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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재효 Jan 28. 2024

녹족부인




(19) 녹족부인 다시 아들을 만나다






웅록은 주머니에서 작은 지도를 꺼내 고구려군의 공격 지점과 전술을 상세히 일러주었다. 삼록은 웅록과 이야기를 하는 도중에서 수시로 막사 출입문을 주시하였다. 웅록은 모든 기밀 사항을 삼록에게 일러주고 나서 다시 한번, 다짐을 받았다.


아들을 의심해서가 아니라 20여 년 동안 떨어져 지낸 모자지간이라 행여나 의사소통에 문제가 없는지 점검하는 차원이었다.



“어머님, 걱정하지 마세요. 별동대는 살수에서 거의 전멸될 겁니다. 어머님 말씀대로 저희 형제는 별동대가 섬멸된 후에 어머님을 따라 서역(西域)으로 갈 것입니다. 일록 형님과 구록 아우도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하고 있습니다. 다만, 어머님께서 막중한 일을 하시는 과정에서 행여 다치기라도 할까 봐 마음을 졸이고 있습니다.”


“고맙고 또 고맙다. 너희들은 자랑스러운 환인, 환웅, 단군 할아버지의 피를 이어받은 하늘의 후손이며, 고구려의 아들들이다. 수나라 오랑캐들과 우리 고구려 사람들은 물과 기름 같아서 절대로 섞일 수 없다.



지금도 잘하고 있지만, 고구려군이 완벽한 승리를 할 때까지 너희가 앞장서서 조국을 위기에서 구하는 데 헌신해야 한다. 별동대가 도망치면 요동에 있는 양광의 대본영 군대와 합류한 뒤에 또다시 평양성을 향해 진격해 올 것이다.


그 같은 일을 막기 위해서 도망치는 별동대를 철저히 섬멸해야 한다. 단 한 놈도 살아서 돌아가는 일이 없어야 한다. 이 어미의 말을 명심 또 명심하거라.”



“어머님, 명심 또 명심하겠습니다.”


웅록은 막사를 나와 평양으로 돌아갔다. 그가 돌아가고 나자 분통을 터트리며, 아쉬워하는 자는 바로 우문술이었다. 아침부터 술에 취해 횡설수설하는 우중문의 눈꼴틀린 모습이 보기 싫어 그는 혼자 자신의 막사로 돌아와 한숨만 푹푹 내쉬었다. 별동대의 총지휘권이 우중문에게 있으니 자신이 아무리 이런저런 의견을 제시하여도 우중문은 동문서답만 할 뿐이었다.



‘나 혼자만이라도 도망칠 궁리를 해야겠다. 저 불학무식한 우중문이와 같이 있다가는 고구려군의 칼에 내 목이 떨어질 수도 있을 것이다.’



우문술은 주요 문서들을 챙기고 나머지는 모두 불살라 버렸다. 밤늦게까지 풍악 소리가 들렸다. 그러나, 밤이 되도록 고구려 태왕 고사하고 고구려 진영에서는 졸병 한 명도 찾아오지 않았다. 겁이 덜컥 난 유사룡은 을지문덕의 시문을 다시 한번 유심히 살폈다.



자신이 여러 사람 앞에서 시문을 자신 있게 해석하였고, 우중문 이하 장수들은 그의 말만 믿고 모두 고주망태가 된 상태였다. 장수들뿐만 아니라 중간급 군 간부들도 모두 대취한 상태여서 만일 무슨 변고라도 일어난다면 별동대는 전멸을 면치 못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아아, 내가 실수를 한 것 같다. 기구와 승구의 내용은 우중문을 칭찬하는 것 같은데, 전구에서 한번 말을 틀더니 결구에서는 조롱하는 내용이로다. 우문술이가 해석한 게 맞는 것 같다. 그렇다면 을지문덕이가 기문둔갑술을 통달했다는 것 아닌가? 기문둔갑은 손무(孫武)나 그의 후손인 손빈(孫臏) 혹은 제갈공명 같은 전쟁의 귀신들이나 사용할 줄 아는 비술(秘術)이다.



