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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재효 Jan 27. 2024

녹족부인



(15) 우중문의 착각








“과연, 과연 번회 아들답도다. 그 아비에 그 자식들이로다. 좋다. 별동대 총지휘관으로서 여러 장수에게 명령을 하달한다. 평양성까지 잠시도 지체하지 말고 돌격하라. 꾸물거리거나, 눈치를 살피며 진군을 빨리 진행하지 않는 지휘관은 즉결 처분하겠다. 알겠는가?”



“장군의 명을 받들겠습니다.”


우문술과 유사룡만 머쓱한 표정으로 헛기침을 해댔다. 우중문의 서슬에 여러 장수는 그만 기가 질려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7월 중순에 접어든 시기였다. 아침에 해가 뜨기 무섭게 대지는 달아올랐다. 수나라 별동대는 허기진 가운데 우중문의 명령을 따라 진격해야 했다. 병사들은 마지못해 진군하다가 주저앉거나 숨이 넘어가는 자들도 속출했다. 우중문은 진군하기 곤란하다고 판단되는 병사들은 모두 죽이라고 하였다. 하루에도 수백 명의 별동대가 아군의 창칼을 맞고 죽어 나갔다.


* 전서구 – 통신에 이용되는 잘 훈련된 비둘기.



“고구려군 보다 아군이 더 무섭다. 도대체 우리가 누구와 전쟁을 하는 것인가?”

“괴질에 걸렸으면 치료해줘야지, 걷지 못한다고 죽이면 우린 어쩌란 말이냐?”



“우중문은 사람도 아니다. 우리가 살려면 저놈 먼저 죽여야 한다.”

“녹족 삼 형제가 미쳤나 보다. 그전에는 우리들의 처지를 대변하더니만 갑자기 사람이 변했다. 그놈들도 군공에 눈이 멀었다.”



“우문술 장군 말이 맞다. 별동대는 평양성에 도착하기도 전에 굶어 죽고, 병들어 죽을 것이다. 지금이라도 우중문이 마음을 돌려야 우리가 살 수 있다.”

“우린 파리 목숨이네. 전장에서 죽어도 누구 하나 슬퍼하지 않을 것이네. 시기를 잘못 타고난 우리 운명을 탓해야지.”



별동대는 진군하면서 불평불만을 토로했지만, 지휘관들은 그들의 말을 무시했다. 다른 부대보다 전진 속도가 느리면 우중문의 칼에 목이 떨어질 수도 있었다. 고구려군이 나타나도 병사들은 싸울 생각을 하지 않았다. 고구려군이 가까이 접근해야 할 수 없이 활을 쏘고 전투 대형을 갖추었지만, 고구려군은 치고 빠지는 전술을 구사하여 별동대를 골탕 먹이기만 했다. 압록수를 건넌 수나라 별동대와 고구려군이 일곱 차례나 큰 접전을 벌였지만, 그때마다 수나라군의 일방적인 승리로 끝났다. 



그러나 우중문의 생각처럼 진군 속도가 빠르지 못했다. 군량이 떨어진 별동대들은 먹을 것을 찾아 자주 군영을 이탈하거나 진군 중에도 대오를 무단으로 빠져나와 도로변에 있는 민가를 급습했지만, 민가에는 보리 한 톨, 쥐새끼 한 마리 보이지 않았다. 짐승의 사체(死體)를 보면 그들은 그것을 토막 내 불에 구워 먹거나 끓여 먹었다. 짐승의 사체를 먹은 군사들은 곧 알 수 없는 병으로 목숨을 잃었고, 지휘관들은 군사들에게 대열에서 이탈하지 말라고 엄명을 내렸지만 굶주린 병사들은 상관의 명령도 무시했다.



“형님, 이제 평양성이 점점 가까워지고 있습니다.”

녹족 삼 형제가 저녁에 잠시 만났다.



“넉넉잡고 사흘 후면 평양성에 도착할 수 있을 것이다.”


