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하는 법

by 또자

원문 : https://blog.naver.com/cjswogudans/222037386333


공부란 무엇인가?



지금 서울대학교 내 카페에서 해부학 스터디 작업중이다. 내 앞에 앉은 서울대생 두 명이 참으로 의미없는 토론을 하고 있어 한 마디 적어본다.



사람들은 ‘공부’라는 단어 자체를 잊어버릴 필요가 있다. 공부를 왜 하는가? 물론 순수한 논리의 습득이 즐거워서 그런 사람도 있고, 부모의 압박을 벗어나지 못해 억지로 하는 사람도 있고, 그냥 남들이 공부하니까 따라서 하는 사람도 있다.




요즘 항상 범주에 대한 말을 한다. 당신이 공부를 무엇으로 정의하느냐에 따라 인생이 달라질 수 있다. 공부를 떠올릴 때마다 부정적이고 혐오스럽고 지루하고 고통스러운 인내의 나날이 떠오른다면 당신의 인생을 돌이켜볼 필요가 있다. 매일 공부하고 싶고 잠 자는 시간이 아깝고 친구랑 흥청망청 노는 시간이 아깝다면 당신은 프리티 굿 한 인생을 살고 있다고 보통 말할 수 있겠다.




일단 먼저 말해야 할 것은, 공부는 외우는 것이 아니다. 보통 뇌과학적으로 암기란 정말 좋은 의미이다. 그것은 기억으로서 신경 집단 내에서의 물리적 관계의 변화, 또는 신경 집단과 집단 사이에서의 물리적 관계의 변화를 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 말하는 암기는 말 그대로 영어단어 일렬로 나열해서 외우는 것을 말한다.




외우는 행위에 무슨 목적이 있는가? 인간의 뇌는 맥락을 기억한다. 왜 맥락을 기억하는가? 근본적으로 맥락을 기억한다는 것은 A만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는 걸 의미한다. 즉 기억에는 반드시 A와 B가 있어야 한다. 왜 학창시절 영어단어 암기장에 적혀 있는 내용을 우리는 기억하지 못하는가(혹은 기억할 수 있다 하더라도 기억하려는 노력조차 하지 않는가)? 그것은 그 단어가 어떠한 관계의 형성도 갖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하다면 우리는 외웠다 할지라도 그 내용을 꺼내어 쓰려고 하지 않는다.




공부는, 추상적인 지식을 실생활에 적용하는 것이다. 그것이 맥락이며 관계이다. 공부란 반드시 추상적이어야 하며, 개별 특이성이 존재해야 한다. 추상적이라는 말은 이해가 될 것이다. 그것은 개념화를 말하므로 일반적인 단어의 정의 같은 것으로 연결지을 수 있다. 그러나 개별 특이성은 무엇인가?




우리가 단어나 어떤 지식을 받아들일 때에는, 우리의 고유한 주관에 따라 받아들이게 된다. 그 말은 같은 단어를 제시해도 A가 보는 것과 B가 보는 것이 다르다는 말이 된다. 이것이 개별 특이성이다. 즉 추상적 지식을 받아들일 때 개체마다 다른 변화가 발생하며, 그것을 되새김에 따라 더욱 특이하게 변모한다.




문제는 여기에 있는데, 이 나라의 문화 특성상 지식을 습득한 이후에 되새기려는 행위를 하지 않는다. 왜 되새기지 않는가? 보통 우리가 접하게 되는 지식은 어떠한 맥락과 관계도 존재하지 않으며, 그저 시험과 취업을 위함이며, 지식의 습득이 건강에 도움이 되는 경우도 별로 없고, 큰 돈이 될 때도 그다지 없으며, 인간이란 무엇인지에 대한 직접적인 설명도 없고, 생을 어떤 식으로 마감해야 하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답도 주지 않는다. 그것은 맥락의 부재이다. A의 범람이다. A는 B가 있어야 A로서의 속성을 인정받게 된다. 그러나 A만 존재하는 세상에서는 악의와 고통만이 남게 된다.