천문지리에 통달해야 천체의 움직임을 파악하여 인간의 길흉화복에 응용하는 그 기술이야말로 모든 장수가 터득하고자 하는 바 아닌가? 이를 어찌하면 좋단 말인가? 지금 우중문은 대취하여 무희들을 껴안고 육림(肉林) 속에서 노닐고 있을 덴데. 허-, 내가 어쩌다 별동대의 위무사가 되어 이 고생하는 것인가? 내가 나중에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서라도 일단 우중문에게 찾아가 사실대로 말해야 한다.’



유사룡은 우중문이 묵고 있는 본연 막사로 향했다. 막사 앞에서 두 명의 초병이 문 양쪽에 서서 졸고 있었다. 유사룡이 다가가자 초병이 그의 앞을 막았다.



“급한 일이다. 우익위대장군을 만나야 한다. 한시가 급하다.”

“안 됩니다.”


“왜 안된다는 게냐? 한시가 급하다고 하는데.”



“지금 대장군께서 한참 그 일을 치르고 계시는 중입니다. 그 일이 끝나야 만나실 수 있습니다. 돌아가십시오. 아니면 여기서 기다리시던지요. 보통은 날이 밝아야 그 일이 끝난 거든요. 대장군께서 그 일을 치르는 데 방해하면 목이 떨어집니다.”

초병이 손으로 목을 긋는 시늉을 했다.


“그 일이라는 게 뭐냐?”



“에이, 위무사님도 원. 정말로 그걸 모르셔서 하시는 말씀이세요? 대장군님은 매일 밤 그 일을 치르시는데요. 왜 있잖아요. 세상은 음과 양의 조화 속에 만물이 태어나고 사위어가고 하는 뭐 그런 거 말입니다. 더 쉽게 말하면 암수가 한 몸이 돼야 무(無)에서 유(有)가 나오고 또한 오묘한 인생의 묘미를 느끼는 거 말입니다. 스님들이 말하는 그거 뭐냐? 공즉시색 색즉시공이란 말이 딱 맞을 거 같은데요.”

유사룡은 더 할 말이 없었다. 그가 차마 막사 안을 들어가지 못하고 안을 기웃거리다 묘한 소리에 귀를 세웠다.



사내의 밭은 숨소리가 한바탕 들려오면 곧이어 여인의 가냘픈 신음과 비명이 은은하게 막사 밖으로 흘러나왔다. 막사 안에서 이상한 소리가 흘러나올 때마다 초병들은 전율하며, 아랫도리를 잡고 요상한 짓을 해댔다.



유사룡은 밤마다 육욕(肉慾)의 향연에 빠진 우중문을 탓하며, 자신의 막사로 돌아가야 했다. 그는 돌아가다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북두칠성의 일곱별 중 탐랑성(貪狼星), 파군성(破軍星), 칠살(七殺)이 형성한 격국의 형태가 오늘따라 밝게 빛나고 있었다.



‘살파랑(殺破狼), 살파랑, 우리 수나라 별동대는 살파랑의 살기를 맞고 모조리 죽게 생겼구나. 우문술이 을지문덕의 시문을 보고 놀라는 모습은 그가 을지문덕의 시문을 완벽하게 해석했거나 아니면 하늘의 조화를 파악하고 있다는 뜻이다. 내가 이번에는 우문술의 편을 들었어야 했다.



그러나 이미 엎질러진 물이 되었으니 어쩌랴. 이 길로 고구려군 진영으로 도망을 칠까? 아니야, 그건 안돼. 나는 수나라 황제가 파견한 위무사 아닌가? 내가 수나라를 배신하고 고구려로 망명한다면 낙양에 있는 어머님과 처자식들은 비참한 죽음을 맞이할 것이다. 아, 나는 이제 어찌하면 좋단 말인가?’



그다음 날에도 평양성에서는 아무도 오지 않았다. 어리보기 우중문은 끈기 있게 아무 불평불만 한마디 하지 않고 낮부터 주지육림에 빠져 허우적거렸다. 병사들은 눈만 뜨면 먹을 것을 찾느라 군영을 빠져나가 들로 산으로 헤매고 다녔다.



인근의 모든 야산과 들판에는 곡식 한 알 찾을 수 없었고, 속살을 강탈당한 나무들은 하얗게 말라가고 있었다. 병사들이 뱀과 개구리 등 미물들을 잡느라 산야를 모두 헤집어 놓는 바람에 강산은 폐허가 되고 말았다. 마치 들판 위로 메뚜기떼가 휩쓸고 지나간 모양새였다.



