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소중한 보물들
어릴 때 나에겐 50개의 보물이 있었다.
엄마가 사주신 50권짜리 소년소녀 세계명작 전집이다. 어릴 때 기억은 별로 없는데 이 책들의 내용은 생생히 기억에 남아 있다.
책을 좋아해서 20권짜리 전래동화를 마르고 닳도록 읽던 나에게 사주신 전집은 그야말로 온 세상을 여행하는 창구였다.
책을 펼치면 엘리스와 함께 이상한 나라로, 도로시와 함께 오즈로, 닐스와 함께 하늘을 날고, 알라딘과 하늘을 나는 양탄자를 , 걸리버 여행기의 소인국에 , 돌리틀 선생과 항해를 했다.
신기한 모험뿐만 아니라 세계 각국을 다니기도 했다
소공녀 세라와 영국, 알프스 소녀 하이디와 스위스를, 키다리 아저씨와 작은 아씨들과 미국에, 톰 소여의 미시시피, 삼총사와 프랑스를, 빨간 머리 앤과 캐나다에 , 로빈슨 쿠 루소와 무인도, 엄마 찾아 삼만리의 레미와 이탈리아에서 아르헨티나로, 플란다스의 개 네로와 네덜란드를, 정글북의 인도, 그리스 로마 신화, 손오공과 고대 중국을 , 아라비안나이트의 신밧드와 온세계를 다니며 상상여행을 했다.
실제론 여행을 많이 가기 힘들었지만 책을 통해 다른 나라 사람들의 삶과 풍경을 상상하고 간접체험을 할 수 있었다.
책 속의 삽화를 보는 재미도 쏠쏠했고 따라 그려보기도 했다. 책들의 흥미진진한 이야기도 너무 재밌었다. 주인공들은 대부분 고아이거나 힘든 환경에 처해있는 경우가 많고 그런 상황을 헤쳐 나가는 이야기가 많다.
주인공들은 처한 상황이 힘들지만 좌절하지 않고 희망을 가지고 자신의 삶을 특별하고 빛나게 한다.
고아에 하녀가 된 세라가 품위를 잃지 않고, 상냥하고 천진난만한 세드릭이 얼어붙은 할아버지의 마음을 녹이고, 로빈슨 크루소가 무인도에서도 강한 의지로 살아낸다.
말썽꾸러기 톰 소여의 외로운 마음도 같이 공감하고 느끼고, 빨강머리 앤의 소녀감성, 올리버 트위스트의 서러움과 장발장의 험난한 삶을 통해 주인공들의 입장이 되어보면서, 주인공들과 웃고 울고 나도 책 속의 한 인물이 되어 그 속에 함께 살았다.
학교를 마치고 집으로 오면 50권 책장 앞에서 오늘은 뭐 읽을까 고민을 하고 고르는 행복, 책을 읽으면 주변이 시끄러워도 상관없고 더운지 추운 지도 밤이 새는지도 모르고 몰입했다.
그야말로 무아지경이었다.
방학이 되면 이모집으로 가서 거의 방학 내내 있었는데 이모집엔 무화과나무가 있는 정원이 있었고 거실에 소파도 있었다.
무엇보다도 우리 집보다 열 권이 많은 60권의 전집이 있었다. 내 책과 출판사가 달라 구성이 다르고 책의 삽화도 달라 또 다른 읽는 재미가 있었다. 내 책에 없는 책들도 있어서 방학 내내 책을 읽었던 기억이 있다.
사촌들은 남자애들이라 하루 종일 나가 놀고 나는 거실 소파에 앉아 하루 종일 책을 읽었다.
한 날은 고등학생이던 큰오빠가 친구들과 집에 들어왔는데 책 읽고 있던 나를 '하루 종일 책만 읽는 책벌레'라고 친구들에게 소개를 할 정도였다.
얼마나 몰입을 했는지 거실 소파에 앉아 명탐정 홈즈 시리즈를 읽었던 날엔 마지막 편 얼룩 끈 이야기에 오싹해 보니 어두컴컴해져 있었다. 낮에 읽기 시작했는데 문득 정신을 차리니 해가 져 있었다. 시간이 어찌 갔는지도 몰랐다.
나는 왜 그렇게 책을 읽었을까?
사실 가난한 우리 집, 힘든 엄마를 보면서 어릴 때 나는 우울했다. 단칸방에 할머니까지 일곱 식구가 살면서 자기 방이 있는 친구들을 부러워하며 쉽게 바뀌지 않는 우리 집 환경을 외면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싶다. 장녀였던 나는 동생들보다는 집안의 사정이 더 눈에 들어왔고 돈 때문에 힘들어하는 엄마를 보는 게 괴로웠다.
당장 내가 해결할 수도 없는 우리 집 상황에서 벗어나고 싶은 나의 심리가 책 속에 빠지게 한건 아닌지 모르겠다. 어쨌든 책을 읽으면 다른 건 다 잊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나보다 힘든 주인공들을 보며 용기가 생기고 힘들고 어려워도 이겨내며 불의를 보면 분노하고 약자의 편에 서는 올곧은 사람이 되겠다 다짐도 했다. 책이 나의 성품과 가치관을 심어준 것 같다.
