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거지학 개론

설거지를 하면서 내가 달라졌습니다.

by 주부아빠

설거지를 하면서 내가 달라졌습니다. 우선, 잡념이 없어졌습니다. 잡념이 사라지면 삶을 반성합니다. 반성이 끝나면 나 자신과 대화를 시작합니다.


설거지는 잡념을 날려버립니다. 주부아빠를 시작하면서 매일 식사를 차려주고 치웠습니다. 때로는 부모님께 얻어먹거나 음식을 받아서 먹기도 했지만, 설거지는 꼭 해야 하는 필수 일과입니다. 주방에 쌓여있는 식기를 보면 힘들 때도 있습니다. 이걸 언제 다 끝내나... 하는 한숨이 나오기도 하지만, 막상 설거지를 시작하면 시간이 가는 줄 모르고 끝납니다.


머릿속은 고요해집니다. 걱정과 염려, 잡념과 망상이 사라집니다. 음식물 찌꺼기가 묻은 그릇들을 비비고 닦기 시작하면 머릿속 잡념도 말끔하게 씻깁니다. 세제 거품에서 행복감을 느끼기도 합니다. 거품이 잘 우러나면 개운함과 청결함의 기대감이 생기고 식기들이 깨끗하게 닦일 때마다 행복하기까지 합니다. 깨끗해진 식기를 손으로 훔쳐서 뽀득뽀득한 소리가 잘 들리면 내 마음과 생각도 정화된 기분입니다.


설거지는 삶을 반성하게 만듭니다. 가족들이 먹은 그릇들을 보면서 그날 준비한 음식의 성공 여부를 따집니다. 밥이 남았으면, 밥 물의 양을 다시 생각하고 불려 놓은 쌀의 상태를 다시 생각합니다. 반찬이 남았으면, 남겨진 반찬을 다시 맛보며 음식의 간을 다시 고민합니다. 국그릇에 국이 남았는지, 건더기가 남았는지도 따라서 다음에 끓일 국을 생각합니다. 설거지는 가족을 향한 나 자신을 반성하며 뒤돌아 보게 만듭니다.


반성이 끝나면 자신과 대화를 합니다. 아침 설거지를 하면서 점심 준비를 생각합니다. 점심 설거지를 하면서 저녁에 뭘 먹을지는 고민합니다. 저녁 설거지를 하면서 내일 식사를 계획합니다. 다음 먹거리에 대한 생각과 고민을 자신과 대화하며 준비합니다.


설거지를 하면서 냉장고와 냉동고에 뭐가 있는지도 생각해야 합니다. 재료들로 만들 수 있는 게 뭐가 있는지를 고민하고 계획한 음식을 아이들과 아내가 좋아할 것인지를 혼자서 질문하고 혼자 대답합니다. 이러다 보면 설거지는 끝납니다.


설거지의 마무리는 개수통에 담긴 음식 쓰레기를 배우는 일입니다. 그리고 싱크대 주변 물기를 말끔하게 닦아냅니다. 고무장갑을 벗고 손을 씻습니다. 손가락에 생긴 주부습진 주위에 약을 발라 줍니다. 식탁에 앉아서 잘 정리된 주방을 바라보면 마음이 평온해집니다.


큰 일을 끝낸듯한 만족감은 커피 한 잔의 행복으로 정점을 찍습니다. 커피 주전에 물을 담고 불을 켭니다. 기분 좋게 커피를 찾고 있을 때, 큰 아들이 어제 먹은 컵과 접시를 식탁 위에 놓고 갑니다.


순간, 내 마음은 일시정지 상태가 됩니다. 커피의 행복은 금세 사라졌습니다.ㅜㅜ

이전 07화좀약 냄새라도 괜찮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