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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재효 Jan 27. 2024

녹족부인



(14) 위기의 평양성








압록수의 물이 장마 이전의 수준으로 되면서 수나라와 고구려군 사이에 점차 긴장이 높아져 갔다. 을지문덕은 수나라 별동대가 곧 압록수를 건널 것을 예상하고 그들을 맞을 만반의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수나라 별동대는 요동에서 압록수까지 오면서 고구려군과 전투다운 전투를 해보지 못했다.



고구려군을 맞아 싸우는 것보다 무거운 군장(軍裝)을 메고 천리(千里) 가까운 길을 행군하는 게 더 어려웠다. 별동대는 백 일 분의 군량과 갑옷, 무기 등을 짊어지고 고난의 행군을 해야 했다. 마치 큰 돼지 한 마리를 업고 가는 것과 같은 무게였다. 별동대들은 도저히 군장을 가지고 이동하기 어려워지자 행군 도중에 식량과 군장을 파묻기도 했다.



그들이 압록수 주변까지 왔을 때 백일 치 식량 중 겨우 닷새 정도 버틸 수 있는 군량만 남아있었다. 일부 군사들은 식량이 없어 남의 것을 훔치기도 했다. 군사 대부분이 굶주리고 있었다. 사태가 심각해지자 우문술과 우중문은 군량(軍糧)을 버리는 자는 목을 베겠다고 경고하였다.



을지문덕을 그냥 돌려보낸 우중문과 우문술을 마음이 편치 못했다. 그를 추격하던 추격대마저 전멸하고 겨우 삼록과 구록만 중상을 입고 돌아오니 우중문은 더욱 난감한 지경이 되었다.



“우중문 장군, 아무래도 우리가 압록수를 넘는다는 것은 무리요. 군사들에게 나눠준 군량도 겨우 사나흘 분밖에 남지 않았소, 대본영으로 돌아가 전열을 가다듬고 다시 출발합시다. 당초 우리 별동대가 회원진(懷遠鎭)과 노하진(瀘河鎭)을 출발할 때만 해도 건장한 상태였지만, 지금은 태반이 질병에 시달리고 있소. 이런 군대를 이끌고 압록수를 넘고 살수(薩水)를 건너 평양성까지 간다는 것은 곧 죽으러 가는 것과 같소.”

우문술의 말에 우중문이 인상을 썼다.



“무슨 소리입니까? 저 압록수만 건너면 평양성까지 곧장 내달릴 수 있소이다. 부족한 군량은 지금 한여름이니 산에서 나는 열매나 과일 등으로 보충하면 됩니다. 압록수를 건너가면 이곳보다 먹을 것이 많소이다. 질병은 군사들이 움직이지 않고 군영 막사 안에만 있어서 더 번진 것이오. 창칼을 들고 전투를 하면 씻은 듯 나을 수도 있소이다. 우리는 한시도 지체할 수 없소이다. 당초 예정일 보다 많이 지체되었소. 지금 상태에서도 나나 좌장군은 황제에게 질책을 받을 수 있소.”



우중문은 우문술의 말을 무시했다. 우중문이 서둘러 압록수를 건너려는 이유는 을지문덕을 추격하여 잡으려는 것과 평양성으로 오고 있을 해군의 내호아를 만나면 군량 문제는 어느 정도 해결될 것으로 판단했기 때문이다. 내호아가 이끄는 해군 10만 명 중 4만여 명이 평양성을 공격했다가 왕제(王弟) 고건무가 이끄는 고구려군에게 몰살당하는 결과를 초래한 것을 우중문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평양성에서 퇴각한 나머지 병력은 요동반도와 평양성 사이에 있는 장산군도 같은 섬들을 떠돌며 대기하고 있었다. 수나라 해군은 우중문과 우문술이 이끄는 별동대의 상태를 예의 주시하고 있었다. 내호아는 해군과 별동대가 협공하여 평양성을 공격하면 승산이 있을 것으로 보았다.



“속히 압록수를 건너라.”


