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진이 큰소리로 외치자 여러 장수도 우중문처럼 손뼉을 치면서 ‘하오’를 연발했다. 그러나 우문술과 유사룡은 마치 벌레 씹은 얼굴을 하고 가만히 앉아만 있었다. 그 두 사람을 녹족 삼 형제가 노려보았다.
“여기 항복문서입니다.”
웅록이 고구려 태왕의 항복문서를 우중문에게 건넸다. 우중문이 그 자리에 서서 고구려 태왕의 인장이 선명하게 찍힌 문서를 펼쳐 들고 읽어내려갔다. 항복문서를 읽던 우중문의 얼굴이 갑자기 굳어지면서 웅록을 노려보았다. 진진이 얼른 우중문에게 다가갔다. 두 사람이 귓속말을 나누더니 진진이 웅록에게 다가갔다.
“웅록 부관이 건넨 문서는 분명히 항복문서가 맞는데, 항복의식을 평양성에서 한다는 게 무슨 뜻이오?”
진진이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물었다.
“진진 통역사, 우리 고구려군은 평양성까지 가는 길을 모두 열어놓고 수나라 별동대를 맞이할 것입니다. 그냥 남진하여 평양성으로 오시면 됩니다. 두 분 대장군과 여러 장수가 평양성에 입성하면 우리 태왕께서 항복의식을 거행할 예정입니다. 그때 우중문, 우문술 대장군께서 높은 단상 위에 오르시고 고구려 태왕의 구배(九拜)를 받고 고구려국의 옥새를 받으시면 됩니다. 만약에 수나라 양광 황제께서 평양으로 직접 행차하셔서 항복을 받으셔도 됩니다.”
웅록이 진진에게 확실한 어조로 고구려 태왕의 항복 의사를 전했다.
“아하, 그런 거로군요. 알겠습니다.”
진진이 우중문에게 웅록의 말을 그대로 전했다.
“하오. 하오.”
그제야 우중문은 파안대소하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진진이 또 큰소리로 웅록의 말을 전하자, 여러 장수와 막사가 떠나 정도로 웃으며, 손뼉을 쳐댔다. 그들은 고구려 태왕이 항복문서를 보냈고, 별동대의 여러 장수가 평양성에 입성하면 항복의식을 할 예정이라 하자, 이제 전쟁이 끝났다고 생각했다. 우중문은 을지문덕이 다녀간 뒤로 늘 불안한 상태였고, 평양성으로 직행하라고 내린 명령도 잊은 듯 했다.
아침 일찍 시작한 작전 회의가 곧바로 승전 축하 연회장소로 변했다. 우중문은 신기한 듯 항복문서를 읽고 또 읽어보며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본영 막사 안에서 노랫소리가 흘러나오고 흥겨운 풍악이 울리자 굶주린 병사들은 무슨 일이 일어났나 궁금하여 본영 주변으로 몰려들었다.
“아들들아, 잘 들어라.”
본영 막사 뒤로 일록과 구록 두 아들과 함께 자리한 웅록은 자신이 가져온 항복문서의 내막과 앞으로 아들들이 해야 할 행동에 대하여 알려주었다. 또한, 웅록은 을지문덕에게 수나라 별동대에 자신이 낳은 세 아들이 있다는 사실을 모두 알렸다고 했다.
두 아들은 웅록이 을지문덕에게 모든 사실을 털어놓았다는 말에 잠시 우두망찰 걱정하는 안색이었다. 웅록은 더는 자신이 여자라는 것과 녹족 삼 형제의 생모라는 엄연한 진실을 숨길 수가 없었다고 했다. 웅록의 말을 수긍하는지 형제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어머님 지시대로 따르겠습니다.”
웅록 일행은 한나절 수나라 군영에 머물다가 돌아갔다. 웅록이 돌아가고 일록과 구록이 우중문에게 별도로 평양성까지 가는 방법에 대하여 고했다. 물론 웅록이 일러준 대로였다. 고구려 태왕이 항복문서를 보내왔다는 소식이 금방 모든 진영에 퍼져나갔다.