“아마도 우리가 내일 살수를 건너면, 고구려군 측에서 협상하자고 사람을 보내올 수도 있을 겁니다. 그때 어머님이나 을지문덕 장군님이 오실지도 모릅니다.”



녹족 삼 형제는 이제부터 자신들이 본격적으로 조국 고구려를 위해 헌신할 때가 되었다고 판단하고 형제들의 행동 방향을 다시 한번 점검하고자 했다. 형제들은 이미 우중문 우문술에게서 마음이 떠나 있었다. 형제들은 어떻게 하면 고구려군이 대승할 수 있을까를 고민했다. 녹족 형제들이 웅록을 처음 만났을 때 충분히 이야기를 나눌 수 없었던 것이 못내 아쉬웠다.



“우리 형제들은 별동대가 고구려군과 대접전 벌일 때를 기다렸다가 고구려군과 내응해야 한다. 그러나 다른 장수들이 우리들의 행동을 눈치채게 하면 절대 안 된다.”



“형님, 내호아가 정말로 다시 평양성으로 돌아올까요?”

삼록은 내호아의 상태가 궁금했다.


“그자는 지금 장산군도에 있다지만 한번 고구려군에게 패퇴한 전력이 있어 함부로 움직이지 못할 것이다. 설령, 그자가 저번의 과오를 만회하기 위하여 재차 평양성으로 진군한다 해도 군사들이 이미 겁을 집어먹었기 때문에 마음대로 되지 않을 것이다. 우리 형제는 내호아가 오든 말든 신경 쓸 것 없다. 어떤 전투가 벌어지더라도 고구려군이 승리하도록 유도하면 된다.”



형제들이 행군 중인 상태에서 자주 만난다는 것도 부담스러운 일이었다. 지난번 작전 회의 때 삼 형제가 우중문의 편을 든 다음부터 다른 지휘관들이 형제들을 바라보는 시선이 곱지 않았다. 지휘관들뿐만 아니라 병사들도 녹족 삼 형제를 비난하였다. 진중에서도 병사들은 삼 형제를 보면 은근히 야유하거나 뒤에서 욕을 해댔다. 녹족 삼 형제는 자신들을 향한 병사들의 비난이 거세다는 것을 알면서도 모르는 척했다.



한여름 밤은 병사들을 더 지치게 했다. 고구려군을 추격하며 남쪽으로 진격하는 별동대는 낮에는 고구려군의 기습에 시달리고, 밤에는 모기와 뱀 등 해충에 시달렸다. 며칠 전에는 별동대가 야트막한 산지에서 야영하다가 수백 명의 병사가 독사에 물려 수십 명이 목숨을 잃기도 했다.



밤마다 기승을 부리는 모기떼는 별동대의 피를 빨았다. 다음날 일찍 녹족 삼 형제의 예상대로 고구려군 진영에서 사람이 왔다며, 병영의 앞면에 설치된 초소가 왁자지껄했다.



“우리는 고구려군 진영에서 온 사절이다. 너희 총사령관에게 할 말이 있다.”

수나라 말을 할 줄 아는 고구려 병사 한 명이 보초병에게 말했다.



“우중문 대장군에게 여쭤보고 오겠다. 잠시 기다려라.”



웅록이 을지문덕의 명령을 받고 다시 온 것이다. 웅록은 지난번처럼 수행원 두 명을 대동했다. 세 명 모두 병장기는 들지 않은 상태였다. 잠시 후에 진진이 소식을 듣고 달려 나왔다. 그는 멀리서 달려오면서도 웅록을 알아보고 손을 흔들었다. 마치 멀리 떠난 정인(情人)을 맞이하러 오는 사람 같았다.



“웅록 부관이죠? 정말로 반갑습니다. 그새 아주 예뻐지셨구려. 아니지, 멋있어졌습니다. 어서, 본영으로 가시지요. 웅부관을 기다리는 분들이 많습니다.”


‘나를 기다리는 사람이 많다?’



