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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재효 Jan 28. 2024

녹족부인






(17) 평양성 삼십 리 밖






행군이 멈추고 잠시 쉬는 틈을 이용해 상태가 안 좋은 병사들은 풀숲이나 숲속에 아무렇게나 누워 주린 배를 쥐어 잡고 고통스러워했다. 다른 병사들은 들로 산으로 퍼져서 먹을 것을 찾느라 야단이었다.



들판에는 고구려군이 미처 제거하지 못한 곡식이 약간 남아있었다. 병사들이 날곡식을 뜯어 입안에 쑤셔 넣느라 제정신이 아니었다. 콩 껍질도 까지 않고 날로 먹다가 캑캑거리는 병사, 누렇게 말라 죽은 채소 잎사귀를 입에 넣고 질겅질겅 씹는 병사, 반쯤 썩어 문드러진 호박을 우걱우걱 씹어먹는 병사 등 들판과 야산에 병사들이 새카맣게 퍼져 진풍경을 연출했다.



“고구려 호박은 구린내 나는 것도 맛이 있다.”

“비릿한 콩과 콩잎도 먹을 만하다.”



“나무 속껍질도 달착지근한 게 먹을 만하다.”

“고구려 태왕이 항복했다는데 왜 여기서 행군을 멈추는 것일까? 빨리 평양성으로 달려가지 않고. 그곳에는 먹을 게 산더미처럼 쌓여 있다는데.”

“그러게. 두 분 대장군의 속을 알 수가 없으니 답답하구먼.”



병사들이 모여 잡담을 늘어놓고 있었다. 병사들은 대부분 바싹 마른 나무토막처럼 피골이 맞닿은 상태였다. 그들은 먹을 것 이외에 아무것도 바라는 게 없었다.



“나는 열흘 동안 물만 마시고 버티고 있네. 이제 가라고 해도 더는 걸 수가 없어. 때려죽인다고 해도 못가.”



“나는 지금이 밤인지 낮인지 분간이 안 가네. 밥 구경 못 한 지 보름이 넘었어. 물하고 나무껍질로 겨우 연명은 하고 있는데, 먹은 게 없으니 눈도 침침하고 귓속에서 윙윙거리는 소리가 끊임없이 나네. 오줌똥 싸본 지가 언제인지 몰라.”



“고구려 태왕이 정말로 항복한 게 맞기는 한 것인가?”

“나는 고구려 왕이 보냈다는 항복문서를 믿을 수 없네. 내 생각에는 고구려군이 우리 별동대를 유인하려는 술책 같아. 아무래도 좌, 우익위대장군들이 고구려 태왕에게 속고 있는 게 틀림없어.”


“우리 별동대들이 저 패강에 물고기 밥이 되는 거 아닌지 몰라.”



별동대 병사들의 사기는 찾아볼 수 없었다. 한 달 가까이 굶은 병사들에게 고구려군을 상대로 전투를 하라는 명령은 무리였고 더는 먹혀들지 않았다. 물과 풀 그리고 나무속 껍질을 벗겨 먹으며 죽음의 행진을 하는 수나라 별동대는 겨우 목숨을 부지하며 우중문의 명령을 수행하고 있을 뿐이었다. 범처럼 날래고 용맹한 고구려 군사 한 명을 별동대 열 명이 달려들어도 당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우리가 평양성 밖 삼십 리까지 왔습니다. 이제부터 우리 자랑스러운 수나라 별동대가 어떻게 해야 할지 여러 장수의 의견을 듣고자 작전 회의를 하게 되었습니다. 아마도 오늘 늦게나 내일쯤이면 고구려 태왕이 고구려의 만조백관을 거느리고 우리를 마중 나올 것입니다. 해서, 나는 그때까지 이곳에 군영을 설치하고 기다리고자 합니다. 다른 분들의 의견은 어떤지 궁금합니다.”



