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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림

장마가 알려준 의미

by 정운

살림은 기본적으로 외롭고 서럽다.

평일과 주말을 가리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눈 뜨는 아침부터 침대로 들어가기 직전까지 집안일은 끊이지 않는다.

하면 티가 나지 않지만 하루라도 안 하면 티가 나는 것이 그렇게 억울할 수가 없다.


내가 하는 어떤 일이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는 경우 커리어가 된다고 하는데, 왜 가족들의 삶에 필수적인 도움을 주는 살림은 커리어가 될 수 없는 걸까.

회사에서 일을 잘하면 능력자가 되는데, 왜 살림을 잘하는 건 그만큼 사회적인 인정이 따라주지 않는 걸까.

왜 '살림을 한다'라는 말이 집에서 '논다'는 뜻이 되는 것일까.


바깥에서 돈을 벌어오는 것은 물론 굉장히 가치 있고 대단한 일이다.

하지만 살림도 여간 어렵고 중요한 일이 아니다.

가족들의 건강한 삶을 책임지는 일은 절대 쉬울 수 없다.

매일 청소기를 돌리고 먼지를 닦고, 예산에 맞게 건강한 밥상을 차리고, 옷이나 침구류를 항상 청결하게 유지하는 등 집안일은 다양하고 끝이 없다.

상사의 눈치를 보지 않아도 된다는 점, 시간을 유연하게 쓸 수 있다는 점은 최고의 장점이다.

그렇지만 살림에는 회사의 특별한 성과도 없고 승진도 없으며 당연히 인센티브도 없다.

누군가 알아주지 않아도 깨끗해진 집을 보고, 건강해지는 가족들을 보고 스스로 만족하는 그런 일이다.


나에게는 너무도 당연한 집안일이기에, 남편이 덕분에 편하고 깨끗하게 지낼 수 있다며 고맙다고 이야기해줘도 와닿지 않았다.

내가 매일 들이는 정성의 시간이 큰 의미가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내 덕분에 남편과 두 고양이, 우리 네 식구가 모두 잘 지내고 있다는 생각은 정신승리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런 눅눅한 기분을 닮은 장마가 찾아왔다.

공기는 꿉꿉하고 하늘은 꾸물거렸는데 그러다 문득 아무도 알아주지 않아도, 인센티브 따위 없어도, 승진 같은 것 없어도 어쩌면 괜찮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쉰내 하나 안 나는 뽀송한 옷을 입고 출근하는 남편을 보고,

밖의 습기가 무색할 정도로 적정 수준에 머물러있는 옷방의 습도계를 보고,

장마철이지만 빨래통에 쌓이지 않고 옷장에 반듯하게 새로 개켜진 깨끗한 옷들을 보고,

아, 나 잘하고 있구나 하고 뿌듯함이 차올랐다.

기분이 산뜻해졌다.


내 정성으로 우리의 삶이 조금 더 편안해졌고, 내 수고로움은 헛된 일이 아니었다.

내가 하는 일은 우리 가족을 살게 하는 일, 살리는 일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 일을 '살림'이라고 부른다.


사진 출처 Unsplash_Bayu Syai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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