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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재효 Jan 28. 2024

녹족부인



(18) 여수장우중문






戰勝功旣高(전승공기고) - 그대가 싸움마다 이겨 군공(軍功) 이미 높으니 잠시 차 한잔을 마시고 가벼운 체조를 마친 을지문덕이 다시 붓에 먹물을 묻혔다. 웅록은 다시 한번 가슴을 졸이며 그의 붓끝을 응시하였다.



전구(轉句)를 써 내려가는 그의 손이 약간 떨리는 듯했다. 웅록은 전구를 쓰고 잠시 창밖을 응시하는 을지문덕을 위해 얼른 빈 찻잔에 찻물을 부었다. 두 사람의 시선이 순간 일직선이 되었고 웅록의 얼굴이 붉게 물들며 심장이 요동쳤다.



‘아-, 내가 왜 이럴까? 여태껏 한 번도 이런 적이 없었는데, 참으로 이상한 일도 다 있구나.’

을지문덕은 묘한 감정을 진정시키느라 애를 썼다.



“웅부관, 기승전구는 그런대로 괜찮은 듯한데, 결구를 어찌 쓰면 좋을까?”



“천문지리에 통달하신 분은 우중문이 아니라 바로 장군님이십니다. 장군님은 이 전쟁의 결말이 어떻게 될지 이미 다 알고 계십니다. 기문둔갑술을 자유자재로 응용하시는 장군님의 하해와 같은 지혜를 어찌 민충한 일개 부관이 알 수 있겠습니까?”

웅록이 어렵게 말을 마치고 고개를 숙였다.



“자네도 병법에 대하여 상당한 수준의 실력을 지니고 있는데, 오늘은 너무 겸손하네그려. 자네의 의지도 이 시문에 담고 싶어서 그러네.”



을지문덕이 웅록이 답변이 있을 때까지 잠자고 앉아서 또 창밖을 응시했다. 군 막사의 창은 어른 팔 길이 크기로 네모난 구멍 두 개가 나 있었다. 웅록은 두 번씩 우중문을 만나 그의 품성(稟性)을 어느 정도는 감을 잡고 있었다. 을지문덕이 바로 그런 점을 고려하여 시문의 결구에 웅록의 의견을 반영하고 싶어 했다.



“장군님, 우중문에게 빨리 도망치라고 하세요. 그렇지 않으면 오랑캐들 모두가 우리 군사들의 창칼에 어육이 될 수 있다는 뜻도 은연중에 넣으시고요.”


“알겠네. 좋은 생각일세. 기승전결의 품위를 살려서 그리 써봄세.”



을지문덕이 다시 붓을 들었다. 웅록은 먹을 갈면서도 시선은 붓끝에 고정되었다. 을지문덕의 오른손에 힘이 들어가더니 일필휘지로 마무리하였다. 오언고시로 시 짓기를 마친 을지문덕의 이마에 땀방울이 송알송알 맺혀 있었다.



知足願云止(지족원운지) - 만족함을 알고 이제 싸움을 그만두기 바라노라



“장군님, 명문입니다. 제갈량의 출사표(出師表)는 감히 근처에도 올 수 없습니다. 귀신이 놀라고 하늘이 경기(驚氣)를 할 정도입니다. 곰 같은 우중문이나 여우 같은 우문술이 장군님의 오언고시를 읽으면 정신이 혼미하고, 무엇을 어찌할 줄 모르고 지리산가리산할 것 같습니다. 그자들이 허둥대는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웅록은 을지문덕의 시문에 경탄하며 손수건을 들여 그의 이마에 솟은 땀을 닦았다. 마치 정겨운 연인의 모습이었다. 사람이 사는 땅이 스스로 돌고 돌아 밤과 낮이 생기고 계절이 생기게 마련이었다. 특히, 북쪽 하늘에 자리한 북극성과 북두칠성 등을 포함하는 삼원(三垣)의 움직임에 따라 발생하는 기운이 연월일시(年月日時) 매 순간 달라지는데, 이때 그 기운이 사람에게 영향을 탐구하는 것이 기문둔갑술이다. 그러므로 기문둔갑은 천시(天時), 지리(地理), 인화(人和)가 조화를 이루어 만들어내는 비술인 것이다. 촉한 유비의 군사(軍師) 제갈공명은 기문둔갑을 이용한 포진법(布陣法)을 써서 싸울 때마다 승리했다.