우중문이 여러 장수를 향해 자신의 의견을 말했다. 회의가 열리는 막사 안에 침묵이 흘렀다. 여러 장수는 서로 눈치만 볼 뿐 누구도 말을 꺼내지 않았다. 괜히 말 한마디 잘못했다가 우중문에게 질책을 당할까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에헴-, 내가 우익위대장군께 한 말씀 드리겠소.”



위무사 유사룡이 침묵을 깼다. 그의 강력한 권고로 지난번에 별동대 군영에 찾아온 을지문덕을 방면케 한 일로 유사룡은 의기소침해 있었다. 돌아가는 을지문덕을 추격했던 별동대 병사들이 죽자 유사룡은 상당히 곤란한 처지가 되었다. 수나라 진영 내에서는 유사룡이 고의로 을지문덕을 놓아주게 했다는 비판과 함께 고구려군을 이롭게 했다며 그를 참수해야 한다는 소리가 높았다. 그 일이 있은 뒤로 유사룡은 될 수 있으면 언행을 조심하며, 여러 장수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그러나 황제의 명을 받고 파견된 위무사란 직책이 있고 수나라 조정의 상서우승이란 벼슬을 하고 있는지라 우중문은 그를 어찌하지 못했다.



‘저자가 또 무슨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를 하려고 그러나?’

‘저놈 때문에 다잡은 을지문덕이를 놓쳤다. 저놈은 도대체 수나라 사람이냐? 아니면 고구려 첩자냐? 참으로 알 수 없는 자로다.’

우중문과 우문술은 유사룡을 노려보았다.



“위무사에게 좋은 의견이 있나 봅니다. 말씀해보세요.”

우중문이 야지랑스럽게 촐싹대는 유사룡에게 발언권을 주었다.



“우리 별동대가 평양성 밖 삼십 리 지점에서 진을 치고서 고구려 태왕이 영접하러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다는 게 좀 우습습니다. 내가 별동대를 대표하여 평양성을 방문해서 고구려 태왕을 이곳까지 데리고 오면 어떻겠습니까?”



“그것도 괜찮은 방법입니다. 유 위무사께서 평양성의 동태를 살필 겸 해서 다녀오는 것도 퍽 나쁘지는 않다고 봅니다. 그리하시지요?”



한시가 급한 우문술이 유사룡의 의견을 지지하고 나섰다. 우문술은 이곳에서 별동대가 병영을 꾸리고 기다리고 있다가 행여 고구려군의 기습을 받으면 전멸을 당할 수도 있다고 우려하고 있었다.



“소장은 반대입니다.”

우문술의 좌장인 일록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아니, 저놈이 직속 상관인 나의 의견에 정면으로 반대해? 지난번에도 공개석상에서 나를 우습게 만들더니, 오늘 또 나를 바보로 만들 셈이야?’

우문술은 일록의 반대 입장에 하늘이 노래지는 것을 봐야 했다.



“오호-, 번일록 좌장이 요즘 제법 말을 할 줄 아는구려. 어디 말해보시오.”



우중문은 우문술의 좌장이 일어서자 얼른 발언권을 부여했다. 여러 장수는 그의 입에서 어떤 말이 나올까 기대 반 우려 반으로 그를 응시했다. 일록의 두 아우도 형이 엉뚱한 소리를 하지나 않을까 우려하는 눈치였다.



“우리 수나라가 고구려 태왕을 모셔다 놓고 엎드려 절을 받는 유치한 짓은 만천하에 비웃음을 살 수 있습니다. 저들이 스스로 우리 진영으로 올 때까지 기다려야 합니다. 아마도 황제 폐하께서도 그리하는 것을 더 좋아하실 겁니다. 대국인 우리 수나라가 항복한 나라 왕을 찾아가는 일은 어불성설입니다.”

일록이 황제를 언급하자 여러 장수는 눈을 내리깔았다.