그중에서도 특히나 내가 좋아했던 책은 작은 아씨들이다. 정말 마르고 닳도록 읽었다.
작은 아씨들에는 메그, 조우, 베스, 애이미 네 자매가 나온다. 각각 다른 개성을 가지고 있으면서 우애 있는 자매들이다.
메그는 여성스럽고 상냥하고, 조우는 남자 같고 털털하며 책을 좋아하는 작가 지망생, 베스는 조용하고 착하고 여리며 피아노를 좋아하고, 애이미는 그림을 잘 그리는 새침한 철부지 막내이다.
우리 자매도 네 자매인데 어떻게 보면 작은 아씨들과 비슷하다. 성격들도 비슷해 우리 자매들과 닮았다.
넷 중 조우는 나랑 비슷한 면이 많은데 책을 좋아하고 털털하며 멋이라고는 모르고 불의를 보면 불같이 화를 내고 성격이 급하다.
우리 집엔 없었던 작은 아씨들 속편을 이모집에서 발견해 읽어 보았는데 매그는 결혼해서 쌍둥이를 키우는 가정주부가 되고, 조우는 작가가 , 에이미는 조우의 절친 로리와 결혼해 부자가 된다.
그리고.... 셋째 베스는 어릴 때 성홍열에 걸려 약해진 몸이 회복되지 않고 쇠약해져 결국 일찍 죽는다.
베스와 제일 친했던 조우는 누구보다 슬퍼하고 힘들어한다. 나는 조우로 빙의되어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우리 자매도 어릴 때 우리끼리 정말 재밌었다.
인형놀이 , 소꿉놀이, 연극놀이 등 작은 방에서도 재미나게 놀았고 커서도 친구처럼 잘 지내고 있다.
물론 싸우기도 많이 했지만.. 그래도 자매가 많아서 외롭지 않고 북적북적 재밌었다.
그중 셋째 동생은 우리 자매 중 제일 예뻤고 정말 착하고 너그러운 성격이라 우리 자매들의 중재자 역할을 했다. 그런 동생은 베스랑 많이 닮았었다.
그런데 내 동생도 베스처럼 일찍 세상을 떠났다. 조카를 출산하고, 산후 출혈이 심해 응급 수술 도중 견디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우리 자매들은 얼마나 슬펐는지 모른다.
작은 아씨들처럼 우리도 베스를 잃었다...
대신 동생이 남긴 딸을 우리는 동생이라 여긴다. 동생처럼 예쁘고 착하다.
작은 아씨들의 작가 루이자 메이 올컷도 네 자매인데 작가의 동생도 일찍 세상을 떠나서 작가가 조카를 키웠다고 한다. 자전적 소설이기도 한 작은 아씨들은 지금도 사랑받는 작품이다.
어린 시절 책과 함께 살았던 나는 책이 친구이고 스승이었다. 궁금하면 책을 읽고 또 다른 재밌는 책이 없나 찾았다. 오죽하면 새 학기 새로 받은 교과서도 재밌게 읽었을까.
서점을 하시는 이모할머니 댁에 두 달간 아르바이트를 한 적이 있다. 서점은 나에게 엄청난 보물창고였다. 한 번은 책을 정리하다 읽게 되어 손님이 부르는 것도 못 듣고 있다 할머니에게 혼난 적도 있다.
그냥 하루 종일 책만 읽고 싶었다. 일이 끝나면 읽고 싶은 책 몇 권 들고 와 밤새 읽기도 했다.
아르바이트가 끝나고 돌아올 때 읽고 싶은 책을 마음껏 골라가라는 할머니가 얼마나 고마웠는지.
한 보따리 챙겨 오면서 보물섬에서 보물을 찾아 돌아오는 느낌이었다.
요즘도 나는 책을 많이 읽는다.
힘들 때도 책을 통해 답을 찾고 새로운 지식을 알아감에 즐거움이 있다. 출근길 지하철에서 책을 읽다 내릴 곳을 지나친 적도 많고 밤을 새기도 한다.
하지만 커서 읽는 책은 그렇게 기억에 남지 않는다.
어릴 때 읽었던 책들은 내 마음에, 머리에 저장되어 있는데 말이다.
그만큼 순수하게 받아들이는 감성이 예전과 달라져서 그런 것 같다.
지금도 어릴 때 읽었던 책이 한 번씩 그리울 때가 있다. 어릴 때 그 전집은 내가 커서 성인이 되고 이사를 가면서 옆집 아이에게 주었는데 지금 생각하면 간직할 걸 하고 후회가 된다.
아쉬움에 다른 버전으로 책을 사서 모았다.
어릴 때 읽었던 추억의 책과는 다르지만 책은 곧장 나를 어린 시절 책벌레로 돌아가게 한다.
하지만 어릴 때의 감성과는 또 다른 눈으로 보게 된다.
나를 꿈꾸게 하고 세계를 여행하게 해 준 나의 책들....
나의 보물들은 지금 어디에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