우중문의 남진(南進) 명령은 유야무야한 상태가 되었고 별동대는 막사 안에서 주린 배를 움켜쥐고 낮잠을 청하기도 했다. 또, 병영 곳곳에서는 별동대들은 '우우-' 함성을 질러대면서 이제 지긋지긋한 전쟁에서 해방되었다고 소리치며 기뻐했다. 그들은 아껴두고 숨겨두었던 먹거리를 모두 꺼내 분대나 소대 단위로 종전을 축하하는 잔치를 열었다.
웅록의 고백을 듣고 을지문덕은 한동안 외부 인사의 접촉을 피했다. 그는 처음에 웅록의 말을 믿으려 하지 않았다. 을지문덕이 웅록을 처음 봤을 때도 그는 웅록을 신비한 인물이라고 보았다. 얼굴이 계집처럼 반반하고 허리가 잘록하며, 수염이 전혀 없는 것이 영락없는 여인의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웅록이 엄연히 조의선인 출신이며 조정에서 벼슬까지 받은 처지라 을지문덕도 웅록을 함부로 대할 수 없었다. 단 몇 가지 의심할 만한 것들은 어디를 가나 잠자리만은 항상 혼자 한다는 점이었다. 고구려군 병영 내에서 웅록과 함께 목욕했다거나 뜨거운 날씨에 등목했다는 병사가 한 명도 없었다.
을지문덕은 웅록의 녹족을 보고 큰 충격을 받았다. 풍문으로만 전해오던 전설 같은 이야기가 사실로 드러났기 때문이었다. 그는 웅록의 발을 유심히 살펴보고 그녀의 기구한 운명을 듣고 난 뒤에는 애틋한 마음에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웅록의 비밀은 일단 을지문덕만 알고 있어야 했다.
만약 그녀에 관한 이야기가 병영에 퍼지게 되면 그녀뿐만 아니라 수나라 별동대에 있는 녹족 삼 형제의 목숨도 위험하게 될 수도 있다. 을지문덕은 웅록의 사정을 안 뒤로는 그녀에게 더욱 세심한 주의를 기울였다. 웅록이 입고 먹고 잠자는 것부터 지니고 있는 병장기까지 그녀에게 불편함이 없도록 배려하였다. 현시점에서 웅록은 고구려 최고의 보물이나 다름없었다.
을지문덕은 마침 태왕이 잠시 전방 시찰을 왔을 때 웅록의 비밀에 대하여 모두 고했다. 태왕은 웅록의 존재에 대하여 알고는 있었지만, 자세한 사항은 알지 못했다. 태왕은 그녀의 세 아들이 별동대의 수뇌부로 있다는 사실에 더더욱 놀라며 웅록을 불러 여러 가지를 물어보기도 했다.
태왕은 을지문덕에게 수나라 별동대에 있는 웅록의 아들들과 수시로 연락을 취할 수 있는 수단을 취하고 작전을 구상하라고 지시했다. 이에 을지문덕은 수나라 말을 제법 할 줄 아는 병사 서너 명을 차출하여 세작(細作)으로 정하고 수나라 병영으로 침투하여 녹족 삼 형제와 접촉도록 했다.
“고구려군들이 우리가 남하하는 사흘 동안 한 명도 보이지 않는구나. 이 항복문서가 과연 진짜가 맞는구나. 빨리 평양성에 입성해서 황제 폐하께 전승을 보고해야겠다. 여러 장수는 진군 속도를 높여라. 한시가 급하다.”
우중문이 휘하 장군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대장군, 아무래도 좀 이상합니다. 우리 군의 자랑스러운 별동대가 남하할 때 이미 수십 개 마을을 지나쳤지만, 개미 새끼 한 마리 보이지 않았습니다. 고구려 백성들이 모두 나와 우리 군대에 손을 흔들거나 환영해야 정상이 아니겠습니까?”
