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밤의 엑소더스
[중편소설]
한밤의 엑소더스
조선 시대 여성의 해방을 부르짖으며, 사대부가 며느리들한테 미니스커트를 입고 다니라고 선동했다면 그가 누구인지 모르지만, 한양의 운종가 한가운데서 능지처참의 형벌을 받았을 게 분명해요. 그 능지처참의 형벌을 명령한 나리님들은 음침한 달밤에 종자들을 대동하고 앞다퉈 다동(茶洞)으로 몰려가 희멀건 허벅지와 한양 바람둥이들의 오족(五足)을 마비시키는 신비스러운 샅을 지닌 기녀를 보기 위하여 달려갔을 테고요.
지난 역사에서 사라진 제국들의 멸망 과정을 들여다보면 지나친 쾌락의 추구가 원인이 되었답니다. 목욕문화가 잘 발달했던 로마가 그렇고, 자식의 아내, 즉 며느리인 양옥환(梁玉環)을 강제로 빼앗아 귀비(貴妃)라는 싸구려 첩지를 하사한 뒤 자신의 성적 노리개로 삼다가 나라를 말아먹은 멍청한 당나라 현종(玄宗)을 보면 성(性)이 얼마나 위대한지 알 수 있잖아요. 오죽하면 경국지색이란 말이 생겨났겠어요. 성(性)을 어쩌면 불과 비유해도 될 겁니다.
잘 사용하면 인류에게 큰 문화적 혜택을 누릴 수 있는 반면에 자칫 정신을 놓으면 인류를 멸망에 몰아넣은 악마의 불꽃이 되어버리니까요. 나는 그녀가 운동이 끝나고 그녀의 아파트 거실 등이 꺼질 때까지 온갖 망상을 떠올리면서 새벽이 훨씬 넘도록 거실을 서성거렸답니다. 그녀가 이혼녀라도 좋고 시집을 못 가 쓸데없이 나이를 먹어 세상의 남자들을 비난하고 있는 히스테리컬 한 여자라도 좋아요.
오늘 촬영한 사진을 컴퓨터 화면으로 띄워놓고 보면서 침이 마르도록 찬사를 늘어놓기도 하고 아침에 보았던 여인은 전혀 다른 여자였다고 스스로 마음을 치유해 가면서 JPG 파일에 담은 그녀의 뒤태를 감상하였어요. 사람이 사람을 속이고 기계를 속일지라도 기계가 사람을 속일 리가 없잖아요.
그렇게 여명이 밝아 올 무렵 나의 일과를 대충 마무리하고 다시 천근 같은 눈꺼풀을 올리며, 아침 산책하러 나갈 준비를 했답니다. 분명히 그녀가 아침 운동을 하러 나올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지요. 오늘은 시커먼 기계 대신 똑딱이 디지털카메라를 들고나가기로 했어요. 도대체 내 눈을 믿을 수가 있어야지요.
나의 예측은 보기 좋게 빗나가고 말았어요. 저녁 8시면 어김없이 러닝머신을 괴롭히던 여자가 새벽 시간에는 몸을 놀리기 귀찮은가 봅니다. 이른 아침 5시에 아파트 단지 가운데 있는 공원에 나가서 8시가 될 때까지 서성댔습니다. 괜히 지나가는 초면의 노인에게 인사말을 건네기도 하고 유령 마을이 되다시피 한 아파트 단지를 어슬렁거리는 고양이와 개에게 화풀이하기도 했습니다.
3시간 넘게 그녀를 기다리다 지쳐 결국 나는 개와 고양이를 벗 삼아 아파트 단지 이곳저곳을 두리번거리며 활보하였답니다. 남자가 자존심이 있지 두세 시간 기다리다 그냥 돌아설 수 없잖아요. 나는 단지 밖에 있는 슈퍼에서 우유와 빵을 사서 아침 겸 점심으로 해결하고 나서 그녀가 나오기를 학수고대하였어요. 해가 중천을 넘어 서천으로 달음박질할 때까지도 그녀의 그림자조차 볼 수 없었어요.
참담한 심정으로 멍청하게 낡은 벤치에 앉아 애꿎은 똑딱이 카메라만 쥐어박으며 신세 한탄만 늘어놓았답니다. 도대체 내가 왜 그 유령 같은 여인에게 마음을 빼앗겨 이런 고생을 해야 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어요. 남녀 관계란 참으로 오묘한 게 틀림없나 봐요. 나는 그녀를 기다리다 지쳐 땅거미가 질 무렵 만근이나 되는 육신을 이끌고 간신히 집에 돌아왔어요. 정말로 괘씸하고 화가 나 견딜 수가 없었어요.
나는 내 컴퓨터에 저장된 그녀의 사진을 보며 넋두리를 늘어놓았답니다. 아무리 꿍얼거려 보았자 내 입만 아프던걸요. 반쯤 마시다 남은 헤네시 XO를 꺼내 안주도 없이 스트레이트로 마셔대기 시작했어요. 40도가 넘는 독주(毒酒)인데도 불구하고 내 속은 전혀 더워지거나 알딸딸한 느낌이 없었어요. 나는 병맥주를 꺼내 소위 주당들이 말하는 ‘폭탄주’를 제조했답니다.
제2차 대전 때 일본 히로시마에 투하된 원자폭탄 100배의 위력을 가진 핵폭탄 서너 개를 뱃속에 집어넣고 나서야 정신이 좀 들더군요. 그런데 제조과정에서 브랜디(Brandy)와 라거비어(Lagerbeer)의 배합량에 문제가 있었던지 금방 강력한 효과가 나타났어요. 어설픈 폭탄제조 기술자의 실험은 그만 일을 내고 말았답니다. 천정이 빙빙 돌더니 금방이라도 아파트 천장이 무너져 내릴 것 같았어요.
나는 정신을 차리기 위하여 냉수를 마셔댔지만, 핵폭탄의 가공할 위력은 상상을 초월했어요. 나는 뒤늦게 초토화된 뱃속을 달래기 위하여 팬티 바람에 건너편 그녀가 하는 것처럼 거실에서 뛰기 시작했어요. 전신(全身)에서 포도알 크기의 땀방울들이 소나기처럼 떨어지면서 거실 바닥은 금방 흥건해졌어요.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열심히 거실을 뛰어다녔어요.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