“진진 통역사께서도 안녕하셨지요?”


“그럼요. 나는 그동안 통역할 일이 없어 입이 무척 근질근질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무슨 일로 이 험지에 오셨습니까?”



“우리 태왕님의 항복문서를 가져왔습니다.”


“하, 항복문서요? 그럼, 빨리 가십시다. 마침, 여러 장수가 아침 일찍 본영에서 우중문 장군과 회의를 하는 중입니다. 나를 따라오시오.”



웅록은 진진을 따라가면서도 수나라군 진영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병사들은 아직도 잠을 자고 있는지 병영 안이 대체로 조용했다. 크고 작은 막사가 풀밭에 어지럽게 설치되어 있었고, 사이사이에 말들이 풀을 뜯고 있었다. 막사 밖에도 병사들이 군데군데 모여 잠을 자고 있는데 모두 송장 같았다. 아침이 밝았는데도 수천여 동(棟)의 막사에서는 밤 짓는 연기는 솟아오르지 않았다. 웅록이 본영이란 푯말이 세워진 본영에 거의 다 왔을 때였다.



“어머님, 어서 오십시오.”


웅록의 아들 삼록과 구록이 막사 밖으로 나오며 작은 목소리로 고구려 말을 하며 웅록을 맞았다. 모자(母子)의 두 번째 상봉이었다. 웅록의 가슴이 고동쳤다. 그러나 그녀는 아들들에 대한 그리움과 반가움을 내색하지 못하고 가슴을 진정시켜야 했다.



‘아들들아, 다시 만나는구나. 그동안 잘 지냈느냐? 어미는 너희들을 처음 만나고 나서 밤마다 제대로 잠을 이룰 수 없었구나. 어서 이 전쟁이 끝나고 너희들을 만나 예전처럼 살고 싶구나.’



‘어머니, 다시 뵙고 싶었습니다. 건강하신 모습을 뵈니 소자가 안심됩니다. 어머님이 오늘 내일쯤 오실 줄 알았습니다.’


삼록이 웅록에게 무언의 인사말을 전하고 있었다.



‘어머님, 이렇게 다시 뵈니 눈물이 나려 합니다. 어찌하다가 모자가 전쟁의 한가운데서 이런 해괴한 만남을 가져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구록도 어머니 웅록에게 무언의 인사를 전했다. 세 사람은 순간적이지만 서로의 눈을 맞추고 표정으로 안부를 주고받았다. 두 아들의 안내를 받으며, 웅록과 수행원 등이 본영 안으로 들어갔다. 막사 안으로 들어가던 웅록은 깜짝 놀랐다. 막사 안에 십여 명의 장수들이 앉아 있었다.



“고구려 사절은 인사를 하시오. 가운데 앉아 계시는 두 분은 수나라 우익위 우중문 대장군이시고, 왼쪽에 앉아 계신 분은 좌익위 우문술 대장군이십니다. 그리고 좌우로 별동대를 지휘하는 장수들입니다.”



“고구려군 총사령관 을지문덕 장군의 부관 웅록이 두 분 대장군님과 여러 장수님에게 인사 올립니다.”



웅록은 지난번에 전령으로 왔을 때 본 적이 있는 우중문에게 먼저 공손히 허리를 굽혀 인사를 했다. 그리고 우문술에게도 허리 숙여 인사하고 여러 장수에게는 가볍게 눈인사했다. 그 가운데는 큰아들 일록도 포함되어 있었다. 진진이 우중문에게 다가가 귓속말로 속삭였다.



“흔하오. 흔하오.”



진진과 속살거리던 우중문이 갑자기 일어나 소리치며, 손뼉을 쳐댔다. 그 바람에 우문술과 여러 장수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거구의 우중문이 웅록을 향해 다가갔다. 그 장면을 녹족 삼 형제가 우려스러운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장군님들, 기뻐하십시오. 고구려군 진영에서 온 사절단이 고구려 태왕의 항복문서를 가져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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