신세웅이 자꾸만 뒤를 돌아보고 사방을 살피면서 우중문에게 주의하라고 권했다.
“신 장군은 의심이 너무 많아서 탈이야. 내 손에 고구려 태왕의 옥새가 찍힌 항복문서가 있는데 뭘 그리 의심하는가? 사내대장부는 한번 믿으면 하늘이 두 쪽이 나더라도 의심하면 안 되네. 잡생각 하지 말고 병사들에게 더욱 속도를 내어 평양성을 향해 달리게 하게.”
우중문의 시큰둥한 말에 여러 장수는 그만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말을 달려야 했다. 말을 타고 달리는 군관 이상급은 크게 힘든 줄 모르지만, 별동대 하급 병사들의 고통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었다. 다행히 한여름이라 그렇지 겨울이었다면 대부분 병사는 벌써 동사(凍死)하거나 병사(病死) 또는 굶어 죽었을 것이었다.
매일 물 한 모금과 소금 한 숟가락으로 버티며 죽기 살기로 강행군을 하고 있었다. 별동대가 압록수와 살수를 건너 남하하는 동안 수천 명의 병사가 괴질과 기아로 사망하고, 정체불명의 괴한들 기습에 또한 수천 명의 병사가 죽거나 다쳤다. 우중문은 중상이 심각한 병사는 몰래 죽이도록 지시하여 남행에 차질이 없도록 하라고 지시했다.
“대장군, 저기 희미하게 보이는 물줄기가 아마도 *패강(浿江)인 듯 합니다.”
앞서 달리던 설세웅(薛世雄) 우중문이 타고 있는 지휘부 마차 쪽으로 달려오며 소리쳤다. 신세웅이 소리치자 군사들도 그 자리에 서서 남쪽을 바라보며 함성을 질러댔다.
“패강이라면 평양성이 얼마 안 남았다는 것이렷다.”
우중문과 우문술은 마차에서 내려 별동대의 진군을 멈추고 잠시 쉬도록 했다.
“아-, 과연 저 반짝거리는 물줄기가 패강이 맞는 것 같다. 드디어 고구려 궁성 앞까지 왔구나. 그런데, 우리가 이곳까지 왔으면 고구려 태왕이나 을지문덕이 다려와서 나를 영접해야 하는 거 아닌가?”
“장군 아무래도 이상합니다. 군사들을 다시 살수쯤으로 물립시다.”
우문술이 약간은 두려운 표정으로 우중문에게 철군을 제의했다. 자신도 별동대를 이끄는 최고 대장군이지만 별동대의 총지휘권이 우중문에게 있기에 강력하게 말할 수 없었다.
* 패강 – 대동강
“좌익위대장군은 아직도 잠꼬대 같은 소리를 하는구려. 고구려 태왕의 항복문서가 내 손에 있고 그들이 평양 성문을 활짝 열고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는데, 뭐가 겁이 나서 그런 재수 없는 말만 골라서 하는 거요? 겁이 나면 이 길로 황제 폐하께서 계시는 요동 대본영으로 돌아가시구려.”
“내가 꼭 돌아가고 싶어서 하는 말은 아니오. 장군에게 참고하라는 뜻에서 한 말이니 오해 없기를 바라오.”
말 한마디 했다가 여러 부하 앞에서 망신만 당한 우문술은 입술을 깨물었다. 우중문에게 이런저런 말을 해봐야 소용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는 나중을 위해서라도 할 말은 해야 했다.
“이곳에서 잠시 머문다. 군영을 설치하고 쉬도록 하여라. 그리고 여러 장수를 소집하라.”
우중문이 휘하 장수들을 소집하여 긴급히 작전 회의를 열고자 했다. 그도 무작정 웅록이 전한 고구려 태왕의 항복문서를 믿지는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