요동 대본영에서 전쟁을 지휘하는 수나라 황제 양광은 평양성으로 급파한 별동대가 이렇다 할 성과도 없이 지지부진한 상태에 머물러 있자 노발대발하였다. 그는 적어도 한 달 반 안으로 우중문이 승전보를 보내올 것으로 기대하고 있었다. 양광은 군부를 압박하며 조속히 평양성을 점령하라고 채근했다.



내호아가 이끄는 해군이 바닷길을 통해 먼저 평양성 인근에 도착했지만, 우중문이 이끄는 별동대를 기다리지 못하고 별도로 작전을 펼치다 군사 4만여 명을 잃자 양광은 내호아를 죽이려 했다. 신하들의 만류로 겨우 목숨을 부지한 내호아는 우중문에게서 평양성으로 오라는 연락을 받았지만, 그는 움직일 수 없었다.



수나라 해군이 고구려 태왕의 아우 고건무에게 혼이 나고 사기도 땅에 떨어져 있는 상태였으며, 고구려군의 빈번한 기습으로 보급로도 끊긴 상태로 섬에 갇혀 있어야 했다. 고구려 태왕은 수나라 별동대를 최대한 평양성 가까이 끌어들여 최후의 일격을 가하려는 을지문덕의 작전을 전적으로 지지하고 있었다. 그는 거짓 항복문서까지 작성하여 을지문덕에게 건네며 고구려의 운명을 걸었다.



세작들에 의해 매일 보고되는 수나라 별동대의 상황을 접하면서 태왕은 이번 작전이 상당한 위험이 따르지만, 고구려군이 승리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장군님, 다녀오겠습니다.”


“무사히 다녀와야 하네. 답장은 받아올 필요 없네. 그 서신만 우중문에게 건네고 돌아오면 되는 것이네.”



“장군의 명을 받잡겠습니다. 장군님, 소관의 절을 받으십시오.”


“아니, 왜 그러는가? 다시는 못 볼 사람처럼 말이야. 이러지 마시게.”



을지문덕이 웅록을 일으켜 세우려고 했으나, 그는 말을 듣지 않고 기어이 을지문덕에게 절을 하였다. 전장의 상황은 시시각각으로 변하기 때문에 웅록은 다시는 상관인 을지문덕을 보지 못할 수도 있다는 불길한 예감이 스쳤다.



‘장군님, 지난밤에 소관에게 베풀어주신 하해와 같은 은혜를 죽는 날까지 잊지 못할 것입니다. 행여, 소관이 다시 장군님을 뵙지 못하는 일이 생기더라도 장군님을 원망하지 않겠습니다. 그동안 여자라는 신분을 감추고 지내면서 받았던 압박감을 어제 훌훌 털어버렸습니다. 다시 돌아올 수 있다면 잠시라도 장군님을 정성껏 모시도록 하겠습니다.’



“장군님, 다녀오겠습니다.”


“웅부관, 기다리고 있겠네.”



아침 해가 뜰 무렵 웅록이 호위무사 두 명과 말에 올랐다. 그의 품속에는 을지문덕이 지은 ‘여수장우중문(與隨將于仲文)’이라 제목의 시 한 수가 들어있었다. 을지문덕과 군부 고위 인사들은 성루에 서서 먼지를 날리며 수나라 진영으로 떠나는 웅록 일행을 바라보았다. 수나라 별동대가 있는 진영까지 말을 빨리 달리면 한 시진(時辰) 내로 도달할 수 있는 거리였다.



