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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첩과 만년필 Nov 01. 2021

친구 아버지와 짝짝짝

농구, 과외, 그리고 친구 아버지


  중학교에서 고등학교 올라가던 겨울 방학에 친구들과 그룹과외를 받았다. 고등학교 선생님이셨던 친구 아버지가 추천해준 한의대생 형이 우리를 가르쳤다. 나를 포함해서 세명이었는데 모두 농구를 좋아해 수업이 끝나고는 거의 매일 농구를 했었고 그날은 과외 시간 전에 농구를 했었다. 다른 사람들과 함께 농구 시합을 하다 보니 예정된 시간에 마칠 수가 없었고 "한게임 더?"를 계속 외치다 보니 30분 정도 늦게 되었다. 더 늦었었는지도 모른다. 친구 집으로 공부하러 들어가면서 조금 걱정이 되어 "야 우리 괜찮을까?"라고 물었더니 그 친구는 "괜찮아~! 내가 말 잘할게!" 하며 호탕하게 안심시켰다. 늦었다는 생각에 집에 도착하기 직전에는 조금 뛰었던 것도 같고 현관문을 열기 전에는 옷에 묻은 먼지를 털었던 것도 같다.


문을 열자 교련 선생님이셨던 친구 아버지가 엄한 표정으로 서 계셨다. 쾌활한 성격의 친구는 "아빠 어쩌다 보니 늦었어요! 아이 미안해요~!"라는 말을 했다. 평소 넉살이 좋은 친구였기에 오늘도 잘 넘어가겠구나 하고 생각했다.


나는 반성하는 모습을 보이기 위해 고개를 숙이고 있었는데 "짝!" 하는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들자 친구 아버지의 손바닥이 나에게도 날아왔고 내 뺨에서도 "짝"소리가 났다.

어리둥절하고 있을 때 마지막 "짝"소리가 다른 친구에게서도 났다.


부모님의 매질이 지금보다 더 흔한 시절이었지만 친구 아버지에게서 맞은 일은 처음이라 당황해서 아픈지도 몰랐다. 실제로도 세게 때리시진 않았던 것도 같다. 과외 선생님에게 모두 미안하다고 말했고 어색해진 분위기에 선생님도 우리 모두도 별 말이 없었다. 수업 내내 나는 충격을 받아 집중하지 못했고 친구는 "우리 아빠가 그럴 줄 몰랐다."며 분개했었다. 집에 돌아와 조심스럽게 어머니께 있었던 일을 말씀드렸더니 예상과는 다르게 "엄마 같으면 뺨 한대로 안 끝났다."시며 친구 아버지 편을 드셨다. 괜히 말했나 싶었다.


다음 과외 시간이 되어 그 집에 다시 갔을 때 친구 어머니가 아버지께서 잠도 잘 못 주무시고 속상해하셨다고 말씀하셨다. 우리 부모님도 크게 문제 삼지 않으셨고 그다음에는 그런 일로 혼난 일도 없었기에 한 번의 해프닝으로 그냥 그렇게 지나갔다.


중학교 시절 제일 친한 친구였고 같은 고등학교에 진학했지만 반도 달라지고 문, 이과로 나뉘어 그전처럼 자주 어울리지는 못했다. 더군다나 운동을 아주 잘하고 쾌활한 성격에 항상 주변에 친구들이 많았던 그에게는 구름처럼 친구들이 몰렸었고 나는 'one of them'이 된 것 같아 조금 서운했던 것도 같다. 고등학교를 졸업하면서는 방학 때 가끔 만날 정도가 되었다. 그 친구의 군 복무 중 휴가 때 어울렸던 것이 마지막이 아니었나 싶다.




세월이 흘러 자리를 잡기 시작하자 고등학교 친구들과 연락이 되기 시작했고 단톡방에서 많은 친구들의 근황을 들을 수 있었다. 40대가 되었기에 동기들 부모님의 부고가 종종 올라왔고 잘 모르던 친구들과 연락해도 될까 망설여지는 친구들의 소식이 있었다. 그러다가 '그 친구' 아버지의 소식이 올라왔다.