“맞습니다. 대국이 어찌 항복하는 소국(小國)을 찾아가 마치 구걸하듯 하는 행동은 비열하기 그지없습니다. 고구려 태왕이 찾아올 때까지 기다려야 합니다. 그사이에 우리 별동대는 내호아 장군이 이끄는 해군과 접촉하여 군량미를 보급받아야 합니다. 시간은 이제 우리 수나라 편입니다.”

일록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삼록이 우중문과 여러 장수를 바라보며 소리쳤다.



“당연합니다. 우리 수나라 별동대가 수많은 희생을 감내하면서 이곳까지 힘들게 왔습니다. 고구려 태왕의 항복문서까지 받은 상태입니다. 남진하면서 주변을 살펴보니 고구려군은 모두 어디론가 도망쳐 버리고 산야(山野)에는 쥐새끼 한 마리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우리는 대국의 위엄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소장이 판단하기로는 하루 이틀 안으로 반드시 고구려 태왕이나 을지문덕 장군께서 우리 병영으로 오실 것입니다. 기다려야 합니다. 전쟁의 종결을 앞두고 바람난 계집애들처럼 엉덩이가 가벼우면 절대 안 됩니다. 무조건 기다리는 게 상책(上策)이고, 우리 수나라 측에서 찾아가는 것은 실효성 없는 하책(下策)이라 봅니다.”



이번에는 녹족 삼 형제의 막내며 우중문의 돌격대장인 구록이 열변을 토해냈다. 남산만 한 덩치에서 나오는 언변에 그만 여러 장수는 할 말을 잃은 듯했다. 그의 쾌변(快辯)에 우중문은 빙그레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여러 장수도 그가 우중문의 총애를 받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다른 분들은 할 말이 없습니까? 없으면 우리 수나라 별동대는 이곳에서 병영을 설치하고 기다리기로 하겠습니다. 여러 장수와 병사들은 그동안 밀린 빨래를 하고, 몸이 아픈 병사들을 돌보며, 나의 별도 지시가 있을 때까지 휴식을 취하기 바랍니다.”



우중문의 결단에 별동대는 쌍수(雙手)를 들어 환영하였다. 그러나 그는 병사들의 굶주림은 해결해주지 못했다. 병사들이 쫄쫄 굶고 있는 반면에 군관급 이상 여러 장수는 각자의 막사에서 술과 고기로 배를 채우며 여유를 부렸다. 별동대 병사들은 군 진영에서 나와 산과 들로 다니며 먹을 것을 구하느라 혈안이 되었다.



그들은 땅을 파서 뱀이나, 쥐, 개구리를 잡고, 개천이나 논의 도랑을 헤집으며 물고기를 잡았다. 그들이 잡은 물고기는 피라미나 송사리 또는 미꾸라지가 전부였다. 어쩌다 재수 좋으면 붕어나 잉어 새끼가 잡히기도 했다. 또한, 나무의 껍질을 벗겨내고 부드러운 속을 긁어내 주린 속을 달래야 했다. 그렇게 잡은 물고기나 나무속은 병사들의 빈 배 속을 채우지 못했다.



“장군님, 수군 진영에 파견되었던 세작들의 보고에 의하면, 우중문이 삼십 리 밖에 군영을 꾸리고 우리 쪽에서 사람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다고 합니다.”

웅록의 보고에 을지문덕은 미소를 머금었다.



“그래? 호로자식들이 드디어 미끼를 물었구나.”


“지난번 소관이 전한 항복문서가 제대로 효과를 발휘하는 것 같습니다.”


“맞아. 그때 웅록 부관이 수고했지. 내일 또 한 번 수고를 해줘야겠네.”




“한번이 아니고 백번이라도 좋습니다. 명령만 내려주십시오.”


“좋아. 나는 우중문에게 보낼 시를 한 편 구상하고 있네.”



