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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lues Apr 25. 2019

술에 관한 단상

젊음의 궁상

원래 빨개지는 애.
그 애가 나야.

고등학교 기숙사 시절엔 뭣도 모르면서,
왠지 그래야 멋있어 보이는 것 같아서 친구들과 숨겨놓은 술을 먹기도 하고
그러다 사감님에게 걸려 반성문을 쓰다 취해 같은 줄을 계속 쓰기도 했어.

또래들보다 조금 일찍 시작한 사회생활에서 술 따르는 법,
센스 있는 타이밍에 잔을 채우는 법, 고기를 기가 막히게 굽는 법 등을 터득할 무렵의 난
스무 살. 프리랜서 3년 차 시절이었어.

경력이 늘어가면서 밤낮없이 들어오는 그림 수정과 주문들을 쳐내며
술자리 약속을 잡는 것 자체가 남일이 되어버렸어.
군대를 가기 전에 경력이나 더 쌓아놓자는 생각으로 바쁘게 살던 내 이십 대 시절은
술은커녕 누군가 먹다 버린 치킨박스를 들고 와 뼈를 바르기 바빴어

또 어떤 날은 무슨 기분이었는지 진탕 술에 취한 채로 그림을 그렸어
종이 위에 그려진 선들은 지난 십수 년의 그것들과 완전히 다른 것이어서
난 이래서 위대한 예술가들이 술을 사랑했구나 라는 생각과 함께
감동 속에 잠이 들었어. 다음날 누군가 심하게 낙서를 해놓은 내 그림노트를 들고
그 누군가를 한동안 찾아다니긴 했지만.

호주에서 바리스타로 일할 시절엔 퇴근할 때 무료 음료를 한 병씩 가져갈 수 있는
규칙을 악용해 셀프 와인공부를 시작했어.
그저 이름과 종류만 외워야지 했는데 평생 마실 와인을 다 마셔본 것 같아.
그리고는 버번을, 그리고는 위스키를 잠들기 전 홀짝홀짝.

그런데 난 술을 별로 좋아하지 않아.
잘 마시지도 못해.
어쩌면 얇고 넓은 지식이 필요한 이 일을 하기 위해 해야 할 여러 가지 경험들 중
하나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르지.

회식도 하고 친구들끼리 만나서 한잔 하고 그런 문화에 익숙하지 않아서
가끔 술이 마시고 싶을 땐 혼자 마셨어. 그나마 요즘은 가끔씩 여자 친구가 술친구를 해주지만.

오늘은 거실 바닥에 드러누워 다이어트용으로 사놓았던 아몬드를 오도독오도독,
가격 오르기 전에 사둬야지 라는 핑계로 쟁여놓은 수입맥주를 홀짝거려.
어느덧 새벽 세시가 넘어가는데 문자가 한통 왔어.

작가님, 세 번째 수정사항 보내드려요~수고하세요~

앞으로도 술은 혼자 마셔야 할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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