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어렸을 땐 신문을 보는 집이 많았다. 아침이면 집마다 문 앞에 신문이 있었다. 한 부가 아니라 여러 종류의 신문이 있는 집도 있었다. 정치성향이나 또는 판촉 행위에 따라서 보는 신문들은 다양했다. 내 고향이 보수의 텃밭이라 보수신문이 제일 많았고, 그다음으로 진보신문, 그리고 스포츠신문 정도였다.
가끔 대문 앞에 신문이 쌓여 있는 곳이 있는데, 그런 곳엔 십중팔구 대문에 ‘신문 사절, (집주인 바뀜)’이라는 문구가 붙어있었다. 그래도 배달원은 개의치 않고 신문을 놓고 왔다. 그런 집에 신문을 둘 때는 신문을 던지지 않고 살금살금 조용히 두고 와야 한다. 혹시 소리가 나서 새 집주인이 나와 실랑이하는 일을 피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최대한 새 집주인과 만남을 피하다가 결국 맞닥뜨리게 되면, 신문값 흥정에 들어간다. 새 집주인은, ‘봐라. 신문 사절이라고 붙여놓지 않았느냐, 그리고 이 쌓인 신문도 봐라, 난 신문을 본 적이 없다. 그렇기에 돈을 줄 수 없다.’라고, 공격을 펼친다. 그러면 배달원은, ‘새벽에 날이 어두워 문구를 본 적이 없다. 그리고 신문은 배달되었다. 그 지나간 신문은 폐품밖에 값어치가 없는데 어떡하냐. 그리고 집주인이 바뀐 지 몰랐는데 바뀌었으면 전화를 하지. 왜 하지 않았느냐?’라고 응수한다.
주로 위와 같은 내용으로 검사와 변호사가 되어 서로의 입장을 피력하다, 결국 지금까지 들어간 신문과 추가 3개월 무료에 판촉물을 받고 신문을 보는 거로 마무리된다.
위의 내용은 내가 겪은 일이다. 나는 중학교 1학년 때부터 새벽 신문 배달을 했다. 오토바이도 타고 싶었고, 용돈도 벌고 싶었다. 그 당시 한 달 용돈이 만오천 원이었는데, 신문 배달로 십일만 원을 받았다. (나는 그 돈을 어떻게 썼는지 기억이 없었는데, 상견례 날 어머니가 아들의 자랑을 하기 위해서 그때 내가 모은 돈으로 부모님께 옷을 사드렸단 이야기를 하셔서, 내가 허튼 곳에 돈을 쓰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신문 배달을 하는 데 있어 가장 힘든 점은 잠과 날씨였다. 깜깜한 새벽에 알람이 울리면 그 시간에 나만 일어나야 한다는 게 참 서글퍼졌다. 그 시간에 자는 사람이 제일 부러웠다. 누가 새벽에 일어나서 신문 배달을 하라고 시킨 것도 아니었지만, 매번 그 감정은 맘속에서 일었다.
그렇게 새벽 5시에 일어나서 보급소에 간다. 신문은 속지와 겉지가 따로 오기 때문에 겉지 안에 속지와 광고지를 끼워 넣는다. 그렇게 완성된 신문을 싣고 약 1시간 정도를 배달 루트를 따라 돈다. 겨울에는 바지를 3개를 입었다. 그렇게 입어도 오토바이를 타고 달리면 바람은 빈 곳을 잘 헤집고 들어왔다. 이보다 더한 것은 그런 날에 비까지 오는 것이다. 비가 오는 날이면 더 일찍 출근해야 했다. 신문을 일일이 말아서 비닐 포장에 넣어야 하기 때문이다. 백몇십 부의 신문을 돌돌 말아서 비닐에 담으면 부피가 커진다. 그만큼 오토바이에 싣기가 어려워진다. 비와는 다른 느낌으로 눈이 오는 날도 힘들다. 바로 젖지는 않지만, 어느새 옷이 젖어 있고, 길이 미끄러워 오토바이가 넘어지기도 한다. 넘어지면 신문이 쏟아지게 되고, 일부는 물에 젖는다. 그런 일이 발생해도 누구에게 도움을 요청할 수 없다. 혼자 하는 일이고, 다들 바쁜 시간이었다. 휴대전화기도 없는 시절이었다. 어쨌든 날이 훤하기 전에 배달을 마쳐야 했다. 구독자가 일어나기 전까지 신문이 들어가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면 어린 나이였지만, 그 규칙은 어떻게든 지켰던 것 같다.