사령관 막사 안에 을지문덕과 웅록 두 사람만 있었다. 이전에도 막사 안에 둘이 있을 경우가 종종 있었지만, 그때 을지문덕은 웅록에게 특별한 감정이 없었다. 그러나 이제는 을지문덕이 웅록을 대하는 감정이 예전 같지 않았다. 직속 부하이면서 여인으로 웅록을 보기 시작한 것이다.



을지문덕이 웅록보다 10년 연상이었다. 을지문덕이 직접 찻물을 끓여 차를 우렸다. 차를 우려내는 손놀림이 보통이 아니었다. 웅록은 신기한 듯 을지문덕의 행동을 유심히 관찰하였다. 찻잔에서 전해지는 따뜻한 온기가 두 사람의 가슴까지 덥히고 있었다.


“장군께서는 고구려에서 이름난 문장가 아닙니까? 그런데 무식한 오랑캐들이 장군님의 시문을 읽을 수 있을지 의심입니다.”



“우중문이나 우문술을 겨우 문자나 읽을 수준이고 유사룡이란 자는 제법 글줄깨나 읽은 자로 알고 있네, 그자라면 나의 의중을 알 수도 있을 것일세. 그 세 놈 다 까막눈이라면 어쩔 수 없는 일이지.



웅부관, 투구와 갑옷을 벗게. 이 막사 안에는 나의 허락 없이 아무도 못 들어온다는 것을 알지 않는가? 자네가 들어오고 나서 막사 밖에 있던 보초병들을 백 보 이상 떨어지게 했네.”



을지문덕의 말에 웅록이 배꼽을 잡았다. 영락없는 여인의 쾌활한 웃음소리였다. 을지문덕도 덩달아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웅록의 예쁜 얼굴을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그는 고구려 장군으로서 남정북벌하며, 전장(戰場)을 돌아다니느라 여러 해 동안 여인을 가까이할 여유가 없었다.



웅록은 아침에 눈 뜨면 잠자리에 들 때까지 거의 투구를 벗지 않았다. 그의 긴 머리가 행여 동료들에게 이상한 느낌이 들게 할까 우려해서였다. 웅록이 투구를 벗고 머리를 풀어헤쳤다. 갑옷까지 벗고 나니 붉은색 저고리 차림의 원숙한 여인이 수줍게 웃으며 을지문덕을 바라보았다. 을지문덕은 고개를 끄덕거리며 웅록에게 환한 미소로 답했다.



“장군님, 기대됩니다. 소관도 시문을 좋아합니다. 긴 문장의 율시보다 의미가 함축적이고 비유법(比喩法)이 내재한 절구(絶句)나 고시(古詩) 종류를 즐겨 읽습니다.”


“자네는 여인의 몸으로 무예뿐만 아니라 시문에도 일가견이 있구먼. 누구 시문을 즐겨 읽는가?”



을지문덕의 물음에 웅록이 잠시 두 눈을 지그시 감고 무엇을 생각하는 듯했다. 을지문덕은 찻잔을 잡고 웅록의 입에서 어떤 말이 나올지 기대했다.



公無渡河 공무도하

公竟渡河 공경도하


님아, 그 물을 건너지 마오

님은 기어코 물을 건너시고 말았네



늘 긴장감이 감돌던 을지문덕의 장군 막사에서 아름다운 여인의 노랫소리가 조용히 울려 퍼졌다. 을지문덕은 웅록의 진면목을 보고 있었다.



‘아-, 아름다운 여인이로다. 그동안 내가 옆에 진주를 두고도 알아보지 못했구나. 녹족부인이 부르는 이 노래는 조선시대 곽리자고(霍里子高)의 아내 여옥(麗玉)이 부른 노래 공무도하가(公無渡河歌)로다. 수나라 해적들에게 아들 아홉을 잃고 실의의 나날을 보내다가 화병으로 저승에 든 지아비를 그리는 노래로다. 녹족부인이 나에게 온 것은 고구려 천지신명의 계시가 틀림없다.’