식적일종, 당오이십종(食敵一鍾, 當吾二十鍾). 적의 땅에서 빼앗은 군량은 아군 군량의 스무 배 값어치가 있다. 손자는 병자병법 작전편에서 적과 싸울 때 적지에서 군량을 얻는 방법에 대하여 언급했다.



그는 전쟁하는 데 식량 확보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이다. 사람이나 동물이나 먹지 않고 생존할 수가 없다. 수나라 별동대 9군을 이끄는 좌익위대장군 우문술과 우익위대장군 우중문의 가장 큰 실수는 바로 군량미 수급에 대한 허술한 대책이었다.



당초에 *회원진(懷遠鎭)과 *노하진(瀘河鎭)에서 9군 30만 5천 명의 별동대가 고구려 평양성을 향해 출발할 때 병사 대원 1인당 백 일 분의 식량과 각종 병장기가 지급되었다. 양견과 현재의 황제 양광을 주군으로 모시며 수많은 전투에 참여하여 혁혁한 전공을 세운 두 장수는 식량 문제를 너무 안이하게 생각했다.



고구려군이 전쟁에서 청야전술을 처음 사용한 때는 고구려 제8대 태왕인 *신대왕(新大王) 8년에 한나라의 현도태수 경림(耿臨)이 대군을 이끌고 고구려를 침입했을 때였다. 당시 국상이었던 명림답부(明臨答夫)는 이 전술을 처음 사용하면서 부터 고구려의 주요 방책으로 자리를 잡게 되었다.



명림답부는 그때 식량 대용이 가능한 모든 작물을 불태우도록 했다. 한나라군은 고구려를 침범하면서 군량을 현지에서 조달할 계획을 하고 있었으나, 고구려군의 기습과 청야전술로 굶주림에 지쳐 퇴각하였다. 이때 명림답부는 좌원(坐原)에서 기병을 직접 이끌고 퇴각하는 한나라군을 추격하여 섬멸하였다. 을지문덕은 대륙에서 명멸한 여러 나라의 군사(軍史)를 깊이 연구한 인물이었다.



만약에 내호아가 적절한 시기에 패강에 도착하여 우문술과 우중문이 이끄는 별동대에게 군량을 공급했더라면 전세는 고구려군에게 상당히 불리하게 전개되었을 것이었다. 전공에 눈이 먼 내호아의 돌출행동은 고구려군에게는 사기를 높이는 계기가 되었고, 별동대에게는 죽음을 선물했다.



우중문은 내호아에게서 희소식이 오기를 내심 기대했지만, 끝내 연락이 오지 않았다. 고구려군의 기만술에 말려든 우중문의 별동대는 살아남을 방안을 강구해야 했다. 그러나 고구려의 지형에 익숙지 못한 별동대의 9군의 장수들은 휘하 부대원들을 이끌기보다는 자신의 목숨을 구하는 데 급급했다.



* 회원진 – 요서 지역의 탁군(현, 북경) 부근

* 노하진 – 대릉하 지역의 한 지역

* 신대왕 - 고구려 제8대(재위는 서기 165~179) 왕으로, 이름은 백고(伯固)로 태조왕의 아들



고구려 태왕은 세작들로부터 수나라 별동대가 대혼란에 빠져 도망칠 준비를 하고 있다는 보고를 받고 작전 회의를 개최하였다. 이미 여러 차례 크고 작은 규모의 수뇌부 회의를 개최했지만, 이번만은 분위가 사뭇 달랐다. 그 자리에는 웅록도 참여하였다.



먼저 을지문덕이 수나라 별동대에 관한 개략적인 현황을 설명하고, 지휘관들의 의견을 수렴하면서 태왕이 종합적으로 판단하여 고구려군의 최종 전술을 확정 짓는 중요한 회의였다. 태왕은 이미 별동대에 웅록의 세 아들이 주요 지휘관으로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을지문덕의 현황 설명이 끝나고 지휘관들의 의견을 청취할 차례였다.



“폐하, 좌군 돌격대장 해무성(解武成) 한 말씀 드리겠습니다.”

“오, 해무성 대장, 어서 말해보라.”



