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나에게 해주지 못한 말
집으로 돌아오는 길,
얼마 전 아이를 낳고 엄마가 된 친구 L에게 전화를 걸었다.
오랜만의 전화 통화였다.
내 전화 때문에 혹시 아이가 잠을 깨지는 않을까 걱정이 되었지만 이미 전화를 걸어버린 뒤였다.
잠시 후 웃음 띈 목소리가 들렸다.
"안녕?"
"오랜만이야 언니, 잘 지냈어? 애기는 자?"
"응, 나는 잘 지냈지! 애기도 자고 있어~"
대학 동기로 만난 L은 나보다 한 살 많은 언니다.
나이가 많은 이들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 다른 이들을 가르치려 하거나 은근히 으스대곤 하는데,
L은 오히려 어린 동생들의 짓궂은 장난에도 못 이기는 척 실없이 웃으며 당해주곤 했다.
우리는 잘 맞았다.
무슨 말을 해도 서로 찰떡같이 알아들었고, L이 해주는 말은 다른 이들이 해주는 말보다 내 마음에 더 잘 스몄다.
L은 내게 단순한 친구, 그 이상의 사람이 될 수밖에 없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난 뒤 이제 우리는 가정을 꾸리고 직업도 달라지며 꽤 다른 길을 걸어왔지만,
내가 필요로 할 때면 L은 여전히 내 옆에 있었다.
그녀는 내게 중요한 사람이고 나 역시도 그녀에게 그렇길 바랐던 것 같다.
여느 때와 같이 통화는 끝날 줄을 몰랐다.
각자의 근황과 크고 작은 고민들은 서로의 목소리를 타고 전해졌다.
나는 꽤 오랜 시간 나를 떠나지 않는 무력감과 회의감, 그리고 요즘은 무언가에 얽매이지 않고 이것저것 마음이 가는 대로 시도해 보는 중이라는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그때 나는 반은 진심으로, 반은 애써 웃고 있었던 것 같다.
"정운아, 재미있게 살아!"
갑자기 눈물이 났다.
목이 메었다.
울기 시작하면 마음속 눌러두었던 설움이 걷잡을 수 없이 터져버릴 것 같아 가까스로 울음을 참았다.
아무렇지 않은 척 맞장구를 치고 이어진 얼마간의 수다 뒤 다음의 만남을 기약하며 전화를 마쳤다.
살면서 백번도 더 들어본 말인데 그녀의 목소리에 담긴 진심 때문이었을까.
이번엔 다르게 들렸다.
재미있게 살자라니.
나는 한 번도 스스로에게 해준 적이 없었다.
항상 열심히 살아야지, 잘 살아야지, 성공해야지와 같은 말만 해줄 뿐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산 나 자신만 칭찬하고 좋아했다.
재미있게 산다는 것이 뭔지 알 수 없었다.
L은 내가 모르던 내 마음 깊숙한 아픔을 찾아내고 토닥여줬다.
사람들의 박수를 받지 않아도, 멋지고 잘 나가서 좋겠다는 부러움의 눈길 속에 있지 않아도,
너 자신이 진정으로 즐겁고 행복하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그날 이후로 나는 잊지 않기로 했다.
열심히 살고자, 잘 살고자 하는 내 뒤에 숨어 꼼지락꼼지락 눈치만 보는 재미있게 살고 싶은 나를.
그런 나를 향해 나는 L이 내게 해준 것처럼 진심을 담아 다정한 말을 건넨다.
"인생 별거 없어, 재밌게 살아!"
사진 출처 Unsplash_Park Trooper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