을지문덕은 조용히 공무도하가를 노래하는 웅록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음정의 고저장단에 따라 그녀의 설움과 애환이 노래 속에 녹아내리고 있었다.



墮河而死 타하이사

當奈公何 당내공하


님께서 물에 빠져 돌아가시니

내 가신 님을 어찌할꼬



을지문덕은 웅록의 노래를 들으며, 어느덧 고향에 계신 노모(老母)와 아내를 떠올리며 지그시 두 눈을 감았다. 불철주야 자식과 남편의 무탈을 위해 천지신명께 치성을 올리고 있을 그리운 얼굴들이었다. 을지문덕은 웅록의 노래가 끝났지만, 눈을 뜨지 못했다. 노래를 마친 웅록이 살며시 을지문덕을 바라보았다.



그의 두 뺨 위로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웅록이 손수건을 꺼내 그 눈물을 닦아주었다. 여인의 손길이 뺨 위를 스칠 때 을지문덕은 눈을 번쩍 떴지만, 웅록과 시선이 마주치자 다시 눈을 감았다. 그리고 한동안 두 사람의 숨소리만 막사 안에 가득했다.



“웅부관이 그처럼 시문에 뛰어난지 몰랐네. 오늘부로 다시 그대를 보게 되었어. 화답으로 이번에는 내가 시 한 수 읊어보겠네.”



“어머나! 장군님, 기대됩니다.”

을지문덕이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翩翩黃鳥 편편황조

雌雄相依 자웅상의


훨훨 나는 꾀꼬리

암수가 서로 정다운데



을지문덕은 고구려 제2대 유리태왕(琉璃太王)이 지은 황조가를 노래했다. 이 노래의 소재는 꾀꼬리로 사랑하던 임을 잃은 외로움과 슬픔을 달래며, 인생의 무상함을 읊고 있다.



을지문덕은 노래하면서 고향에 두고 온 아내를, 그리고 동시에 지금 곁에 있는 웅록을 생각했다. 사나이의 웅장하면서도 섬세한 음성이 막사 안에 가득 찼다. 웅록은 을지문덕의 노래에 감정을 이입하며 빠져들었다.



念我之獨 염아지독

誰其與歸 수기여귀


외로운 이내 몸은

뉘와 함께 돌아갈꼬



유리왕의 두 왕비 치희(雉姬)와 화희(禾姬)는 유리왕을 사이에 두고 서로 질투하며 헐뜯다가 한나라 출신 치희가 친정으로 돌아갔다. 유리왕이 말을 달려 치희를 쫓아갔으나 그녀는 이미 한나라 땅으로 넘어간 뒤였다. 유리왕은 상심하여 돌아오는 길에 나무 위에서 정답게 지저귀는 꾀꼬리를 보고 자신의 심정을 노래했다.



을지문덕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웅록에 대한 연정(戀情)이 싹트고 있음을 느꼈지만, 함부로 말할 수 없었다. 두 사람은 전장에서 맺은 인연이기에 누가 언제 어떻게 될지 앞날을 장담할 수 없었다. 하지만 두 사람 사이에는 이심전심이 통하고 있었다.



“장군님, 고맙습니다. 육백 년 전에 그 노래를 지은 유리태왕의 깊은 속을 알 수는 없지만, 장군님의 속을 조금은 알 것도 같습니다.”



“그리 말하니 내가 괜히 쑥스럽구먼. 이제 우중문이에게 보낼 시를 써야겠네. 어제 그제 대충은 머릿속에서 지어보았네.”



“역시 장군님이세요. 제가 자리를 피해드릴까요? 저 때문에 창작하시는 데 방해가 될까 봐 그럽니다.”