별동대를 우중문과 우문술이 지휘했지만, 실질적인 총지휘관은 우중문이었다. 황제 양광은 우문술보다 우중문을 더 신임하고 있었다. 양광은 우중문이 군사를 이끄는데 과감하고 결단력이 있으며, 대사를 앞에 두고 주저함이 없이 돌진하는 그의 시원한 성격을 좋아했다. 우문술은 황제가 자신보다 우중문을 더 신임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우중문에게 끌려가듯 할 수 없이 압록수를 건너야 했다. 그에게는 퍽 내키지 않는 진군이었다.



“빨리 건너라. 압록수는 깊지 않다. 깊은 곳은 헤엄쳐서 건너리.”


좌군을 지휘하는 설세웅(薛世雄)이 채찍을 휘두르며 뒤에 쳐진 병사들을 닦달했다. 그는 우중문의 심복으로 불리며, 별동대를 함부로 다뤘다. 별동대가 압록수를 건너자 고구려군은 여러 군데에서 수나라군을 기습공격 하였지만, 별동대는 크게 병력 손실을 보지 않았다. 고구려군은 치고 빠지는 수법을 쓰면서 별동대를 괴롭혔다. 양측이 접전을 벌이는가 싶으면 어느새 고구려군 연기처럼 사라져 버렸다.



우중문은 고구려군이 접전하다 도망치자 기고만장하며 우쭐댔다. 별동대가 연전연승하자 우중문의 요청으로 잠시 제장(諸將)들이 모여 작전 회의를 하였다. 우중문은 자신의 군공을 자랑하고 계속해서 고구려군을 추격할 요량이었다.



“우문술 대장군, 고구려놈들이 도망만 치는 것을 보니 어떻소?”



“장군, 아무래도 이상합니다. 우리가 을지문덕이에게 속았습니다. 고구려군이 번번이 싸우다 도망치니 무슨 간계가 있는 게 분명합니다. 이쯤 해서 퇴각하는 게 어떻습니까? 어제도 군사들이 질병이 악화하여 죽어 나갔습니다.



또한, 군사 대부분이 식량이 떨어져 기아에 허덕이고 있습니다. 이대로 가다가는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처할 수 있습니다. 그리되면 우리는 평양성에 도착도 하기 전에 전멸당할 수 있습니다. 회군하여 전열을 재정비한 다음 다시 와도 늦지 않습니다. 전멸당하는 것보다 공격 시기를 늦추는 편이 현명합니다.”



우문술도 우중문의 기세에 눌리거나 꺼둘리지 않으려고 무진히 애를 썼다.



“우중문 대장군, 좌익위대장군의 의견도 일리가 있어요. 어쩌면 우리 별동대가 고구려놈들의 전략에 말려들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재고해보셔야 합니다. 별동대가 타국 땅에서 고혼(孤魂)이 되는 것보다 회군하여 재정비하는 편이 좋습니다. 작전상 후퇴는 황제 폐하께서도 뭐라 나무라지 않을 것입니다.”



이번에는 잠자코 있던 유사룡이 끼어들어 우문술을 거들고 나섰다. 두 사람이 철군을 말하자 우중문도 다시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의 고집대로 밀고 나가다 낭패를 보면 모든 책임을 혼자서 뒤집어쓸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좌익위대장군이나 위무사 어른의 말씀에 소장도 동의하는 바입니다. 우익위장군께서 말씀하신 것 보다 아군의 상황이 더 심각한 수준입니다. 괴질에 걸려 죽어 나가는 군사가 하루에 수백 명이 넘습니다. 군량이 떨어져 군사들이 풀이나 나뭇잎을 뜯어 죽을 쑤어먹고 있습니다. 고구려군이 퇴각하면서 들판에 있는 곡식이나 식량이 될 만한 것은 모두 불태워 버리는 바람에 쥐새끼 한 마리도 보이지 않습니다. 더 깊이 들어가면 위험에 처할 수 있습니다.”



이번에는 좌둔위장군 신세웅(辛世雄)도 나서서 우중문에게 철군을 건의했다. 그는 백전노장으로 우중문과 우문술도 함부로 할 수 없는 장수였다. 우중문의 입장이 참으로 난처한 지경이 되었다.