고구려 태왕과 군 지휘부는 대성산 아래 안학궁(安鶴宮)을 나와 보통강이 자연스럽게 해자(垓字) 역할을 하는 한성에 머물고 있었다. 이곳은 수나라 30만 별동대가 몰려와도 충분히 막아낼 수 있는 천연 요새였다. 안학궁을 감싸고 있는 평양성도 철옹성이지만 전투를 지휘하는 데는 이곳이 더 유리했다. 을지문덕은 우중문에게 보내는 시를 웅록에게 건네기 전에 태왕에게 보였다. 태왕도 을지문덕의 시문을 보고 감탄하며, 우중문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무척 궁금해했다.



“저기 누가 온다.”


“저들이 고구려라고 쓴 깃발을 들고 있는 것을 보니 고구려군이 틀림없다.”



별동대 군영 입구를 지키던 수나라군 보초병들이 웅록 일행이 달려오는 것을 보고 소리쳤다. 초병은 즉시 우중문에게 달려가 고구려군 진영에서 보낸 사자(使者)가 온다고 보고하였다.



“그럼, 그렇지. 내가 뭐라고 했어. 고구려 태왕이 사람을 보낼 거라 하지 않았나?”



우중문과 우문술은 아침 식사를 마치고 휘하 장수들과 차를 마시고 있었다. 그는 초병이 고구려에서 사람이 왔다는 말에 더욱 기고만장하여 우쭐거렸다. 우문술은 쓸데없이 헛기침만 해대며 우중문의 눈치를 살폈고, 간밤에 마신 술이 덜 깬 유사룡은 두 눈만 껌뻑거리며 씁쓸한 차를 억지로 마셨다.



“과연, 우익위대장군이십니다.”


“우익위대장군께서는 귀신보다 한 수 위에 계십니다.”



“대장군, 선발대가 온 것을 보니 고구려 태왕이 신하들과 곧 도착할 것입니다. 평양성으로 납실 채비하시지요. 소장들이 두 분 대장군님을 호종하겠습니다.”


“아닙니다. 두 분 대장군은 벌써 소장이 호위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우중문 휘하의 장군들이 서로 잘 보이기 위해 충성 경쟁을 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녹족 삼 형제는 속으로 웃고 있었다. 잠시 후 초병들이 웅록 일행을 데리고 우중문 일행이 있는 본영 막사로 들어섰다. 웅록이 막사 안으로 들어서자 통역사 진진 제일 반가워했다.



“웅부관, 반가워요. 웅부관은 점점 예뻐지는구려. 고구려 사내들은 얼굴도 곱고 몸매도 또한 날렵하니, 도대체 무얼 먹어서 그런지 모르겠네요. 나는 갈수록 뚱뚱해져 걱정인데. 자자, 우익위, 좌익위 두 분 대장군님에게 인사부터 올리시오.”



웅록 일행이 우중문과 우문술에게 허리 굽혀 정중하게 인사를 하고 기타 장수들에게는 눈인사로 대신했다. 인사를 받는 중에도 우중문은 웅록을 아래위로 훑어보았다. 다른 장수들도 화사한 얼굴의 웅록을 신기한 듯 바라보았다. 다만, 녹족 삼 형제만 행여 우중문이나 다른 장수들이 웅록에게 이상한 농(弄)을 걸지 않을까 가슴을 졸였다.



“웅부관이라했던가? 그대와 내가 벌써 세 번이나 만나니 보통 인연이 아니오. 진진이 말처럼 고구려 사내들은 얼굴이 참으로 곱습니다. 고대원 태왕과 을지문덕이 이리로 오고 있지요?



우중문의 말에 웅록과 녹족 삼 형제는 또 한 번 가슴을 졸여야 했다. 웅록이 얼른 답변하지 못하자, 진진이 끼어들며 웅록을 안심시켰다.



“대장군, 물어보나 마나이지요. 곧 백기를 들고 고구려 만조백관과 몰려올 겁니다. 웅부관은 늘 미리 달려와 보고하는 직분이니, 기다려 보시지요.”


웅록은 진진이 고마웠지만, 우중문이 자꾸만 곤란한 질문을 할 것만 같아 엉뚱한 답변을 하였다.



