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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부아빠 Nov 12. 2021

앉으나 서나, 당신 생각....

우리 집 내일 저녁 메뉴는 삼겹살 구이입니다.

 2001년 어느 여름날, 할머니는 거동이 불편한 노인분들을 모시고 교회와 시내를 다니시겠다며 운전면허 시험에 도전하셨습니다. 가족 모두가 말렸지만, 할머니의 고집을 꺾지 못했습니다. 할머니는 2년 만에 운전면허 시험에 합격하셨습니다. 그 해, 나이가 73세였습니다. 


 할머니는 아직도 말과 발음이 분명하고 걸음걸이 또한 흔들림이 없으십니다. 긍정적인 사고와 화통한 성격 덕분에 몸과 마음이 쉽게 늙지 않으신 모양입니다. 초등학생 때 할머니와 손잡고 다니면, 사람들은 늦둥이 아들이냐며 둘 사이를 모자(母子) 관계로 바라보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할머니도 재밌다는 듯이, 몰래 낳아온 아들이라며 나에게 인사를 시키곤 하셨습니다. 이렇게 건강하시던 할머니께서 병원에 입원하셨습니다. 식사하시러 부엌을 다니시다가 넘어지셨습니다. 


 나는 어머니와 고모님을 모시고 전남 나주로 출발했습니다. 도착한 병원에서 의사 선생님을 만났습니다. 할머니는 이뇨 작용을 억제하는 약과 촉진하는 약을 함께 먹고 계셨습니다. 이로 인해, 할머니는 몸에 힘이 빠지는 부작용이 생겼습니다. 의사 선생님은 할머니가 무엇 때문에, 어떤 약을 드시는지 정도는 가족들이 알고 있어야 한다며 어머니와 고모님을 야단치듯이 말씀하셨습니다. 30대 중반의 의사 선생님 앞에서 우리 가족은 노부모를 방치한 불효자가 되었습니다. 


 사흘 뒤, 다시 나주로 내려가서 할머니를 퇴원시켰습니다. 집으로 돌아오신 할머니는 집이 제일 좋다며 좋아하십니다. 할머니는 나를 찾으며 물으십니다.     


“우리 손주... 올해 몇 살이지? 40이 넘었지?”     


할머니 침대를 정리하시던 어머니는 손주도 이제 50이 되었다며 웃으십니다. 할머니는 박장대소하시며 아이고~ 벌써!라는 말씀만 반복하십니다.     


“시간 참 빠르다. 세월 참 빨리 간다. 벌써 50이라고!. 허허허....”


 우리는 서울을 향해 고속도로를 달리고 있습니다. 어머니는 뒷좌석에서 반쯤 누운 자세로 주무십니다. 조수석에는 목베개를 하고 천장을 향해 입을 벌리신 고모님이 시체처럼 누워계십니다. 나는 ‘시간 참 빠르다’라는 할머니의 탄식을 곱씹으며 운전을 합니다. 50세까지도 시간이 참 빠르게 지나왔음을 실감합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뭐 하면서 살아왔는지를 생각합니다. 


 10대 때는 친구들과 노는 게 전부였고, 20대는 여자친구들(?)과의 추억뿐입니다. 사랑이 뭔지도 모르는 시절입니다. 만나면 좋고 헤어지면 또 보고 싶고, 서로의 집까지 바래다주기를 반복하다가 새벽에 집에 들어갔고, 여자 친구가 가지고 싶다던 선물을 사주기 위해서 아르바이트까지 했습니다. 몸은 힘들고 피곤했지만, 사랑하는 여자 친구만 생각하면 힘이 솟는 시절이었습니다. 30대는 공부하면서 시간을 보냈습니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공부’해 본 경험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습니다. 40대는 ‘가족’과 함께 살았습니다. 결혼하고 가정을 꾸렸습니다. 가족이 세상의 전부라고 여겼습니다. 새벽에 나가서 자정이 넘게 귀가해도 잠자고 있는 가족들 얼굴만 보면 웃음이 저절로 나왔습니다. 잠자는 아이들의 얼굴을 만지는 것도 좋았고, 비몽사몽 눈을 뜨지 못하면서도 ‘아빠~’라고 중얼거리는 한 마디 때문에 행복의 눈물을 흘리기도 했습니다. 


 지금, 50대는 ‘아내’와 시간을 보내며 살고 있습니다. 언젠가부터 무슨 일을 하든지 아내가 옆에 있어야 안심이 됩니다. 이전에는 내가 좋아하는 운동을 찾아다녔지만, 지금은 아내와 함께 할 수 있는 운동을 찾게 됩니다. 별것 아닌 선택과 결정도 아내와 상의하는 일이 많아졌고, 비싼 호텔의 코스요리보다 아내가 만들어주는 볼품없는 김밥이 더 맛있습니다. 좋은 곳에 가면 함께 오지 못해서 미안해하고, 더 좋은 인생을 살게 해 주지 못한 미안한 마음은 내 몸속 장기처럼 어디 한 곳에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한밤중이 되어서 우리 차는 서울 요금소를 빠져나왔습니다. 요금을 알려주는 하이패스 음성 소리에 어머니와 고모님은 동시에 잠에서 깨셨습니다. 피곤해서 어떻게 하냐며 어머니는 아들 걱정뿐입니다. 가족 중에 누가 아프거나 죽어야 얼굴 한번 본다는 말이 맞다며 고모님은 자주 보지 못함을 아쉬워하십니다. 


 차 안에는 싱싱한 갓 냄새가 가득 찼습니다. 할머니 댁 앞마당 구석에서 자라던 보랏빛 갓김치를 수확했습니다. 고기를 알싸한 맛이 나는 갓김치 잎사귀에 싸 먹는 걸 좋아하는 아내를 생각하니 피곤한 어깨가 가벼워집니다. 우리 집 내일 저녁 메뉴는 삼겹살 구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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