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에게서 문자가 도착했습니다.

오늘은 아내가 다시 여자가 된 날입니다.

by 주부아빠

점심을 먹고 커피 한 잔의 여유를 부렸습니다. 식탁 위에 놓여있는 반찬들은 뚜껑만 닫아놓고 그대로입니다. 싱크대에 씻어야 할 그릇들도 그래로 두었습니다. 오랜만에 누리는 혼자만의 시간입니다. 창문으로 들어오는 따스한 가을 햇살과 얼굴을 마주합니다. 이렇게 가을을 누리고 있다 보니 정리하고 치워야 할 일들을 잠시 멈추었습니다. 지금의 게으름은 나만의 행복입니다.


행복한 게으름이 채 끝나기도 전에 아내에게서 문자가 도착했습니다.


퇴근시간에 맞춰서 회사로 나오라는 간단한 문자입니다. 아내가 계획에 없는 호출을 했다는 것은 일이 생겼다는 뜻입니다. 늦지 않게 나가겠다고 답장을 보냈습니다. 진한 향을 음미하며 조금씩 마시던 커피를 두세 번 만에 비웠습니다. 그리곤 갑자기 바쁘게 움직였습니다.


오후 내내 아내의 문자가 신경입니다. 지난 며칠 동안의 기억을 더듬었습니다. 휴대폰에 저장된 캘린더를 확인해 보았습니다. 특별한 이벤트나 챙겨야 할 일은 없습니다. 내가 말실수를 했거나 잘못한 행동이 있는지를 곱씹어 보았지만, 별문제를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오후에 귀가한 아이들에게 학교에서 별일이 없었는지도 확인했습니다. 학교 선생님께서 엄마에게 전화할 일은 없었는지도 물었습니다. 아이들은 그런 일은 없었고 말합니다.


도무지 알 수 없습니다. 아내가 왜 호출을 했는지......


조금 일찍 아내의 회사로 출발했습니다. 가는 동안 머릿으로 며칠 동안의 삶을 돌려보고 또 돌려보았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일은 없었습니다. 내가 알아차리지 못하는 무슨 일이 있었을 거라는 불안함이 나를 더 긴장하게 만듭니다.


아내는 이미 회사 앞에 나와 있습니다. 차는 주차장에 주차하고 나오라고 말합니다. 그리곤 조금 걷자고 합니다. 마음속은 불안과 긴장감뿐입니다. 아무 말 없이 걸었습니다. 나는 아내가 가는 방향으로 따라갔습니다. 아내는 창경궁 입구 앞에서 멈춰 섰습니다. 그리곤 창경궁으로 들어가자며 내 손을 잡고 앞장서서 끌고 갑니다.


어수선한 내 마음과 달리, 가을 하늘은 아름답습니다. 창경궁의 조명과 가을 하늘이 기가 막히게 어울립니다. 아내는 신난 표정으로 창경궁의 이곳저곳을 돌아다니기 시작합니다. 아내는 아름답고 예쁜 가을 하늘을 모두 담으려는 듯 휴대폰으로 쉬지 않고 사진을 찍습니다.


한참 후, 아내에게 무슨 일이 있었냐며 물었습니다. 아내는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아무 일 없다고 말합니다. 오늘 가을 하늘이 좋아서 창경궁이 생각났을 뿐이랍니다. 그러면서 한마디 더 합니다.


"내가 가을 좋아하는 것 몰랐어요?"


아내는 가을을 좋아하는 여자입니다. 일출보다 일몰이나 노을을 더 좋아합니다. 또 아내는 가수 이문세를 좋아합니다. 결혼 전에는 이문세 팬클럽 <마구간> 모임에 매년 참석할 정도로 열성 팬이었습니다. 아내는 커피보다는 차를 더 좋아하고, 영화보다는 뮤지컬을 좋아합니다. 고기보다는 회를 좋아하고, 때로는 스테이크보다는 신당동 떡볶이를 좋아합니다. 겨울에 어묵 국물에 시원한 사케 한 잔을 좋아하고 아이스크림은 함께 떠먹는 투게더 보다 한 조각씩 먹기 좋은 티코를 더 좋아하는 여자입니다.


그러고 보니, 집에서 아이들을 챙긴다며 아내에게 소홀했습니다. 아내는 엄마이고 아내 이전에 여자였는데 말입니다.


오후 내내 긴장감과 불안함으로 보낸 나 자신이 후회스럽고 아내에게 미안합니다. 아내에게 선물이라도 해야겠다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가을 어느 날, 조명이 아름다운 창경궁에서 탈춤으로 아내에게 웃음을 선물했습니다. 오늘은 아내가 다시 여자가 된 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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