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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육일칠 Aug 18. 2024

일본 가마쿠라에서 친구들과 멀어진 이유(1화)

일본 여행을 같이 간 친구들과 멀어진 건 가마쿠라 해변에서였다. 가마쿠라에서 보이는 해변의 경치가 너무 좋다고, 너희들이 아키하바라에서 인형 뽑기를 할 동안 나는 여기서 혼자서 여행해 보겠다고 하니, 그들은 쿨하게 현실 친구를 혼자 놓아두고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피규어를 뽑으러 갔다. 그들이 매정하다고 하기엔 오로지 내 선택이었기에 책임도 내가 져야 했다.  


사실 친구들의 탓도 있다. 분명 그들은 슬램덩크에 나왔던 장소를 보기 위해 가마쿠라에 간다고 했는데, 정작 한 거라곤 해변에 그림 그리기, 생 멸치 덮밥? 먹기, 팬케이크 파는 카페에서 일본어로 주문하기였다.

생으로 멸치를 먹는 건 처음이었으나 특별한 맛은 아니었고, 팬케이크는 처음은 아니었으나 식감이 특이하게도 한국식 전 같았다.

 친구들은 지쳤는지, 슬램덩크고 뭐고 그냥 돌아가고 싶어 했으나, 난 아니었다. 일본까지 왔고, 슬램덩크에 나온 장소가 있다는 말을 듣고 가마쿠라까지 왔는데, 조금 지쳤다는 이유로 안 본다는 게 말이나 되는 소리인가. 그러니까 난 혼자서라도 가마쿠라에 남기로 한 것이다.


다행히도 가마쿠라를 가는 지하철 이용권은 한 번 끊으면 하루동안 무제한으로 타고 내릴 수 있었다. 덕분에 같이 간 친구 중 일본 여행을 좋아하는 친구에게 '가마쿠라'의 반대 방향 역인 '가마쿠라코코마에' 역으로 가면 된다고 안내받아도 괜찮았던 이유다. 덕분에 반대 방향을 갔다가 다시 가마쿠라로 가느라 시간이 두 배로 걸렸다. 하지만 굳이 굳이 슬램덩크 배경지를 보겠다는 비효율적인 선택을 한 순간부터 효율이 아닌 낭만을 추구한 것이기에, 친구가 방향을 잘못 알려준 것조차 낭만에 가까웠다. 이것도 지나고 보면 다 추억이라고 생각하며 바다를 계속해서 보여주는 초록색 열차를 타고 가마쿠라 역에 도착했다.

빨간 표시가 목적지였다. 근데 내 위치(파란색 동글뱅이)는 반대...친구야..???

슬램덩크 배경지엔 관광객이 모여 있었다. 사실 별 거 아니다. 푸른 바다, 초록색 열차, 열차가 지나간 뒤 철로를 밟으면 지나가는 차가 다다. 이 세 가지 요소에 '슬램덩크 배경지'라는 요소가 더해지는 순간, 장소는 특별해진다. 특별해져서 입소문을 타고 관광객이 모이면 별도의 관리가 필요하다. 몰려든 관광객이 철로 근처에서 너도나도 사진을 찍으려다 보니, 교통이 혼잡해지는 상황을 막고 관광객의 안전을 지키기 위해 통제 요원이 필요하다. 관광객은 '와 여기가 바로 슬램덩크 촬영지구나! 낭만적이다!'라고 생각한다면, 통제 요원은 사진 찍기에 혈안이 된 관광객을 통제하느라 바쁘다. 슬램덩크라는 이야기가 장소에 더해지니, 이야기를 소비하는 수요자가 생겼고, 수요자를 통제하기 위한 추가 인력이 생겼다. 통제 요원은 마치 놀이공원의 퍼레이드를 넋 놓고 바라보는 손님을 통제하는 캐스트와 비슷해 보였다. 퍼레이드는 대놓고 손님을 즐겁게 하려는 목적이 있으나, 바다 근처를 지나가는 열차는 그저 손님 이동을 목적으로 한다. 슬램덩크라는 서사를 부여받았고, 열차가 지나가는 장면이 슬램덩크라는 애니메이션을 연상시키며 관광객에게 일종의 퍼레이드가 되었다.


괜히 가마쿠라에 왔다는 증거는 남기고 싶었는지, 열차가 보이게끔 휴대폰 카메라를 기둥에 세워 설치하곤, 5초 타이머를 설정하고 손으로 브이를 하고 사진을 남겼다. 근처엔 렌즈가 삼단으로 튀어나온 카메라로 열차가 지나는 풍경을 찍는 사람도 있었다. 그분에게 부탁할까 싶었지만, 터무니없이 부족한 일본어 실력 덕에 말을 걸 용기가 나질 않았다. 뭐 그래도 사진은 찍었으니 됐나, 하고 친구들이 있는 신주쿠 역으로 돌아가려는데,

누군가가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뭘 그리고 있나 했는데, 열차가 지나가는 풍경을 그리고 있었다. 저분에겐 꼭 말을 걸어봐야겠다...! 싶어 용기를 쥐어짜냈다. "풍경 그리시는 건가요?"를 일본어로 말할 수가 없어서 파파고의 전폭적인 도움을 받았다.

준비 완료. 이대로 말씀드리고 있다고 말씀드린 뒤 대화를 끝내려 했는데, 추가로 말을 계속 거셨다. 일본어를 많이 듣기만 했지 말한 경험은 없어서 도저히 대답할 수가 없었고, 최후의 수단으로 영어를 썼지만 그마저도 잘 말하지 못했다. 파파고의 도움 없이는 일본인과 대화를 할 수 없다는 사실이 분했다. 파파고로 대화만 간신히 하는 것과, 언어를 익혀 대화하며 감정적인 교류를 나누는 것은 인간과 AI가 구별되는 지점이다. 그분은 예술가로서, AI와 구별되는 인간만 할 수 있는 활동을 하고 계셨다. 바다 근처를 지나는 기차를 보며 그린 그림을 통해 소통하며 추억을 쌓는 낭만 넘치는 분이었다. 그게 느껴져서 대화 나누고 싶었으나, 언어의 장벽으로 실패했다.  


그래도 현지에 있는 예술와 이야기를 나눴다는 만족감으로, 다시 초록색 열차를 타고 친구들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초록색 열차를 타고 후지사와 역에서 내려, 오다큐 전철을 탔는데, 폰 배터리가 15퍼 정도 남아 있었다. 보조 배터리도 없었다. 신주쿠에 있는 친구에게 카톡을 남기니, 신주쿠 역에 도착하면 보조 배터리를 빌려주겠다고 했다. 피곤했다.


...

...


잠에서 깨니 신주쿠 역에 내리기 전 역에 도착했다. 휴대폰을 확인했다. 배터리 1퍼센트. 친구에게 전화가 왔다.


"야야 니 배터리 몇 퍼 남았는데?!"

"어? 나 지금 1퍼 남았음"

"잠만잠만 신주쿠 역에서 내리면 안 된다! 거기가 아니 -"


뚝.


폰은 꺼졌고, 신주쿠 역에는 도착했다. 그런데 신주쿠 역에서 내리면 안 된다는 친구의 마지막 말. 나... 이제 국제 미아가 되는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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