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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분이니까 솔직하게 말씀드릴게요.

믿을 수 없는 이야기를 듣다.

by 하정

얼마만의 휴가인지 모르겠다. 대학 동기들과 오랜만에 휴가를 떠났다. 아이들은 맡겨두고 들뜬 마음으로 기장의 리조트에 도착했다. 저녁 시간이 이렇게 길었던가?


늘 저녁을 차리고 뒷정리를 하느라 정신없이 바쁜 시간이 여느 때보다도 더 평화롭고 여유로웠다. 시간은 길었고 우리의 이야기가 끝이 없이 이어졌다. 한 친구는 유방암으로 투병 중이신 이모 이야기를 꺼냈다. 그래.. 내 나이 어느덧 마흔이구나. 이제 우리도 나이가 드는 거지. 누군가는 아프고 누군가의 가족이 아프고 그런 이야기가 건너서 건너서 들려왔다. 얼굴만 마주 보고도 까르르 웃던 새내기 시절, 우리가 처음 만난 20년 전과 지금의 우리는 달랐다.


나는 영어 강의 20년 차 워킹맘이다. 누구보다 바쁘고 열심히 살았다고 자부하고 늘 부지런했다. 운이 좋았던 건지 대학시절부터 일이 끊이지 않았다. 영어 과외, 학원 강의, 학교 강의, 학원 운영까지 육아를 하면서도 늘 바쁜 시간을 보냈다. 항상 정신이 없고 시간에 쫓기는 삶을 살았다. 아침에 바쁘게 아이들을 챙겨 보내고 나면 손에 커피를 들고 학원 자료들 작업을 해야 했다. 오후에는 강의를 했고 집에 오면 아이들 식사를 챙겨주고 공부를 봐주었다. 잠잘 시간이 되면 잠시 여유가 찾아왔다.


20년 지기들과 꿈같은 짧은 휴가를 보내고 돌아와 여느 때처럼 샤워를 했다. 문득 친구의 이야기가 스쳤다. 그냥 계속 맴돌았다. 유방암에도 걸리는구나.. 그리곤 내 가슴에 뭔가가 만져졌다. 뭐지?


일이 너무 바쁘니까 마무리가 되면 병원에 한번 가볼까? 하고 생각했다. 어차피 별일도 아닐 것이니 급할 건 없다고 생각했다. 신랑에게 이야기하니 화를 내며 당장 병원에 가보라고 성화라 집 근처 병원에 가서 진료를 받기로 했다. 별생각 없이 예약도 하지 않고 간 병원은 사람들로 가득 차 있어 진료를 보기도 힘들었다. 이미 예약이 다 찬 상태라 많이 기다리셔야 한다고 안내를 받았다. 그냥 갈까 말까 고민하다가 병원 소파 끝쪽에 앉아 조용히 대기를 하고 있었다.


다음에 다시 올까 생각하던 그때 한 간호사가 내게 왔다.


"건강검진하시는 의사 선생님께서 일정이 일찍 끝나 지금 시간이 되시는데 진료 보시겠어요?"

"어떤 선생님이든 상관없으니 빨리 봐주세요. 제가 오후에 출근을 해야 해서요."


초음파가 시작되고 몇 가지 간단한 질문에 답하고 여의사 선생님은 아무 말씀이 없으셨다. 한참 동안이나 계속 아무 말도 하지 않으셨다. 검사하면서 말씀은 없으시겠지만 그날은 더욱 침묵이 길게 느껴졌다. 그런데 초음파가 끝날 기미가 안보였다. 한참이나 시간이 흘렀다.


(얼마나 오랜 시간 동안 검사를 하는 거지?)

"선생님 원래 검사가 이렇게 오래 시간이 걸리나요?"

".................."

내 질문에 답이 없으시고 머뭇머뭇하셨다.

그리고 다시 말씀을 시작하셨다.

"젊은 분이니까 솔직하게 말씀드릴게요.

암인 것 같아요."

순간 내 귀를 의심했다.

“네? 암이 아닐 수도 있지 않나요? “

“70프로 정도의 확률이에요.”


더 이상 말씀을 잇지 못하셨다. 밖에 있는 간호사를 부르고 조직검사가 진행되었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그리고 내 서류에 응급이라고 쓰인 빨간 도장이 찍혀있었다. 간호사는 서둘러 내 자료를 들고 어딘가로 떠났다.


눈물은 나지 않았다. 당연히 오진이니까. 의사도 사람인데 당연히 실수를 할 수도 있고 잘 못 볼 수도 있는 거 아닌가? 조직검사를 하고 결과는 일주일이 걸리지만 응급으로 조금 더 서둘러서 알려주신다고 했다. 병원문을 나서는데 울컥했다. 하지만 아닐 거야. 내가 암에 걸릴 일은 당연히 없으니까. 그럴 일은 없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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