“소관은 대장군께 전하는 서신을 가져왔을 뿐입니다.”


“뭐라, 서신이라고? 고구려 왕은 매번 서신만 보내니 무슨 꿍꿍이인가? 이번에는 또 무슨 서신인가? 고구려 왕비가 혹시 나에게 연서(戀書)라도 보낸 겐가? 아니면 딱딱한 어조의 재미없는 문서인가? 참으로 알 수 없는 노릇이로다.”



웅록이 품 안에서 서신을 꺼내 우중문에게 건넸다. 웅록은 서신을 건네고 세 아들을 흘낏 바라보았다. 일록, 삼록, 구록이 웅록과 시선이 마주치자 얼른 고개 숙여 인사를 주고받았다. 다른 장수들은 네 모자가 전광석화처럼 인사하는 장면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어머님, 이 위험한 곳에 또 오셨군요. 우중문이를 조심하셔야 합니다.’


일록이 무언(無言)의 인사말을 전했다.



‘어머님, 소자들은 잘 있습니다. 저희 형제는 어머님 명령만 기다리고 있습니다.’


삼록이 눈자위가 벌겋게 변하면서 웅록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어머니, 이번에는 어떤 일로 오셨는지 모르지만 일을 무사히 마치시고 돌아가셔야 합니다. 간밤에도 어머님이 보낸 고구려 첩자들과 만나 향후 세부적인 사항을 전달받았습니다. 오늘 아침에 두 형님에게도 알렸습니다. 항상 건강하셔야 합니다.’



구록이 웅록을 보고 있다가 뒤돌아서서 조용히 눈물을 닦았다. 옆에 있던 한 장수가 구록의 행동에 고개를 갸우뚱거리기도 했다.



“이게 도대체 무슨 내용인가? 을지문덕이가 쓴 시문(詩文) 같은데, 나는 시문(詩文)에는 까막눈이라 이 뜻을 잘 모르겠도다. 제목은 나에게 보낸다는 뜻인데, 본문은 도대체 무슨 귀신이 지청구해대는 소린지 원. 누가 이 글을 보고 뜻을 풀이해봐라.”



우중문이 떨떠름한 표정을 짓자 우문술이 얼른 서신을 받아 읽어보았다. 그 역시 한참 동안 그 서신을 읽고 또 읽어보았으나 고개만 좌우로 돌릴 뿐이었다. 일록이 직속 상관인 우문술의 반응을 주시했다.



‘이글은 우중문이를 한껏 띄우다가 조롱하는 문장이로다. 첫 번째 행 속에 쓰인 신책(神策), 천문(天文)과 두 번째 행의 궁지리(窮地理)라는 시어(詩語)를 보니 을지문덕이 이미 기문둔갑술에 도통했다는 증좌로다.



이거 큰일 났구나. 마지막 행인 ’지족원운지(知足願云止)‘는 우리에게 보내는 경고로다. 우리 별동대가 그만 물러가지 않으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내용이 틀림없다. 아아, 무서운 시문이다. 빨리 퇴각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린 을지문덕이 이끄는 고구려군에게 전멸당할 수 있다. 그러나 까막눈을 가진 저 미련퉁이 우중문이 놈은 시문에 숨은 뜻을 모르고 있으니 문제로다. 유사룡이가 이것을 보고 을지문덕의 의중을 간파해야 한다. 우중문이에게 내 뜻을 말해도 무시할 게 뻔하다.’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우문술은 똥 마려운 강아지처럼 좌불안석이었다. 자리에서 일어났다가 앉기를 반복하면서 발을 떨기도 하고 괜히 헛기침해대며, 우중문을 쳐다보았다.



“좌익위대장군은 왜 그러시오? 아침에 뭘 잘못 먹은 게요? 내 눈치를 살살 보지만 말고 나에게 할 말이 있으면 사내답게 당당하게 하시오.”


우중문이 인상을 찡그리면서 우문술을 깔보듯 말했다.



