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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부아빠 Sep 30. 2021

함께 늙어갑니다.

우리는 영화 같은 삶이 아닌 현실적인 부부입니다.

 아들이 다니는 학원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아들과 수업을 함께 받는 학생이 확진자로 판정받았다는 것입니다. 우리 가족은 곧바로 임시 선별 검사소에서 검사를 받았습니다. 검사 결과가 음성으로 나오기를 기도할 뿐입니다. 지난 며칠 동안의 동선을 곱씹으며 만났던 사람들에게 지금의 상황을 알렸습니다. 검사 결과가 양성이라면, 나뿐만 아니라 나를 만났던 사람들과 그들의 가족까지도 문제가 발생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음 날 오전에 가족 모두 음성이라는 문자를 받았습니다. 검사 결과를 주변 사람들에게 다시 알렸습니다. 코로나19의 시대는 개인의 문제가 그룹이나 집단, 나아가 사회 전체의 문제임을 다시 한번 경험했습니다.


아내도 음성 판정을 받았지만, 회사로부터 하루 더 쉬고 출근하라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코로나19 덕분에 아내에게 휴가가 생겼습니다. 아내의 휴가를 집에서만 보내게 둘 수 없습니다. 숲을 좋아하고 걷기를 좋아하는 아내에게 '서울 한양도성 스탬프 투어'를 가자고 제안했습니다. 이 프로그램은 서울 사대문인 숭례문, 흥인지문, 숙정문, 돈의문을 조선 시대 석조 성곽을 따라서 서울 한 바퀴 걷는 투어입니다. 코스를 완주할 때마다 확인 스탬프를 찍고, 모두 완주하면 기념 배지까지 받을 수 있습니다. 아내는 이런 것을 어떻게 찾았냐며 좋아합니다. 


아내는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완주 배지를 받고 싶다는 소망을 말합니다. 아내는 시작하면 끝까지 해야 하는 사람입니다. 결혼 전, 마라톤 코스를 완주까지 할 정도로 성취욕이 강합니다. 나보다 체력과 지구력이 우수합니다. 빠르게 달리지는 못해서 긴 거리를 일정하게 걸을 수 있는 강인한 체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아마도 아내는 이 프로그램을 완주하자며 나를 귀찮게 할 것입니다. 


우리는 집에서 가장 가까운 한양도성 제1코스(혜화문~광화문)를 선택했습니다. 삼선교에서 출발해서 광화문 뒤편 부암동까지 걷는 길입니다. 북악산을 넘어가야 하기에 가장 힘든 코스지만, 산길을 걸으며 서울 시내의 다양함이 보이는 재미난 길이라며 다녀온 사람들이 추천한 코스입니다.


버스를 타고 삼선교에 내려서 출발지점인 혜화문을 찾았습니다. 그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고 출발했습니다. 산길에서 가장 먼저 만나는 곳은 혜화동입니다. 나는 혜화동을 보면서 내가 태어나고 자라난 옥수동의 옛 모습과 닮았다며 아내에게 어린 시절 추억을 이야기합니다. 혜화동을 지나면 성북동이 보입니다. 성북동은 자신이 태어나고 자란 동네라며 지붕만 보고도 집과 동네 곳곳을 아내가 설명합니다. 북악산 정상을 지나면 보이는 동네는 평창동입니다. 이곳에서는 마당 넓은 부잣집들의 화려함을 보면서 우리도 언젠가는 저런 집에 살아보자며 다짐을 합니다. 도착지점에 거의 다다르면 경복궁이 내려다보입니다. 경복궁은 뭐라고 표현하기 어려운 근엄함이 느껴집니다. 산길을 걸으며 펼쳐지는 서울 풍경은 총 6km의 거리를 지루하지 않게 만듭니다. 

성곽을 따라서 걷는 길 위에서 가을로 물드는 나무들을 만났습니다. 길을 걷고 산을 오르면서 계절의 변화를 몸으로 느꼈습니다. 걷다 힘들면 잠시 멈춰서 가지고 간 커피를 아내와 마셨습니다. 커피를 마시는 아내의 얼굴에는 피곤함과 행복함이 모두 담겨있습니다. 커피의 향기는 북악산의 가을을 더욱 진하게 만듭니다. 


