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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묵자 Apr 12. 2017

당연해 보이는 것은 결코 당연하지 않다

가스 데이비스 '라이언(LION)'

누구나 영화를 볼 때면 항상 무언가 기대하는 점이 하나 씩 있을 것이다. 하지만 기대하는 대로만 영화가 흘러가고 예상했던 대로만 감정이 자극된다면 그 영화는 큰 여운이 남지 않는다.

묵직한 감동은 예기치 못한 메시지에서 온다.



영화 '라이언'은 사루라는 청년이 '구글 어스'라는 프로그램으로 어린 시절의 집을 찾아가는 내용의 작품이다. 인도에서 형과 여동생, 어머니와 살았던 어린 꼬마 사루는 순간의 어긋남으로 인해 미아가 된다. 어디로 향하는 지도 모르는 기차에 몸을 맡기고 낯선 도시에 도착한 그는 힘든 나날을 보낸다. 이리저리 방황하다 고아원에 간 사루는 좋은 인연이 닿아 호주의 한 가정으로 입양을 가게 되고, 그렇게 25년을 호주에서 성장한다. 어느날 고향에 대한 향수가 짙어진 사루는 '구글 어스'를 통해 유년기의 기억을 더듬기 시작하고, 결국 가족과 재회하는 데 성공한다.



포스터와 시놉시스만 보면 잃어버린 가족을 찾아가는 ‘로드무비’ 정도로 보이는 이 영화는  예상과는 사뭇 다른 방식으로 전개된다. 먼저 어린 사루와 청년 사루의 이야기는 거의 같은 비중으로 다루어진다. 비슷한 장르에서 짧게만 보여주던 어린 시절을 한 시간 가량 보여주며 굉장히 지루하게 흘러갈 수 있었던 '라이언'의 초반부는 어린 사루 역을 맡은 꼬마 아이의 연기력 하나에 의존한다. 작은 체구로 일을 돕겠다고 형에게 매달리던 어린 사루가 겪는 이별과 슬픔, 좌절과 분노, 그리고 작은 희망은 그의 두 눈동자를 통해 가감 없이 표출된다. 첫 작품이라는 것이 믿기 어려운, 무덤덤하면서도 애처로운 그의 연기는 웅장한 자연 환경과 음악을 만나 절로 탄식을 자아내게 만든다.


어른이 된 사루가 집을 찾아가는 과정 또한 예상과 달리 과감하게 생략된다. 영화는 낳아준 부모와 키워준 부모 사이에서 끊임없이 고민하는 사루의 고뇌를 정밀히 묘사한다. 스치듯 느껴오던 고향에 대한 향수는 어느 순간 그의 삶에서 영역을 키워나갔고, 그는 고통 받기 시작한다. 특히 자신을 키워준 부모에 대한 죄의식 때문에 고향을 찾는 다는 사실을 숨기며 혼자서 앓기 시작한다. 현재의 부모님이 이 사실을 알게 된다면 혹여나 상처를 받지는 않으실까 걱정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그는 용기를 내어 어머니에게 이야기를 하러 갔고, 둘은 심도 깊은 대화를 나눈다. 이때 두 사람이 하던 대화 중 사루의 새엄마 수 브라일리의 한 대사는 정말로 큰 감동으로 다가왔다.


사실 나는 불임이 아니란다.


'나는 진짜 아들이 아니잖아요. 어머니가 불임이 아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요?'라는 아들의 말에 대한 어머니의 답변이다. 사루와 나는 동시에 왈칵 눈물이 쏟아져버렸다. 그녀와 그녀의 남편은 자신들의 아이를 낳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입양을 한 것이다. 사루는 자신과 형을 입양한 그의 부모님이 당연히 불임일 것이라 생각했나보다. 이에 대해 직접적으로 언급되진 않았지만 영화를 보던 관객도 아마 마찬가지일 것이다. 보통 사람들은 자신들의 자식을 낳지 못하는 불임 부부가 입양을 선택한다고 생각하니까 말이다.


그녀는 세상에는 이미 보살핌을 받지 못하는 수많은 아이들이 있다고 말한다. 더 많은 아이를 출산하기보다는 이미 존재하는 세상의 고통을 줄이고자 입양을 택했다는 것이다. 짧은 대사를 통해 흘러나온 강렬한 인류애적 메시지는 묵직한 감동으로 다가왔다. 동시에 내 무의식 속에 있던 또 하나의 편견에 대해 돌아보게 해주었다.



사람들은 많은 것들을 'X=Y'의 단편적인 서술로 치환해버리고는 한다. 'XX라면 YY해야 해', 'XX라면 YY할 거야' 따위의 말로 말이다. 마치 자신의 생각이 다수에 적용되는 보편적 진리인 양, 어떤 예외나 반증은 없다는 듯이 말이다. 하지만 당연해보이는 것은 결코 당연하지 않다. 이를 알고 있는 사람조차 제 맛에 맛게 세상을 받아들이는 것이 만연한 현실에 참 씁쓸하다.


이에 대해 라이언은 '인류애'로 답한다. 어머니의 사랑을 단순한 가족애로 오해했던, 작은 편견을 부수는 것은 이를 뛰어넘는 보편 인류에 대한 사랑이다. 그리고 그들의 사랑은 현재의 내가 걷고자 하는 길과 먼 미래에 나아가고자 하는 방향과 대한 성찰이기도 하다. 편협한 인식의 틀을 부숴나가는 것에서 전인류에 대한 사랑과 실천까지. 그들 앞에서 난 아직 한 없이 작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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