“이 서신은 아무래도 우리 진영에서 가장 박식하고 학문의 깊이를 알 수 없는 유사룡 위무사께서 읽어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나도 시문에는 문외한이라 이 서신의 내용을 정확히 모르겠소이다. 하지만 내가 해석하기에는 빨리 철군하는 게 좋을 것 같소이다.”



우문술의 말에 잠자코 앉아 있던 유사룡이 거만한 태도로 서신을 받아들고 읽기 시작했다. 서신을 읽는 유사룡의 얼굴에 웃음기가 번지면서 고개를 끄덕거렸다. 우중문을 비롯한 막사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이 유사룡의 입에서 어떤 말이 나올지 무척 궁금해했다.



“우익위대장군, 기뻐하시오. 고구려 태왕과 을지문덕이 곧 이리로 온다고 합니다.”

유사룡의 말에 우중문은 손뼉을 쳐댔다.



“역시, 역시 공부를 많이 한 사람은 다릅니다그려. 위무사께서는 조정의 고위직에 있지만, 수나라에서 제일가는 천문지리의 대가입니다.



그 시문의 전체 내용을 내가 알기 쉽게 풀어서 말해보시오. 고구려 태왕이 나를 영접하러 오기 전에 그 시문의 뜻을 알아야겠소이다. 그래야 고구려 태왕을 만나면 아는 척을 해야 하잖소.”



유사룡과 우중문의 말에 웅록은 하마터면 웃음을 터트릴 뻔했다. 웅록은 억지로 웃음을 참으려고 혀를 깨물기도 했다. 녹족 삼 형제도 허벅지를 꼬집어가며 웃음을 참느라 무진히 애를 써야 했다. 우문술은 낯빛이 흑색이 되어 멍하니 앉아 있었는데 그의 눈동자는 촛점을 잃은 상태였다



“그럼, 내가 을지문덕이 우익대장군에게 보낸 ‘여수장우중문’이란 제목의 오언고시를 풀이할 테니 잘 들어보시오. 아, 다른 장수들도 내가 풀이하는 시문을 잘 들어보시구려. 에헴-.”



유사룡이 점잔을 빼면서 입을 열었다. 기구인 神策究天文(신책구천문)을 유사룡은 ‘우중문 우익위대장군이 귀신도 곡(哭)할 정도의 뛰어난 전술로 고구려군을 싸울 때마다 물리쳤으니, 하늘의 이치를 아는 유능한 장수이다. 승구의 妙算窮地理(묘산궁지리)는 우중문 대장군의 정확하고 빈틈없는 계산은 땅의 귀신들도 탄복하였다.



전구로 쓴 戰勝功旣高(전승공기고)는 우중문의 별동대가 압록수를 넘으며, 고구려군과 싸워 매번 필승하였으니 이미 전공은 하늘에 닿았다.



유사룡은 마지막 결구가 정말로 시문의 요체(要諦)가 함축적으로 묘사되어 있다면서 뜸을 들이더니 풀이를 이어나갔다. 知足願云止(지족원운지)는 고구려군은 수나라의 30만 별동대가 빛나는 전술이 있음에도 즉시 쳐들어오지 않고 평양성 30리 밖에서 기다려주는 자비로운 배려에 감복하니, 바라건대 이제 싸움을 그만하겠다. 을지문덕의 시문은 ’고구려군이 전쟁을 그만두고 태왕이 항복하러 오겠다‘는 뜻이라고 힘주어 강조했다.



유사룡은 자신의 해석에 스스로도 만족하는 듯 체머리를 떨어가며 히죽거렸다. 웅록은 또 웃음을 참기 위해 혀를 깨물어야 했고, 그의 아들 삼 형제도 또 한 번 허벅지를 꼬집어야 했다.



“과연, 유사룡 상서우승께서는 대제국 수나라를 대표하는 문장가며, 예언가입니다. 나의 의중뿐만 아니라 고구려 태왕의 속까지 훤히 꿰뚫고 있으니, 천만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하는 태산 같은 귀재(鬼才)가 틀림없소이다. 그러니 황제 폐하께서 우리 별동대에 위무사로 보내셨지요. 자자, 항복문서는 이미 받았으니 우리는 고구려 태왕이 제 발로 걸어올 때까지 술이나 한잔하면서 느긋한 마음으로 기다려 봅시다. 웅부관도 오느라 고생했으니, 그만 물러가 잠시 쉬시구려.”


