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득 '혼자'라는 생각이 든다.
이 세상에 올 때 누구나 그렇듯이 혼자였다.
아니, 혼자라고 표현하면 안되는걸까 부모님이 계셨고 오빠들, 언니들도 있었기에 혼자는 아니었다. 하지만 가족 모두 자기의 삶을 살아가는 과정은 혼자라고 할 수 있겠다. 각기 자기 삶의 과제가 다르기에.
더 큰 성장을 위해 고향과 부모님을
떠났을 때 내 곁에는 바로 위 언니가 늘 함께 있었다. 같이 공부하며 함께 책을 읽었고 음악도 함께 들었다.
누가 끼어들 틈이 없을만큼 어디를 가든 무엇을 하든 언니와 함께 했으므로 때로는 친구로, 또 고민 상담자로 늘 곁에 있었다. 그리 함께했던 언니의 결혼이 늦어지며 내가 먼저 결혼을 결정했을
때는 정말 마음이 힘들었다.
언니와 한칸짜리 자취방에서 찌개 하나 끓여놓고
깔깔대며 맛있게 먹던 생활보다 결혼 후, 풍성한 식탁에 둘러 앉았지만 왠지 마음은 늘 허기가 졌던 시댁 살이였다.
'군중속의 고독'이라는 당시 유행어처럼 아는 사람이 하나도 없는 시댁살이, 홀로 이방인이었던 나는 고독의 수렁에 깊게 빠져 들었다.
일년 반, 우리의 필요에 의해 지냈던 시댁살이 동안 나는 두 번의 자연 유산을 겪으며 몸과 마음이 피폐해져 갔다. 2주 이상 하루도 잠을 잘 수 없어서 정신과 상담을 받고 약을 처방 받아야 할 지경까지 이르렀다.
새벽에 출근해서 밤 늦은시간 퇴근하는 남편을 기다리기에는 하루가 너무 길었고 긴 시간을 채우는 과정에 시어머니라는 폭탄을 안고 있는
불안이 제일 큰 문제였다.
언제 터질지 모르는 감정폭탄을 소유하신 분, 어머니의 슬리퍼 끄는 소리만 들리면 가슴이 쿵쾅거리고 예측이 안되는 상황에 극도의
불안이 몰려온다. 또 무슨일 때문에 야단을 치실까. 시어머니 심기에 따라 전쟁과 평화가 공존하는 집안 분위기는 새댁인 나에게 늘 긴장의 연속이었다.
어머니의 이해하기 힘든 성격을 겪으며
나의 두꺼운 일기장은 시댁살이 결정의 한탄과
온갖 어머니에 대한 원망과 비난으로 채워져 갔다. 터질것 같은 감정의 돌파구로 일기 쓰기를
선택했는데 늘 궁금한게 많고 뒤지기 좋아하시는 어머니께 들킬까봐 꼭꼭 숨겨 두기까지 했다.
분가 후 아이들을 낳고 키우며 살다보니 수십 년이 훌쩍 지났다. 그 호랑이 같던 시어머니는 구십이 넘은 노인이 되셨다. 어머니는 8년 전, 나는 3년 전에 우리는 둘 다 남편을 먼저 보냈다.
무조건 아내를 감싸던 아버님이 돌아가시자 어머니는 심하다 싶을 정도로 기가 꺾이셨다.
그리고 또 몇년 후 어머니는 아들을 먼저 보내는 아픔을 겪고는 완전히 다른사람이 되었다.
어디서나 거침없이 당당하던 그 어머니의 모습을 상상할 수 없다. 차라리 예전처럼 큰소리를 치셨으
면 덜 애처로울텐데...산다는게 뭘까.
이 세상에 올 때 맞이해 주던 부모님들이 순차적으
로 떠나시고 새로 가족을 이루고 살다가 또 각자의 삶으로 나뉜다. 남편은 먼저 저 높은 나라로 떠났고 아이들은 자신들의 삶의 현장으로 떠났다.
처음 그랬듯이 역시 홀로 남기 마련이다.
나의 새댁 시절, 그리 무섭게 굴던 어머니는
오직 이 며느리만 의지 하신다. 늦은감 있는
어머니의 홀로서기 연습이 때로 가슴 아리다.
산다는 것, 인생의 공식을 비교적 일찍 터득한 나는 좀 더 여유있게 '홀로서기'준비를 해야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