해무성의 조상들은 고구려 건국 시조인 추모왕(鄒牟王)때부터 6백 년 가까이 고구려의 주요 직책을 맡으며, 나라가 위험에 처했을 때마다 몸을 아끼지 않고 구국에 힘을 쏟았다.



“수나라 별동대를 살수와 압록수에서 대파한다는 기존 계획에는 변동이 없는 것인지요? 또한, 아군의 공격 방법은 기존처럼 철갑 중기병대(重騎兵隊)가 주축이 되고 궁병(弓兵)과 보병(步兵)이 지원해야 하는지요?”



“폐하, 소장도 감히 한 말씀 올리겠습니다.”


해무성의 질의가 끝나자마자 왕실 인사로 대모달(大模達) 벼슬을 하는 고등(高鄧)이 태왕에게 발언권을 신청했다. 그는 왕실 인사 중 군부에서 가장 막강한 권한을 행사하는 인물로 태왕과 뜻이 잘 맞았다.



“대모달, 말해보라.”


“현재 요동에 양광이 칠십만 대군을 이끌고 요동 주변에 산재해 있는 고구려 산성을 공략하고 있습니다. 만약 별동대들이 압록수를 넘어 그들과 합류한다면 어찌하실 것인지요? 태왕께서는 이에 대한 대책을 세워놓으셨습니까? 지금까지 아군은 수나라 군대를 맞아 치고 빠지는 전술로 일관해 왔습니다. 이제는 전술을 변화시킬 때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두 사람이 연달아 태왕에게 질문하자 다른 사람들은 일단 두 질문에 대한 태왕의 답변을 기다리는 눈치였다. 태왕의 답변을 듣고 궁금한 사항을 물으려는 의도 같았다. 잠시 침묵이 있었다.



“짐이 해무성의 질문부터 답하겠다. 여러 장수도 잘 알다시피 고구려군은 총사령관인 을지문덕 장군의 통솔하에 다섯 개의 군단(軍團)으로 편성되어 있다. 제1군은 요동 지역 주요 산성에 배치하여 양광이 거느린 수나라 본대(本隊)의 발목을 잡고 있다. 제2군은 *식성군(息城郡) 회현(回峴)에 배치되어 살수를 지키고 있고, 제3군은 개천(价川)의 *태백산 자락인 건지산(乾芝山)에 배치하였다. 제4군은 평양 외곽에 있는 *숙주성(肅州城)에 배치했고, 본대인 제5군은 평양성을 지키고 있다.



이미 우리의 2군과 3군은 살수와 압록수 양안(兩岸)에 대군을 주둔시켜 놓았다. 철갑중기병대(鐵甲重騎兵隊)는 주로 두 강의 남쪽에 배치했다. 수나라 별동대가 강 근처에 나타나면 뒤에서 기병대가 오랑캐들을 강으로 몰아넣을 것이며, 오랑캐들이 강을 건너려고 할 때 남서 양쪽에 매복해 있는 10만의 아군이 화살을 날릴 것이다. 군사 한 사람이 최소 오십 발을 쏘면 대략 5백만 발의 화살이 오랑캐들의 심장을 꿰뚫게 된다. 다행히 강을 건너간 오랑캐들은 건너편에서 기다리고 있는 우리 고구려 전사들의 먹이가 될 것이다. 짐의 계산대로라면 오랑캐 대부분이 살수에서 목숨을 잃게 된다. 수나라 오랑캐들이 우리의 영토를 들어올 때는 쉬웠겠지만, 돌아갈 때는 지옥으로 직행하는 저승길이 될 것이다.



다음은 고등 대모달의 질문에 대해 답변하겠다. 우리 군이 살수에서 대승을 거둔다면, 요동에 있는 허룹숭이 양광은 충격을 받고 돌아갈 수도 있을 것이다. 짐은 이번 전쟁의 승부를 살수에서 내려고 한다. 용케 살아서 도망치는 잔당들이 있다면 압록수에서 결정타를 날릴 예정이다. 두 지역에서는 치고 빠지는 전술이 아니라 정면 대결로 오랑캐들을 어육으로 만들 것이다. 짐은 오랑캐 단 한 놈도 살아서 돌아가는 것을 절대로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이번 전쟁의 결과는 천년만년 청사(靑史)에 길이 남아 배달민족의 후손들에게 자부심을 안겨 줄 것이고, 음흉한 오랑캐들에게는 영원히 씻을 수 없는 치욕이 될 것이다. 여러 장수는 짐의 뜻을 깊이 이해하고 따라 주길 바란다.”



