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숏컷이 뭐 어때서?

드디어 모자를 벗다.

by 하정

젤로다 항암제를 먹으면서 이런저런 부작용들이 조금 있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감사했던 일은 부작용 중에 탈모가 없다는 것이었다. 머리카락이 밤송이처럼 조금씩 자라나고 있었다. 매일매일 표도 나지 않을 만큼 자라고 있었지만 난 눈을 뜨면 거울로 향했다. 어제보다 좀 더 자랐겠지? 나의 민머리가 채워지고 있었다. 그토록 보기 싫던 거울을 다시 보기 시작했다. 1년 동안의 항암치료로 많이 붓고 피부색이 어두워졌지만 다시 자라고 있는 머리카락을 볼 때면 마음 한편이 뭉클했다.


2차 항암을 하고 쉐이빙을 하고 나서는 내내 모자를 쓰고 다녔다. 모자에 가발이 같이 붙어있어서 외출할 땐 나를 꽁꽁 감추고 다녔다. 마스크를 쓰고 머플러까지 두르면 완벽했다. 아무도 나를 모를 거야. 그리고 길을 걸을 때면 평범하게 다니는 수많은 사람들을 보면서 참 많이 부러워했다. 다들 저렇게 모자를 안 쓰고아프지도 않은데 나만 이렇게 다니는구나. 부러웠다. 길을 걷다 만난 모든 사람들이 부러웠다.


젤로다 항암제를 다 먹어갈 무렵 밤송이 같은 머리는 어느새 조금 더 자라 있었다. 머리를 다듬고 이제 아주짧은 스포츠머리 길이 정도는 될 것 같아 용기를 내보기로 했다. 하루 종일 미용실 후기를 읽다가 집에서 조금 떨어진 브랜드 미용실에 예약을 했다. 무조건 예쁘게 잘라야 했다. 미용실에 들어서자 모자 가발을 벗었다. 나를 보던 직원이 놀란 눈치였지만 침착하려 애쓰는 것 같았다. 미용사분은 이전에도 아프신 분들의 머리커트를 많이 해드렸다며 차분히 머리를 잘라주셨다. 삐죽빼죽 엉망으로 자랐던 머리를 단정히 자르고 나니 꽤 괜찮았다. 여전히 아주 짧았지만 그날부터 더 이상 모자를 쓰지 않았다.


길을 걷다 가끔 항암 중의 가발을 쓰신 분들을 마주친다. 그리고 기차를 타고 서울을 갈 때면 모자 가발을 쓰신 분들을 귀신같이 나는 한눈에 알아본다. 그 모습에 내가 있기 때문이다. 병원 가시는 길이시구나.. 비니를 쓰고 생활했던 그때가 떠오른다. 그저 마음으로 따뜻하게 미소를 보낸다.


생사의 순간에서도 고집스럽게 붙잡았던 머리카락이었다. 미용실에 머리 자르러 못 간다며 아이처럼 울기도 참 많이 울었다. 머리가 다시 긴 지금 생각해보면 그게 그렇게 힘들 일인가 싶을 수도 있지만 아프고 힘든 시간이었다. 힘든 시간은 지나간다는 걸 알았어도 그때로 돌아간다면 여전히 많은 눈물을 쏟았을 것 같다.


미용실에서 나와 길을 건너려고 신호등에 섰다. 빨간불이 초록불로 바뀌길 기다리며 서있는데 시린 겨울바람이 불어왔다. 그리고 나의 얼굴로 바람이 살짝 스쳐 지나갔다. 방금 정리한 나의 짧고 짧은 머리가 헝클어졌다. 바람에 내 머리카락들이 흩날리다니 믿을 수가 없었다. 다시 바람에 내 머리카락들이 흩날리기 시작했다. 그날의 그 바람은 아마도 내 평생 죽을 때까지 잊지 못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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