언제부터인지 우리 부부는 손을 잡고 걷습니다. 오르고 내려가야 하는 길에서 아내의 손을 잡아주었습니다. 아내는 이렇게 손잡고 걷는 일이 참 오래간만이라며 좋아합니다. 가족 사이에는 이러면 안 된다는 말을 꾹 참았습니다. 손을 잡아 본 기억이 오랜만이란 말이 마음에 남습니다. 아내를 위해 코스가 끝날 때까지 손을 놓지 않고 걸었습니다.


코스의 목표지점에 도착하면, 확인 스탬프를 찍어야 합니다. 그리고 근처 맛집을 검색해서 점심을 먹었습니다. 포기하지 않은 것에 대한 칭찬과 보상입니다. 아내가 꼭 한번 먹어보고 싶었다던 기름떡볶이를 시작으로, 줄을 서야 먹을 수 있는 평양냉면, 전국에서 먹으려고 온다는 아이스크림, 해물 칼국수 성지라고 추천하는 맛집까지 코스가 끝날 때마다 맛집을 찾아다녔습니다. 


지난 주말, 드디어‘서울 한양도성 스탬프 투어’를 완주했습니다. 모든 코스마다 확인 스탬프를 찍었고, 마지막 코스를 끝내고 완주 배지를 받았습니다. 완주의 이유는 아내의 불타는 성취욕구 때문만은 아닙니다. 아내와 함께 주말마다 걷는 일에 재미가 생겼습니다. 서울 여행의 재미도 있었고, 맛집에서 먹는 즐거움도 있었지만, 오랜만에 아내의 손을 잡고 걷는 행복함이 더 큰 즐거움이었습니다. 함께 걸으며 많은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자녀들의 생활과 교육을 포함해서, 우리 가정의 미래와 앞날에 대한 계획까지 서로의 생각과 염려를 함께 고민했습니다. 주말마다 3~4시간씩 걸어보니, 발과 허리는 아프고 힘듭니다. 하지만, 걸으면서 아내와 더 가까워졌습니다. 아내의 손을 자주 잡았고, 서로의 마음을 더 많이 알게 되었습니다. 상대방의 마음을 이해하고 느낄 수 있게 된 시간이었습니다. 


마지막 코스를 끝내고, 후들거리는 다리를 진정시키며 집으로 향했습니다. 집까지는 버스를 탔습니다. 아내는 버스에 타자마자 잠들었습니다. 내 어깨에 기댄 아내의 머리에서 땀 냄새가 올라옵니다. 졸고 있는 아내의 얼굴은 처음 코스를 시작할 때와 달리, 더 늙어 보입니다. 문득, 늙어가는 세월을 이렇게 함께 보낼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함께 늙어가는 것이 행복임을 처음 느꼈습니다.


다음 정거장에 내려야 하는데, 아내는 아직도 잠은 잡니다. 아내의 무거운 머리를 받쳐준 내 어깨가 너무 아픕니다. 아프기 시작한 어깨 통증은 허리까지 전달되어 더는 참을 수 없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아이들이 학원 수업을 끝내고 집에 도착할 시간입니다. 빨리 가서 저녁 준비를 해야 합니다. 드라마나 영화에서는 졸고 있는 상대방을 위해서 자신이 내려야 할 정거장을 그냥 지나칩니다. 하지만 우리는 영화 같은 삶이 아닌 현실적인 삶을 살아가는 중년의 부부입니다. 나는 아내를 깨웠습니다. 자다 깬 아내의 얼굴은 아침보다 더 나이가 들어 보입니다.


버스에서 내렸습니다. 저린 어깨를 두드리며 걷는 나에게 아내가 왜 그러냐며 묻습니다. 무거운 머리 때문에 손과 팔이 저리고 어깨와 허리에 통증이 왔다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코스 완주 후 긴장이 풀린 것 같다며 둘러댔습니다. 아내는 “우리도 이젠 늙었어요”라고 말합니다. 아내는 다시 손을 잡고 걷기 시작합니다. 


우리 부부는 이렇게 함께 늙어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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