우중문은 인자한 얼굴로 웅록 일행을 격려했다.



“아닙니다. 태왕께서 오시려면 길을 잘 아는 소관이 달려가 안내를 해야 합니다. 냉수 한잔 마시고 다녀오겠습니다.”



“그럼, 그리하도록 해요.”



웅록이 우중문의 본영 막사에서 나와 별도의 장소로 자리를 옮겼다. 우중문의 본영 막사는 금방 주연장으로 변했다. 무식한 휘하 장수들은 아침부터 술을 마셔대며 우중문의 탁월한 영도력을 칭찬하느라 바빴다.



풍악이 울리고 고구려 출신 무희들이 춤을 추며 분위기를 띄웠다. 우문술은 마지못해 주연장에 앉아 있었지만, 속이 쓰렸다. 녹족 삼 형제는 웅록이 걱정되었다. 그렇다고 삼 형제가 모두 웅록에 가면 의심을 맡을 것 같아 삼록이 주연 장의 분위기가 무르익을 무렵 슬그머니 자리를 떴다. 삼록은 자리를 뜨면서 일록과 구록에 눈을 찡끗했다. 진중에 풍악이 울리고 군관 이상의 모든 지휘관이 모여 술자리를 열자 병사들은 아연실색하였다.



“왕서방, 이게 지금 무슨 경우란 말인가? 병사들은 쫄쫄 굶어 죽어 나가는데, 이른 아침부터 군관들은 술타령이라니, 기가 막히는구먼.”



“위서방, 우리 이러다가 어떻게 되는 거 아녀?”


“곧 고구려 태왕이 정식으로 항복하러 이곳으로 온다는구먼,”



“혹시, 고구려놈들이 간계를 부리는 게 아닌지 몰라.”


“고구려군 총사령관이신 을지문덕 장군님께서 시를 보내왔대. 그 시에 그리 쓰여 있다는군. 우리같이 글자를 모르는 무지렁이들이야 뭘 알겠는가?”



“아니고 배고파 죽겠네. 병사들은 죽어 나가는데, 저놈들은 아침부터 술타령이라니, 벼락을 맞아 뒈질 놈들이다.”



병사들은 삼삼오오 모여 웅성거렸다. 아침부터 들려오는 풍악 소리에 그만 군대의 기강은 사라졌고, 굶주린 병사들은 먹을 것을 구하러 산과 들로 뛰쳐나갔다. 그들이 진영을 빠져나가도 누구 한 사람 제지하거나 뭐라고 하지 않았다.



“어머니, 빨리 이곳을 빠져나가야 합니다.”



웅록은 아들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잠시 후에 삼록이 나타나자 웅록은 아들을 끌어안고 등을 다독거렸다.



“너희들은 잠시 밖을 경계하거라. 아무도 들어오게 해선 안 된다.”



웅록이 함께 온 호위무사 두 명에게 지시하였다. 웅록은 신속하게 삼록에게 특급지령을 내려야 했다.



“어머니, 시간이 없습니다.”



“삼록아, 어젯밤에 고구려 첩자가 전한 태왕의 밀지(密旨)를 받아봤겠지만, 곧 고구려군의 대반격이 시작될 것이다. 무식한 우중문과 별동대는 공황에 빠져 도망가기 바쁠 것이다. 너희 삼 형제는 별동대들이 살수와 압록수를 건너갈 때 별동대들의 이동 방향을 고구려군이 매복한 지점으로 유도해야 한다.


살수에서 일차로 대대적인 공격이 있을 것이고, 살아서 도망친 자들을 대상으로 압록수에서 두 번째 대공세가 있을 것이다. 나는 너희 형제를 믿는다. 너희들 뿌리는 고구려라는 것을 잠시도 잊어선 안 된다. 자, 이 작전 지도를 보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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