문덕과 그리고 십여 명의 군사들은 서둘러 배에 올랐고, 고물에는 말 세필도 실려 있었다.



물안개가 자욱한 압록수는 마치 호수처럼 잔잔했다. 배의 좌우현에 수부(水夫) 열 명이 힘껏 노를 저었다. *이각(二刻)이 지나 배가 압록수를 건넜다. 을지문덕과 두 수행원은 배에서 내려 말을 타고 서쪽으로 달렸고 웅록은 다시 배를 돌려 동쪽으로 향했다.



* 일각 – 일각(一刻)은 지금 시간으로 15분 정도, 이각은 30분.



어머니와 아쉬운 작별을 한 삼록과 구록 형제는 서로 부둥켜안고 서러운 눈물을 쏟아냈다. 꿈에 그리던 어머니와 20년 만에 상봉했는데도 마음껏 모자의 정을 나누지도 못한 형제의 심정은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 그날 밤, 형제는 큰형 일록이 머무는 우문술의 병영을 찾았다.



삼록과 구록은 형이 근처에 있어도 함부로 찾아가기가 어려웠다. 우문술과 우중문이 서로 전공을 세워 황제 양광에게 잘 보이려고 경쟁을 벌이고 있었다. 그 와중에 세 형제가 공공연히 만난다는 게 여간 신경 쓰이는 게 아니었다. 



두 아우가 찾아오자 일록은 오랜만에 아우들과 술자리를 만들고 회포를 풀고 싶었다. 우문술과 우중문은 녹족 삼 형제가 워낙 탁월하고 전투에 임하면 백전백승의 전공을 세우자 행여 자신의 휘하에서 다른 장군의 밑으로 갈까 봐 늘 노심초사했다. 우중문은 삼록 형제만큼 전투에 탁월한 능력을 보여주는 부장이나 공격대장이 없었고, 병법을 아는 지휘관도 없었다.



우문술 역시 일록 좌장이 자신을 버리고 다른 장군의 밑으로 이동할까 걱정했다. 그는 아침에 눈을 뜨면 일록의 세 끼 식사부터 잠자리까지 챙기는 등 부장을 황제보다 더 지극한 정성을 쏟으며 그를 자신의 휘하에 붙잡아두려고 애를 쓰고 있었다.



“형님, 그간 무탈하셨죠?”



“암, 나야 잘 있지. 그런데, 아우들이 예고도 없이 방문하니 기분이 좋네. 자, 우리 형제들의 우의를 다지는 의미에서 한 잔씩 들자.”



일록은 우문술 장군 다음으로 영향력이 막강했다. 우문술은 일록의 양부인 번회와 막역한 사이였다. 우문술의 아버지는 수나라 건국 이전에 북제(北周)의 3대 황제 우문옹의 총애를 받던 장군이었다. 우문성과 번회는 의형제를 맺은 사이였다. 우문술은 번회의 큰아들 일록은 마치 친아들처럼 생각하며, 그의 군권(軍權)의 상당 부분을 좌장인 일록에게 위임하기도 했다.



그는 우문술의 큰아들 우문화급(宇文化及)과는 호형호제하는 사이이기도 했다. 우문화급은 수나라 황제 양광의 근위대장으로 있으면서,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고 있었다. 삼 형제가 술이 불콰해지자 삼록이 주변의 시자(侍者)들을 모두 물렸다. 구록이 밖을 한번 살피고 나서 일록에게 말했다.



“형님, 오늘 낮에 어머님을 만났습니다.”


“뭐라고? 어, 어머님을 만났다고? 그게 정말이냐? 너희들이 지금 술 한잔 마시고 취해서 하는 말 아니냐?”



구록이 품에서 웅록이 건넨 버선 아홉 켤레를 꺼내 일록에게 보였다. 백 마디 말보다 한 번의 실행이나 확실한 물증이 중요했다. 남의 말의 잘 믿지 않는 일록에게 아무리 어머니를 만났다고 말해야 믿지 않을 것 같아 막내 구록이 일부러 버선을 가져온 것이었다.



“그게, 무엇이냐?”


“형님, 잠깐 군화와 버선을 벗어보십시오.”



일록이 막내아우가 시키는 대로 군화와 버선을 벗고 맨발이 되자 구록이 버선 한 켤레를 얼른 일록의 녹족(鹿足)에 신켰다. 버선이 자연스럽게 일록의 발에 달라붙었다. 일록이 여태껏 수천 켤레의 버선을 신어봤지만, 지금처럼 버선이 마치 기름을 발라놓은 것처럼 발이 잘 들어가기는 처음이었다.



“갑자기 웬 버선이냐? 그런데 이 버선이 마치 맞춘 것처럼 나의 발에 딱 맞는구나. 하여간 새 버선을 주니 고맙구나.”



“형님, 어머님이 저희에게 주고 가신 아홉 켤레 버선 중 하나입니다.”


그제야 일록은 아우들의 말을 믿기 시작했다. 일록은 그래도 아우들의 말이 미심쩍은지 나머지 여덟 켤레의 버선도 모두 신어보았다. 하나 같이 일록의 발에 착 달라붙었다.



“형님, 이 아우가 하는 말을 잘 들으셔야 합니다.”


“그, 그래. 알았다.”



삼록이 어제 어머니 웅록을 만난 자초지종을 자세히 설명해주었다. 일록은 어머니 웅록이 첫째부터 막내까지 이름을 부르며, 눈물을 흘렸다는 대목에 이르러 목놓아 울기 시작했다. 세 형제가 갑자기 대성통곡하자 막사 주변을 경계하던 수나라 군사들이 막사 안을 들여다보기도 했다.



그러나 그들은 왜 삼 형제가 목놓아 울고 있는지 도저히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삼록은 내일 고구려군의 총사령관 을지문덕이 수나라 병영으로 온다는 사실도 알렸다. 일록이 모든 정황을 알고 나서 두 아우를 다독거렸다.



“아우들아, 마음을 진정시켜라. 어머님이 이십 년 전 수나라 해적에게 납치당한 우리 형제를 아직도 찾고 계신다는 사실이 도저히 믿기지 않는구나. 너희들은 부모님을 어떻게 생각했는지 몰라도 이 형은 그동안 아버님과 어머님을 많이도 원망했단다. 이제 지난날을 돌이켜보니 장승(莊承) 스승님께서 우리 삼 형제에게 귀에 못이 박이도록 하신 말씀이 생각나는구나.”


일록이 장승의 문하생으로 들어가 그에게 수학하던 시절을 떠올렸다.



“세상 삼라만상은 그냥 생겨나는 게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특히, 인생은 가로와 세로로 촘촘하게 짜인 인연의 그물망에서 인과관계가 형성되고, 희로애락애오욕(喜怒哀樂愛惡欲)의 칠정(七情) 속에 살다가 여느 날 번개처럼 허무하게 사라지는 신기루와 같은 것이라고 하셨지요.”


구록이 스승 장승이 늘 입버릇처럼 하던 말을 꺼냈다. <계속>





























이전 08화 녹족부인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