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밥을 하지 않았습니다. 어제저녁에 지어놓은 밥이 남았습니다. 2인분 정도의 분량입니다. 밥을 새로 짓기에 애매한 분량입니다. 아이들이 먹을 양은 충분합니다. 밥솥에 남은 밥을 재가열로 데웠습니다. 아이들 밥그릇에 밥을 담고 나니, 밥솥이 비었습니다.
국도 끓이지 않았습니다. 밤에 끓인 육개장은 아침에 아이들이 먹을 만큼 남았습니다. 저녁 메뉴를 고민하면서 냉장고를 열었습니다. 야채칸에 먹고 남긴 야채들이 보였습니다. 썰어 놓은 무와 봉지에 남아있는 콩나물이 보이기에 육개장을 끓였습니다. 육개장에 어울리지 않는 남은 야채들까지 몽땅 넣어서 끓였습니다.
육개장은 육개장인데..... 를 중얼거리며 아이들은 맛있게(?) 저녁을 먹었습니다. 남은 야채를 처리해야 한다는 마음이 컸습니다. 재료를 넣다 보니 육개장 국물이 당초 계획보다 많아졌습니다. 저녁에 남긴 육개장을 아침에 다시 끓여서 국그릇에 담았습니다.
아빠만을 위한 1인분 취사는 포기했습니다. 혹시 아이들이 먹고 남긴 밥이 있다면 그걸로 아침밥을 때울 참이었습니다. 아이들은 밥그릇을 깨끗하게 비웠습니다. 아이들은 아직 아빠의 마음을 헤아릴 나이가 아닌가 봅니다.
아침부터 굶기는 싫습니다. 오랜만에 아메리칸 스타일로 아침을 먹기로 했습니다. 아껴두었던, 원두커피를 갈아서 내렸습니다. 진한 커피 향은 육개장의 매콤한 향을 이깁니다. 토스트기에서 빵을 구웠습니다. 따끈한 빵 위에 좋아하는 땅콩 잼을 발랐습니다.
커피 한 모금을 마셨습니다. 알싸한 커피는 두리뭉실한 아침 기분을 맑게 바꿔놓습니다. 바사삭 거리는 식빵 소리에 덜 깬 잠이 사라집니다. 달달한 사과의 맛과 향은 분주함이 가득한 무거운 아침을 즐겁고 경쾌하게 만들어 줍니다.
아메리칸 스타일의 아침을 즐기다 보니, 아이들에게 찬밥을 데워주고 먹고 남은 국을 다시 내어준 미안함이 사라졌습니다.
시험이 끝난 큰 아들은 시험 끝난 기념으로 친구들과 점심을 사 먹고 놀다 올 예정입니다. 작은 아들도 덩달아서 친구들과 점심을 사 먹고 싶다며 점심값을 받아서 나갔습니다. 오랜만에 혼자만의 점심을 먹게 되었습니다.
냉장고 안에는 며칠 전에 먹고 남은 반 그릇 분량의 된장국이 있습니다. 아침까지 먹고 남은 육개장도 반 그릇 정도 남았습니다. 밥솥에 쌀 1인분을 담으려다 말고, 냉동실을 열어서 얼려놓은 찬밥을 찾았습니다. 비닐봉지채 얼려진 찬밥 두 덩이를 찾았습니다. 점심 밥 짓기는 포기했습니다. 찬밥을 꺼내서 전자레인지용 용기에 담았습니다. 몇 분의 해동과 몇 분의 가열로 윤기 없는 뜨거운 밥이 완성되었습니다.
데워진 밥은 된장국과 육개장에 나누어 담았습니다. 짭짤한 된장국과 매콤한 육개장에 말아놓은 밥을 번갈아가면서 먹었습니다. 먹다 보니, 입 안에서 구수함과 매콤함, 짭짤한 맛과 쌉쌀한 맛이 동시에 느껴집니다. 식사가 끝나도 입안에는 묘한 여운이 남았습니다.
입가의 개운함을 날릴 수 있는 건, 달달한 믹스커피뿐입니다. 치우지도 않은 식탁에 뜨거운 믹스커피 한 잔을 들고 다시 앉았습니다. 몸속으로 들어가는 믹스커피 한 모금이 배부른 뱃속의 포만감을 극대화시켜줍니다. 식탁 위에는 다 먹은 국그릇 두 개가 남아있습니다. 방금 전, 된장국과 육개장을 동시에 먹었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다 마신 커피잔 속에 녹지 않은 믹스커피 찌꺼기가 보입니다. 생각해보니, 믹스커피를 마실 때마다 녹지 않고 붙어있는 커피 찌꺼기가 있었습니다. 주전자에 남아있는 뜨거운 물을 다시 담았습니다. 커피잔을 살살 돌려가며 모두 녹여냅니다.
컵 속에 붙어있는 녹지 않은 커피와 냉장실 구석에서 발견한 찬밥 덩어리가 왠지 나처럼 느껴집니다. 견디고 버텨며 살아남으려는 것처럼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