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편소설]
옥상옥
그러나 제가 남자라는 사실을 말하지 않고 3, 40대 미시들이 많이 모이는 백화점 화장품 코너나 고급 레스토랑 또는 물 좋은 나이트클럽에 가면 저는 분명 많은 여인의 질투와 시기를 한 몸에 받으며 공주로 대접받을 게 확실해요.
또 엉큼한 남자들은 용팔이나 너훈아 같은 약아 빠진 웨이터에게 사랑 시(詩) 나부랭이나 그럴듯한 글귀를 적은 쪽지와 팁을 쥐여주고 저에게 끊임없이 파견하여 구애(求愛) 작전을 펼칠 테고요.
지난봄 여장을 하고 늦은 밤에 이태원에 간 적이 있었어요. 해밀턴 호텔 주변을 걸어가는데 시커먼 사람들이 나를 향해 휘파람을 날리며 손짓을 하더군요. 나는 못 본 척하며 계속 걸었어요. 이번에는 키가 2m는 족히 될 법한 거한들이 지나가면서 내 엉덩이를 손바닥으로 쓱 문지르더군요. 나는 소리를 칠까 하다가 구린 구석이 있어 그냥 참기로 했지요.
내가 번화가를 걷는 밤이면 그런 일은 비일비재하게 일어나곤 했어요. 외모가 근사한 사내가 치근대거나 내 히프를 툭 치면 기분이 그런대로 좋은데 늙숙한 사내나 어린 것들이 그러면 화가 치밀어 오르지요. 나는 거울을 보며 물찬 제비 같은 나의 외모에 저절로 흡족한 미소가 얼굴에 번졌어요.
나는 투피스 색과 비슷한 하늘색 하이힐을 신고 루이뷔통 핸드백을 메고 집을 나왔어요. 세상에나, 조용히 잠자고 있던 매미들이 제가 나타나니까 아름다운 화음(和音)을 내면서 저의 앞길을 축하해 주는 게 아니겠어요.
어제까지만 해도 시들어 있던 접시꽃이랑 때를 잊은 코스모스가 살랑거리며 제 앞길을 축복해 주던 걸요. 저는 너무나 즐거워 그녀가 사는 아파트까지 50m도 안 되는 길을 춤을 추며, 사뿐사뿐 걸었답니다. 화장품이 든, 꽤 고급스러워 보이는 케이스를 메고 가는 발걸음은 경쾌하면서도 한편으론 은근히 걱정되었어요.
드디어 그녀가 사는 아파트에 도착했어요. 마치 도둑고양이처럼 살금살금 그녀를 향해 다가갔어요. 가슴이 너무 콩닥거려 브래지어 끈이 자꾸만 흘러내리는 거 같아 서서 옷맵시를 점검하기도 했어요. 그녀의 아파트 현관문 앞에 섰는데 이상하게도 초인종을 누를 수 없었어요.
마른 침을 삼키고 심호흡을 하고 나서 용기를 냈어요. 초인종 버튼을 누르는 제 엄지손가락이 바르르 떨렸지만 이를 악물고 간신히 버튼을 눌렀답니다. 그런데 한번, 두 번, 세 번, 네 번 아무리 버튼을 눌러도 안으로부터 아무런 반응이 없는 거예요. 나는 버튼을 눌러 대면서 현관문을 주먹으로 쾅쾅 두드렸어요.
그래도 안에서 아무런 인기척이 없더라고요. 나는 속으로 ‘이 여인이 도대체 지금이 몇 시인데 아직도 잠자리에 있는 거야?’하고 중얼거렸어요. 제가 아무리 주먹으로 문을 심하게 두드려도 전혀 반응이 없자 화가 나기 시작하더군요.
저 나름대로 예쁘게 치장하고 왔는데 문도 열어주지 않는다니. 나는 욱하는 성질을 참지 못하고 현관문 손잡이를 꽉 잡고 힘껏 당겼어요. 문이 힘없이 스르르 열리더군요. 나는 마치 집주인이라도 된 양 안으로 들어갔어요. 환한 밖에 있다가 약간 어두운 공간에 들어가니 잠시 눈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어요.
게다가 창문에 짙은 암갈색의 커튼이 쳐져 있었습니다. 나는 무단 주거침입자 신분이라 가슴이 두근거려 심호흡을 고르게 조절해야 했어요. 그녀가 안방에서 깊은 잠에 취해 있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도 엄습하는 바람에 금방 후회가 되긴 했습니다. 곧 실내 사물이 보이기 시작했답니다.
그런데, 그런데 거실 바닥에 신문지, 잡지, 종이상자, 부서진 가구 조각 등이 어지럽게 널려있는 게 아니겠어요. 나는 그만 그 자리에 주저앉아서 엉엉 울고 말았답니다. 세상에 그럴 수가 있는 거예요? 단 한 가구밖에 없는 이웃에게 인사도 없이 매정하게 떠나갈 수 있는 거냐고요?
나는 한참 울다가 우연히 벽을 쳐다보았어요. 그리고 그 자리에서 말을 잊은 채 밤늦도록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이 되고 말았어요. 글쎄 벽에는 마트에서 빈 카트를 끌고 다니는 내 뒷모습이 담긴 커다란 사진이 떡하니 붙어있는 게 아니겠어요.
-끝-
_()_ 끝까지 읽어주신 님에게 고개 숙여 고마움을 전합니다.
곧 다시 뵙겠습니다. 건강하세요.
저자 최재효 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