“아니야. 부관이 내 곁에 있으면 나는 괜히 기분이 좋아지고, 일하는 게 즐겁다네. 내 옆에서 먹을 갈면서 내가 짓는 시가 제대로 되었는지 한번 봐주시게”



“고맙습니다. 장군님 시를 우중문보다 먼저 감상하는 행운을 잡았습니다.”



웅록이 탁자 위에 한지(韓紙)를 펼치고 먹을 갈았다. 을지문덕은 잠시 벽을 향해 앉더니 조용히 무엇인가를 낭송하였다. 웅록이 얼핏 듣기에는 그는 ‘천지신명’을 찾고, ‘칠성님’을 부르는 듯 했다. 을지문덕의 진지한 모습에 웅록도 곁에서 속으로 천지신명을 찾았다.



‘고구려의 천지신명님. 살아서 천지를 굽어보시는 환인 할아버님, 환웅 할아버님, 단군 할아버님, 부디 을지문덕 장군께서 수나라 오랑캐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해줄 명문(名文)을 지을 수 있도록 도우소서. 할아버님들께서 세우신 환국(桓國), 배달국(倍達國), 조선(朝鮮)의 맥을 이은 고구려의 운명이 풍전등화와 같나이다.



우리 고구려는 절대 오랑캐의 손에 넘어가면 안 됩니다. 한때는 오랑캐들이 단군 할아버님이 통치하던 나라에 구걸하던 족속들이었습니다. 진정한 하늘의 자손들이 천년만년 이 땅에서 뿌리를 내리고 살아갈 수 있도록 도우소서.’



웅록이 조용하게 기도하는 소리가 을지문덕의 귓가에도 전달되었다. 면벽 기도를 마친 을지문덕은 웅록이 갈아 놓은 먹물에 붓을 적시고 일필휘지로 시문을 써 내려갔다. 그의 글씨는 용사비등이며, 평사낙안의 극치를 보여주고 있었다. 웅록은 을지문덕의 웅건한 글자에 매료되어 시선을 떼지 못하고 가슴을 졸이며 바라보았다.



을지문덕은 시문의 제목을 여수장우중문(與隨將于仲文)이라고 쓰고 기구(起句)와 승구(承句)를 써 내려갔다. 한 자 한 자 써 내려가는 그의 손에 고구려의 운명이 걸려있었다. 우선 기구와 승구 쓰기를 마친 을지문덕은 자신이 쓴 시문을 한 발짝 떨어져서 살펴보았다. 웅록도 먹을 갈던 손을 잠시 쉬고 속으로 읽어보았다.



神策究天文(신책구천문) - 그대는 천문을 강구하여 신묘한 비책을 얻었고

妙算窮地理(묘산궁지리) - 기묘한 헤아림은 땅의 이치를 통하였도다



‘오오-, 과연, 과연 장군의 오언고시(五言古詩) 문장이야말로 하늘과 땅의 이치를 통하였구나. 이는 우중문을 칭찬하는 듯하나 실은 반어(反語)와 억양(抑揚)으로 그를 우롱하는 명문장이다.



그리고 상대방의 심리를 이용하는 고도의 전술적 의도가 담겨 있다. 기구와 승구는 우중문이 아니라 당신께서 천문과 지리에 최고 고수임을 은연중에 나타내고 있다. 장군님이 *기문둔갑술(奇門遁甲術)에 도통하셨다는 소문이 정말이었구나. 천문과 지리에 통달하지 않고는 지금까지 수나라 백만대군을 상대로 싸울 수 없다.’


기문둔갑술 – 천시(天時)와 지리(地理)와 인화(人和)가 조화를 이루어 만들어내는 비술로 제갈량 같은 병법가들은 이 묘술을 전쟁에 활용하여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웅록의 지아비는 병법에 능한 선비였다. 살아있다면 지금쯤 유비를 도와 촉한(蜀漢)을 건국하는데 일조한 제갈량처럼 을지문덕의 참모가 되어 고구려군이 승리하도록 도움을 주었을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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