“아닙니다. 지금 내호아 장군이 이끄는 수나라 해군이 요동반도 인근 장산군도에 대기하고 있을 것입니다. 얼마 전에 평양성을 공격했다가 일부 병력의 손실은 있었지만, 아직도 수만 명의 병력이 있고 군수물자 또한 수백 척의 배에 가득 실려 있습니다. 우리 별동대가 평양성만 도착하면 내호아 장군이 이끄는 해군을 만나야 합니다. 그때는 군량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됩니다. 지금처럼 계속 전진한다면 곧 평양성에 당도할 수 있습니다.”



그때까지 잠자코 있던 우문술의 일록 좌장이 우중문의 주장을 지지하고 나섰다. 다른 장수들이 우중문에게 철군을 주장하는 반면에 우문술의 좌장이 그러한 발언을 하자 우문술은 충격을 받았다.



“번일록 좌장, 자네는 누구의 막료인가? 나인가? 아니면 우익위대장군인가?”


우문술이 자리에서 벌떡이어서더니 일록에게 대갈일성 했다. 일록의 입장이 난처해지자 삼록이 구록에게 신호를 보냈다.



“소장이 한 말씀 하지요.”

구록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아닙니다. 소장이 먼저 의견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이번에는 삼록이 일어서서 소리쳤다. 우중문의 휘하에서 공격대장 임무를 맡은 삼록과 구록이 동시 일어나 발언권을 요청하자 회의 분위기가 이상하게 돌아갔다. 회의에 참석한 여러 장수는 삼록과 구록이 일록의 아우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녹족 삼 형제는 별동대에서도 용맹하기로 이름난 장수들이었다. 기골이 장대하고 용감하여 그 어떤 장수들에게도 무용(武勇)만큼은 절대 밀리지 않았다.



“구록 대장부터 말해보오.”

우중문이 구록을 가리켰다.



“지금 우리 별동대가 약간의 내부적인 문제가 있다고 하여 진격을 멈추거나 주저하면 안 됩니다. 황제 폐하께서는 우중문 대장군님에게 별동대의 총지휘권을 부여하셨습니다. 그런데 병사들 몇 명이 괴질에 걸리고 군량이 모자란다고 돌아간다면 불같은 성정의 황제 폐하의 노여움을 어찌 감당하실 겁니까? 우리 별동대 지휘부는 고구려군에게 죽기 전에 황제의 칼에 먼저 목이 잘릴 수 있습니다.



지금 압록수 건너부터 평양성까지는 십만 명도 안 되는 고구려군이 지키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빨리 진군해야 합니다. 별동대가 평양성에만 도착하면 내호아 대장군의 해군과 만나야 합니다. 별동대와 해군이 연합하여 평양성을 공격하면 이틀 안으로 성을 함락시킬 수 있습니다.”



구록의 세 치 혀가 좌중을 그만 얼어붙게 했다. 별동대를 이끄는 여러 장수가 고구려군이 아닌 황제의 칼에 먼저 죽을 수 있다는 말에 그만 누구도 퇴각하자느니, 회군하자느니 하는 패색 짙은 말을 할 수 없었다.



“장군, 소장도 한마디 하겠습니다.”


“하오-.”


구록의 말에 기분이 우쭐해진 우중문은 삼록에게도 발언권을 주었다.



“지금 상태에서는 공격만이 능사입니다. 무조건 고구려군을 밀어붙이는 것만이 최선책입니다. 우리 별동대가 어렵게 압록수를 건넜는데 이대로 회군한다면 고구려군에게 반격할 수 있는 빌미를 주게 됩니다. 지금까지 우리 별동대는 고구려군을 상대로 모두 승리했는데, 철군하다가 한 번의 반격으로 패배라도 하면 별동대의 사기 저하로 이어지고 자칫 전멸할 수도 있습니다.



소장이 보기에는 고구려군은 그리 강하지 않습니다. 살수까지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살수를 건너면 평양성까지 금방 당도할 수 있습니다. 대장군께서 지금 즉시 내호아 대장군에게 전서구(傳書鳩)를 날려 모월 모일까지 평양성 하구에서 만나자고 하시면 됩니다. 황제 폐하께서도 저와 같은 생각일 겁니다.”

삼록의 말에 여러 장수는 멍하니 서로의 얼굴만 보며 킁킁 대기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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