그 시대 때의 새벽은 신문배달원과 우유 배달원의 시간이었다. 그 외의 사람들에게는 통금을 시행하는 것처럼, 아무도 새벽이라는 무대 위에 올라오지 않았다. 아파트 복도에 감지 등이 없던 시절 깜깜한 복도를 배달원끼리 만나 놀라 주저앉기도 하고, 엘리베이터를 서로 잡으려고 신경전을 벌이기도 했다. 모르는 사이였지만 안면이 생기면 가벼운 눈인사도 하고, 가끔 우유와 신문을 바꾸기도 했다. 동이 트기 전까지 마주치는 사람은, 새벽의 주인공 우리 ‘배달원’들 뿐이었다.
그 새벽의 주인공을 나는 고등학교에 들어가기 전까지 했다. 그 일을 단짝 친구와 같이했기에 그때까지 할 수 있었던 것 같다. 나이가 들어 그 시절의 우리를 이야기할 때, ‘그 어린 나이에 우리는 왜 신문 배달을 했을까?’로 서로 의아해하곤 했다. 지금 다시 그때로 돌아간다면 신문 배달 따위는 안 하고 잠을 택할 것이다. 지금 내 아들이 커서 신문 배달을 한다고 해도 반대하지 않을까? 아내는 절대 안 된다고 할 것이다. 그러고 보면 우리 아버지는 자주 나에게 ‘강하게 커야 한다’라고 말씀하셨는데 그 말을 몸소 실천하신 것 같다.
그래도 이런 경험으로 유년 시절의 추억이 풍부해졌다. 이 당시 먹었던 음식이 아직도 나의 소울푸드이다. 중학교 1학년 겨울방학 때였던 것 같은데, 신문 배달을 끝내고 보급 소장님이 아침을 사주신다고 식당으로 데리고 가셨다. 그때 처음 뼈다귀해장국을 먹었다. 허기와 추위에 지쳐있을 때, 김이 모락모락 나는 빨간 뼈다귀해장국은 시공간의 어떤 오차도 없이 최상의 지점에서 나를 찾아왔다. 그때가 아니었다면 우리나라 최고 일등 요리사가 만든 뼈다귀해장국이라 해도 그렇게 맛있진 않았을 것이다. 요즘도 가끔 그 음식이 당겨서 먹으면 그때의 내가 떠오른다.
또 하나의 기억은 일을 마치고, 내가 가져온 신문을 보는 아버지의 모습이다. 몇십 년도 더 된 일이지만 신문을 볼 때, 아버지의 신문 넘기는 동작과 소리가 기억난다. 아마 아버지처럼 신문을 넘기는 사람은 드물 것 같다. 보통은 그냥 넘기거나, 또는 침을 살짝 엄지나 검지에 묻혀서 넘긴다. 아버지는 특이하게도 엄지와 검지를 입 쪽에 갖다 대고 침을 뱉었다. 아마 공공장소에서 그렇게 했다면 주변 사람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했을 것이다.
거실 바닥에 양반다리로 앉아 신문을 펴 놓고, “퉤” 하는 소리와 신문을 넘기던 아버지의 구부정한 뒷모습이 생각난다. 그땐 내가 어려서 더럽다던가 잘못된 습관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다. 다만 내가 어른이 되어서 신문을 보면 나도 저렇게 엄지와 검지에, “퉤” 하고 침을 뱉어서 신문을 넘기겠구나 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지금 이 글을 쓰다 보니 아버지의 그 보기 흉한 습관에 관해 묻고 싶지만, 이제는 종이 신문을 받아보는 집도, “퉤” 하고 침을 뱉던 아버지의 기억도 사라져 간다. 쉼 없이 흐르는 시간이 오래된 기억을 분쇄기에 꾸역꾸역 밀어 넣으면서, 그때의 모습을 담은 추억들이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먼바다로 흘러가 버린 것 같다.
앞에 말을 고쳐 다시 그때로 돌아간다면, 또 나의 첫 아르바이트, 새벽의 주인공이 되어 바지 3개를 입고 찬 바람을 누벼야겠다. 그리고 춥고 배고픈 날 뼈다귀해장국 한 그릇을 하고, 아버지의 구부정한 등 뒤에서 들리는 “퉤” 소리를 들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