앞에서 서울대생 둘이서 대화를 하는데, 그 내용이 참으로 참혹하여 개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수업에 대한 이야기, 교수님에 대한 이야기, 성적에 대한 이야기, 민법과 행정법(법대생이었나보다)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다가 밖으로 나갔다. 약 두 시간동안 진행된 대화에서는 자신의 공부를 실제 삶에 적용하고자 하는 어떠한 의지도 없었다. 그저 동급생이 공부의 천재라는 이야기(교수의 말을 들음과 동시에 노트필기가 가능하다고 한다. 어쩌란 말인가?), 그 친구들 사이에서 살아남기 위해 어떤 식으로 대처해야 하는지에 대한 피상적인 논의(결론은 못이긴다), 시험에서는 행정법은 버리고 민법이 어려우니 민법을 파야 한다는 이야기(민법이 실생활에 매우 요긴하다. 특히 실제로 계약서를 쓰거나 민사상 문제가 발생했을 때 민법에 정통하면 큰 어려움을 면할 수 있다. 그것을 모르니 그저 시험 이야기만 한다. 행정법은 도대체 왜 버린단 말인가?), 교수에게 어떻게 하면 잘 보일 수 있는지에 대한 이야기 등...




나는 서울대생들이 말하는 ‘공부의 천재들’을 경험해보지 못해서 잘 모르겠다. 다만 내가 스스로 공부하며 인생을 바꿔낸 사람으로서 느낀 가장 큰 점이 있다. 이건 다른 사람들도 꼭 알았으면 한다.




절대 자신과 남을 비교하지 마라. 경쟁과 비교는 적당해야 약이 된다. 자신의 특질, 재능, 수준에 대한 정확한 평가와 판단이 있어야 한다. 다른 사람과 나를 자꾸 비교하게 되면 그러한 평가를 할 기회를 잃게 된다. 그것은 인간 본성상 어쩔 수 없다. 인간의 대뇌피질이 커지고 타인을 인식하는 뇌 부위가 비정상적으로 발달하여 그러한 일이 발생하는 것이다. 뇌과학에서는, 타인이 없다면 자아도 없다고 말한다. 자아를 형성할 때에는 늘 타인에 대한 지각적 내용을 복사하여 나에게 붙여넣기를 한다(쉽게 말한 것이다. 실제로 뇌는 컴퓨터가 아니다). 즉 나의 신체에서 발현되는 신호와 외부에서 온 신호를 비교하여 자아를 형성하는 것이다. 내부 신호와 외부 신호는 균형이 필요하다. 외부 신호만으로 자아를 구성하게 되면 내부 신호는 무시될 것이다. 그렇다면 유추할 수 있는 결과는 자존감 결여밖에 없다. 왜냐면 타인은 대부분 내가 갖고 있지 않은 점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공부란 실제로 적용해야 공부로서의 진정한 의미가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실제로 적용한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것 또한 몇 가지 범주로서 규정할 수 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는 전적으로 자아의 유지와 관련된 것이다.




첫째로, 공부가 돈이 돼야 한다. 이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반드시 돈이 필요하다. 어떤 지식을 통해 사회적으로 성공할 수 없다면 완료 행동에 대한 보상은 줄어들 것이다. 보상이 없는 뇌는 스트레스를 받거나 같은 행위를 더 이상 하지 않는 반응을 보인다.




둘째로, 공부가 자기만의 철학을 쌓는 데 도움이 돼야 한다. 철학이란, 고통스러울 때 안심하고자 하는 문장이다. 인간의 신경계는 늘 어느 정도 고통스러움을 느끼게 설정되어 있다. 그것은 인간의 의식이 도파민과 노르에피네프린에 의해 주도되기 때문이다. 그럴 때 우리는 안심하고자 한다. 여러 종교와 위대한 사상가들(예수, 붓다, 니체, 헤겔과 같은 선구자들)의 가르침은 우리에게 잠시나마 위안을 준다. 그것이 공부이다. 덜 고통스러워야 계속 살아갈 수 있다.




셋째로, 실제로 부딪히면서 추상적인 내용을 추출할 수 있어야 한다. 공부란 A(추상)에서 B(사례)로 향할 수도 있고, B에서 A로 향할 수도 있다. 실제로 진짜 공부는 역방향으로 발생하기에 우리는 최대한 다양하고 많은 경험을 할 필요가 있다.




시험을 위한 공부, 공부를 위한 공부, 남을 위한 공부는 필연적으로 고통스러우며 미래에 자신의 생존 가능성을 보장해주지도 않는다. 결국 현장에서 구르거나, 현장에서 구르기 위해 공부하거나. 둘 중에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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