순간 당장 내일까지 해야 할 일들이 생각났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이 가야 했다. 십 수년 동안 연락을 안 하고 지냈으니 그 친구 전화번호는 당연히 없었고 다른 친구에게 연락해 같이 가기로 했다. 퇴근하고 만나니 겨울철이라 이미 어둑해져 있었다. 친구의 외제차를 잠시 칭찬했고 오랜만에 만난 친구와 반갑게 이야기를 나눴다. 슬픈 일로 만나게 되었으나 오래전 고등학교 시절부터 지금 사는 이야기까지 즐겁게 떠들었다. 부모님이 순천을 떠나신 후 오랜만에 찾는 고향이라 나는 점점 설레는 마음이 들었다. 톨게이트를 지나고 보는 한밤중의 고향은 많이 낯설었다. 길이 새로 생겼고 모르는 건물도 많이 생겼다. 장례식장인 순천의료원은 옛 모습 그대로라 반가웠다. 주차하고 장례식장으로 들어서며 엄숙한 마음이 되었고 정말 오랜만에 만나는 친구를 어떻게 위로할까 걱정도 되었다.


빈소에 조문을 하려 했을 때 친구가 자리를 비워 먼저 식사를 했다. 자리에 앉아보니 장례식장 한쪽 끝에 예전처럼 많은 친구들에 둘러싸여 있는 그 친구가 보였다. 조바심이 났으나 먼저 차려주신 밥과 국을 맛있게 먹었다. 밥을 다 먹었을 때쯤 이미 상당히 취한 친구는 가누기 힘든 몸을 움직이며 다가왔다. 기억 속의 모습보다 훨씬 살이 쪘지만 여전히 유쾌한 목소리로 나를 반겼다.


"야 수첩아! 어떻게 알고 왔냐?"

라고 큰 소리로 외쳤다.

나도 반갑게

"내가 안 오면 안 되지!"라고 외쳤다.

"맞아. 너는 우리 아버지하고 추억이 있지. 하하하."

"그럼! 이중에 너희 아버지한테 맞아본 사람 있냐? 하하하!"

"야~! 내가 우리 아버지 덕에 너를 다시 만나는구나!"

한 바탕 큰 소리로 함께 웃었다.

친구가 바로 나를 어머니께로 데리고 갔다.


"엄마! 수첩이가 왔어요!"

"안녕하세요 어머니! 잘 지내셨죠?"

정말 오랜만에 뵙는 친구 어머니는 내 어머니가 그렇듯 나이가 많이 드셨다.

그리고 나를 반기시며 말씀하셨다.

"야~! 우리 수첩이가 이렇게 컸구나!"

얼마 만에 들어보는 표현인지... 이제는 크다 못해 늙어가고 있는데 이런 말씀을 들으니 반갑고 또 즐거웠다.


그리고 술잔 앞에 함께 앉았다. 고등학교 친구들이 그렇든 십 수년의 시간에도 우리는 아주 자연스럽게 옛날이야기를 나눴다. 친구와 그 문제의 사건을 이야기하자 옆에 있던 친구들도 신기해하며 즐겁게 옛날을 추억했다. 많은 조문객들을 상대하느라 취한 그 친구는 내 전화번호를 묻고 올라가면 다시 연락하자고 했다. 전화번호를 교환하며 가까운 동네에 살고 있으니 꼭 만나자고 했다. (그 뒤에 같은 구에 살고 있는 그 친구와는 종종 연락하며 만나고 있다.)


친구가 다른 테이블로 옮겨 갔을 때 아버님과의 다른 추억들이 떠올랐다. 영어공부에 관심이 많으시던 당신께서는 공부하시던 민병철 영어회화 책 속의 표현을 우리들에게 알려주시기도 했다. 알려주시는데 그치지 않고 활용형을 만들어 작문해 보라고 하셔서 나를 당황하게 만드셨다. 또 스포츠를 좋아하셔서 우리들이 운동하는 것을 좋아하셨고 투게더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농구 중계를 함께 보기도 하셨다. 다른 친구 아버지를 뵌 일도 많지 않았지만 이런 구체적인 일들이 생각나는 분은 거의 없다.  이런 분이셨기에 그 "짝짝짝"이 더 충격적이었는지도 모른다. 내 인생에 가장 당황스러운 순간 중의 하나였지만 이제는 그분의 걸걸하지만 다정했던 목소리와 함께 따스한 기억이 되었다. 인간적인 매력이 넘치시던 그분이 참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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