* 식성군 – 현재 평안도 안주군(安州郡)

* 태백산 - 묘향산의 옛 이름

* 숙주성 – 평안도 평원군 지역에 있던 성(城)



태왕의 확고부동한 응답에 여러 장수는 더는 할 말이 없었다. 작전 회의를 마치자 모두 임지로 달려갔고, 태왕의 지령이 담긴 밀지를 발에 매단 전서구(傳書鳩) 수십여 마리가 북쪽을 향해 솟구쳐 날아올랐다.



“태왕 폐하의 지시대로 소관이 세 아들에게 아군의 공격 시점과 지점 등을 자세히 알려주었습니다.”

작전 회의가 끝난 뒤에 을지문덕과 웅록이 별도로 태왕을 알현했다.



“웅록 부관, 그대는 자랑스러운 고구려의 어머니로다. ‘난세(亂世)에 반드시 영웅이 난다.’는 선현들의 말이 과연 맞는구나. 짐은 그대를 보면 연민의 정과 동시에 대견함을 느낀다. 이번에 그대가 큰 공을 세웠다. 참으로 장하다. 전쟁이 끝날 때까지 최선을 다해주기 바란다. 그리고 전투 중에 다치지 않도록 조심하라. 웅부관은 조국을 위해 할 일이 많은 사람이다.”



태왕은 웅록의 가녀린 손을 잡아주었다. 웅록은 태왕의 치하에 그만 눈물을 쏟고 말았다. 태왕이 웅록에게 손수건을 건넸다. 옆에 서 있던 을지문덕은 헛기침하며, 어색한 분위기를 달래려고 애썼다. 일개 참모가 태왕에게 치하를 듣는 일은 거의 없었다.



“폐하, 이 길로 웅록 부관과 곧장 살수로 달려가겠습니다. 폐하의 지엄하신 명령대로 오랑캐들을 섬멸할 것입니다.”



“짐은 을지 장군과 웅부관을 믿습니다.”



태왕의 목소리도 가라앉아 있었다. 을지문덕과 웅록이 기마대 수천 명을 이끌고 북녘을 향해 달렸다. 태왕은 망루(望樓)에 올라 전장으로 달려가는 을지문덕의 군대를 바라보며 손을 흔들었다. 집무실로 돌아온 태왕은 아우 고건무에게 평양성으로 통하는 물길과 육로에 군사들을 매복시키도록 했다.



태왕은 지난번에 대패하고 물러간 내호아 군대가 다시 평양성을 급습할 수도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내호아가 우중문과 연계한다면 평양성을 방어하는 고구려군에게 엄청난 부담이 된다. 이제 모든 것은 하늘이 알아서 판단할 차례였다. 평양의 하늘은 이상하리만치 청명하고 높았으며, 무심한 구름만 흐르고 있을 뿐이었다.



평양성은 성을 방위하는 병력 일부만 남아있는 위험한 상태였다. 도성에 거주하는 백성들은 평양성 밖 30리 지점에 수나라 별동대가 진을 치고 있다는 말에 가슴을 졸여야 했다. 태왕이 피난을 가지 않고 도성에 남아 굳건한 의지를 보여주자 백성들은 태왕을 뜻을 지지하며 남녀노소가 필승의 의지를 불태웠다.



노인들과 아녀자들은 만일 수나라 군대가 평양성으로 진격해 온다면 창칼을 들고 맞서 싸울 각오를 하고 있었다. 백성들은 전시를 대비하여 수시로 기초 군사훈련을 수행했다. 아녀자들도 창칼을 다루고 활을 쏠 줄 알았으며, 당장 차출되어 전선에 투입되어도 능히 전사로 제 역할을 할 준비가 되어있었다.



비상시를 대비하여 집집마다 병장기가 비치되어 있었으며, 각종 조직에 가담하여 언제든 출동할 태세가 된 상태였다. 또한, 연로한 남자들도 나라의 부름이 있으면 지게를 지고 나가 병장기나 군수 물품을 나를 수 있는 상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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