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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수

더 이상 향기로 나를 소개하지 않기로 했다

by 정운

최근까지 향기에 빠져있었다.

원하는 향이라면 몇십만 원이라도 기꺼이 지갑을 열었다.

처음에는 단순히 내가 좋아하는 향이나 원하는 이미지를 담은 향을 구매했지만

점점 나와 닮은 향, 나를 나타낼 수 있는 향을 찾기 시작했다.

그런데 향수라는 것이 참 묘했다.

우아한 꽃향기를 뿌리면 나는 원래 고급스러운 이미지를 가진 사람인 듯했고,

상큼한 과일과 풋풋한 자연의 향이 나면 자연스러운 매력을 타고난 사람인 것 같았다.

나는 누가 봐도 이건 네 향이야,라는 향수를 찾길 원했는데 쉬운 일이 아니었다.

나도 남들처럼 어떤 뚜렷한, 나만의 이미지를 갖고 싶었다.

남들은 자신과 찰떡인 향기들을 잘만 발견하는 것 같은데

왜 나는 못 찾는 것인지 실망하기도 했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니 그건 애초부터 불가능한 바람이 아니었을까 싶다.

왜냐하면 사람이라는 존재는 한 가지 이미지에만 머무르지 않기 때문이다.

나 역시 마찬가지다.

혼자 사색에 잠길 때는 차분한 사람이었다가도

반가운 친구를 만나면 얼굴에 웃음 가득한 해맑은 사람이 된다.

오랜만에 떡볶이를 앞에 두고 아이처럼 들뜨기도 하고

좋아하는 책을 볼 때 차가 식는 줄도 모르고 깊이 몰두하기도 한다.

나는 한 가지 향으로 담기에는 너무 다채로운 사람이었다.


그렇다면 친구들의 향기는 왜 그렇게 완벽해 보였을까.

지금 생각해 보면 그것도 결국 내가 본 친구의 '일부'였을 뿐 아니었을까.

내가 생각한 그 친구의 어떤 면이 마침 그 향과 잘 어우러졌거나

혹은 그 친구도 보여주고 싶은 이미지를 향기로 연출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향수는 결국 연출의 수단이다.

어울리면 '찰떡'이 되고 그렇지 않으면 '반전매력'이 되는 법이다.

나는 그걸 몰라서 나라는 사람을 한 가지 향에 가두려 했다.


향기는 좋은 도구다.

자신감을 북돋아주기도 하고, 내가 바라는 이미지를 보다 쉽게 연출할 수 있다.

하지만 나는 그 도구에 지나치게 집착하지 않기로 했다.

대신에 나만이 가진 다정한 눈빛과 밝은 표정으로 나라는 사람을 드러내기로 했다.

그 순간순간의 내 얼굴들이야말로 나를 가장 온전히 담아내는 향기일 테니까.


더 이상 향수로 나를 소개하지 않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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