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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배부른 먼지 Jan 29. 2020

2020년은 제대로 '자아실현'을 해보겠다

지금까지는 안했냐?는 시어머니와 남편의 소리가 들린다


유독 하는 말마다

이쁘고 달달한 첫째아들의 말을 기록하기 위해

브런치를 시작했는데...

그렇게 한가하게 아들의 말을 즐길때가 아니었다


간단한 자기소개.

흔하고 흔한 불행한 원가족 출신.

밥벌이를 하지 않고, 가사노동도 하지 않고

'낙'만을 추구하고 산 아빠(라는 말은 너무 다정한 단어라 안쓰고 싶은데 대체어가 없다.)

평생 일하고, 지금도 일하는 엄마.


20살 대학을 핑계로 독립.

뿌리가 없는데 제대로 살아갈리가!

대학을 그만두고 여기저기 돌아다니던 중

우연히 보게 된 페미니스트 가수 지현의 공연.

전쟁을 반대하고, 평화를 노래하고,

여성들이여, 일어나라. 고 노래하는 지현.

그 공연의 스탭으로 일하게 되었고

그때 만난 언니들의 영향으로

평생 비혼으로 살게 될 줄 알았다.

그때는(19년전) 비혼이라는 단어는 일상적으로

쓰이지 않았다.

그래서 인사동에서 비혼캠페인도 했었다.

지현을 시작으로, 현경교수님을 만나게 되었고

현경교수님의 책을 읽으면서

어떻게 살아야하는지 알게되었다.

그때부터 나라는 나무에  뿌리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여성운동은 너무 편협해.

더 큰 사회운동을 만나야지.'

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곁에 많아졌다. 점점.

그때는 그 말도 맞는 것 같았다.

"일상의 단어 몇 개 바꾼다고 여성해방이 되냐?

장관 몇 명이 여성이 된다고 남녀평등이 되냐?

더 큰 사회변화가 있었야지, 혁명을 꿈꿔야지."

그렇게 말하는 선배를 따라갔다.

7년을 열심히 사회운동을 했다.

7년을 그 사상과 일치되는 사람과

연애를 열심히 했다.


그런데 점점 이상했다.

앞과 뒤가 달랐다.

소위 말하는 '리더'들의 그룹일수록 더 그랬다.

밤과 아침이 달랐다.


이제 다르게 살고 싶어.

상식적으로, 합리적으로

무엇보다 미래를 위해서 자꾸 현재를 유예시키면서

살고 싶지 않아.

'자발적' 가난? 말도 안돼

돈이 없으면 책 한권 살 수 없는데.


그 사이 난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다.

지금은 사라진 당.

지금도 나는 그 당의 당가를 좋아한다.

내가 꿈꾸는 세상을 담고 있다.


그 당의 운영위회의에 함께 하고 있는 사람을

나는 좋아하고 있었다.

그 당시 내가 무시했던 운동권이 아닌 것이 좋았다.

자기 밥벌이도 제대로 못하면서 훈계질이나하고

집안사정이 생겨 활동을 잘 못하게 되는 후배를

불러다가 술 먹이며 넌 신념이 약한거야.라는

헛소리를 해대던 사람들의 운동은

자기만족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술먹고 떠들시간에 최소한의 밥벌이라도 하고 살아야된다고 생각한다. 어머니와 누나들의 희생으로 운동하는 그들하는 말은 옳은 말이어도 옳지 않다.고 당시 생각했다.


운동권이 아닌데

밥벌이를 하면서 진보정당활동을 하는 것이 좋았다.

당시 그 당이 분당되기 직전이라 회의는 늘 날 선 분위기였는데 그 사람은 유머로 사람들의 마음을 말랑말랑하게 만들어줬다.

툭, 던지는 말에 핵심도 들어있었다.

유쾌하고도 진지한 그 사람을 나는 좋아하고 있었다.


어느 날 밤,

새벽 두시, 메일을 보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좋아한다.

친해지고 싶다.

같이 이야기나누고 싶고, 좋아하는 것을 같이 하고 싶다.

연애중이라면 이야기해달라.

조금 좋아하다가 말겠다.


내일 만나자고 답장이 왔다.


명동에서 만나서 세시간을 이야기나눴다.

3분의 시간이 지난 듯 느껴졌다.

우린 엄청 잘 통하는 사이였던것이다.

6개월의 연애동안 매일 만났다.

서로 가고 싶어하는 나라가 '쿠바'라는 공통점이 있었.

그럼 우리 얼른 결혼식하고 쿠바가자! 해서

결혼식을 하고 그 해 7월에 쿠바여행을 다녀왔다.

그리고 결혼생활 시작.



이제 여기서부터가 올해 나의 브런치글쓰기의 시작이다.

이 남자는 적당히 왼쪽이고

적당히 말과 행동이 일치되고

적당히 나의 페미니즘에 나의 자아실현에

귀가 열려있는데


이 남자의 원가족이 그럴리가 없다는 것을

쿠바에서 돌아와 결혼생활을 시작하면서 알게 된 것이다.



그로부터 11년이 흐른 2020년.


지금은 많은 것이 변했다.


일단 명절에 차례를 지내러 큰댁에 가지 않는다.

결혼 첫해에 큰댁에서 밥을 먹으려고 앉았는데

그 댁 큰엄마라는 분이 나를 밀었다.

남자들이 먹는 차례인데 내가 앉으려고 했던 것이다.


그리고 명절에 나는 설거지를 하지 않고

전을 부치지 않는다.

(설거지와 전은 명절의 상적인 거라

 두가지를 상징적으로 안하고 싶었다.)

사실 밥을 주시는데 그까짓 설거지 할 수 있다.

나는 예의바른 사람이다. 친구집에 놀러가도

친구엄마가 밥을 주시면 당연히 설거지라도 하는게

예의이고 도리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시가에서의 설거지는 단순노동이 아니다.

묘한 묘욕감과 수치심이 녹아있는 그 정신노동을

난 몇 년 전부터 거부했다.


11년 사이의 이 변화의 과정이 평탄했을리가.

그 사이 들었던 말들은 여전히 마음에 상처로 남아있다.

가정안에서 그 누구도 희생하지 않고 함께 일하는 문화를 만들기 위해 내가 애쓴 이 에너지를

나의 온전한 자아실현을 위해 썼다면

나의 사회적 꿈은 이미 이뤘을 것이다.


그럼에도 내가 아직 가족이라는 틀 안에 머물러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나도 내 마음이 궁금해지기 시작한다.


심지어 한 대문을 공유하며 1층,2층에 살아가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나는 경제적인 자립능력이 있는 편이다.

나라가 망하지 않는다면, 내가 큰 사고를 치지 않는다면 65세까지 일할 수 있는 직장이 있고

남편은 전남편이 되어도 나에게 양육비를 줄 것이다.(라고 믿고 싶다)

그럼에도 내가 지금 당장

내 일기장의 11년동안의 피해기록들을 들고

법원으로 가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지?

나도 내 마음이 알고 싶다.

그래서 올해는 그 기록들을 시작해본다.


마음이 답답한 날,

당장 1층으로 내려가서

"어머니, 아들 돌려드릴게요. 전 필요없어요"

하고 싶은 날 밤에

브런치에서 '페미니즘'이라고 검색해서

글들을 읽는다.

그렇게 시간이 몇 년이 지나갔다.


고마운 글들이 참 많았다.

같이 울었고, 같이 기뻤고

무엇보다 자신의 결정으로 이혼을 선택하고

출발하는 사람들을 진심으로 응원했다.

아직 준비가 안되어 자립을 준비하는 사람들에게는

차근차근 준비하셔서 꼭 성공하시라고,

내 나름의 '여성의 자립'비법들도 알려주고 싶은 마음 가득이었다.

하지만 둘째가 자다가 깨어나 다시 재우고,

다음날 답글써야지하고는 퇴근하고는 집안일하다보면 또 하루가 갔다.


이제 둘째도 네살이 되었고

내 인생에도 점점 시간이 생겨나고 있다.


그래서 여기저기 흩어져있는 글들.

내 머릿속의 생각들을 이 곳에 모아보려한다.


오늘 아침에도 1층 어머니의 전화한통으로

기분이 바닥으로 내려갔고

급히 커피를 내려마시며 바로 끌어올렸다.


올 한해 지난 11년의 시간을 돌아보며

나에게 가장 잘 맞는 삶의 방식을 찾아보려한다.


그 시작을

드디어 오늘 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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