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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수의 특권

지금 이 자리에서 행복할 것

by 정운

백수. 성인이면서 직업이 없는 사람. 나다. 나는 내가 자의로든 타의로든 백수가 될 줄 몰랐다. 그런 선택지는 애초에 고려 대상이 아니었다. 그렇지만 인생 어떻게 될지 모른다고, 지금 나는 그렇게 살고 있다. 나도 백수가 처음이라 얼마 전 알게 되었는데, 이런 백수의 삶에도 나름의 특권이 있다.

첫째, 보이스 피싱에 낚이지 않는다. 어느 날 오후 2시쯤, 등기가 갈 예정이라며 집에 있냐고 묻는 전화를 받았다. 보통 직장인이라면 회사에 있을 시간이지만 나는 집에 있을 예정이라고 했고, 전화는 끊겼다. 나중에 알고보니 보이스피싱이었다. 집에 없을 거라 예상하고 개인 정보를 캐내려던 수법이었는데, 웬만하면 집에 있는 백수이기에 낚이지 않을 수 있었다!


둘째, 비오는 날 집에 있을 수 있다. 하늘에 구멍이 난 듯 비가 쏟아지던 날, 아침이었지만 하늘은 어두컴컴했다. 창밖의 직장인들은 무릎까지 젖은 바지로 비오는 출근길을 걷고 있었지만 나는 집 안에서 쾌적하게 있을 수 있었다.


셋째, 고양이들과 하루종일 함께 있을 수 있다. 물론 이 친구들이 나와 계속 논다는 뜻은 아니다. 대부분의 시간을 자는 고양이들이기 때문에 나는 그저 바라보는 일 뿐이지만 그렇게 곤히 자는 고양이를 언제든 만질 수 있는 특권이 있다. 특히 책을 읽으며 한 손으로는 고양이 뱃살을 쓰다듬는 행운은 아무에게나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물론 철딱서니 없게 들릴거다. 나가서 한 푼이라도 더 벌고 커리어 생각을 해야지, 특권이네 뭐네 할 때가 아니라고 말할거다. 나 역시도 내 처지를 부정했던 때가 있다. 이럴거면 왜 그렇게까지 밤새 공부하고 치열하게 경쟁하며 대학원까지 갔는지, 왜 그렇게 스스로를 채찍질했는지, 모두 의미없는 일 아니었나 허무하기도 했다. 직장인은 결국 노예나 다름없다는 말을 들으면서도 나도 그 노예가 되고 싶었다. 나도 남들처럼 멋진 커리어와 월급이 갖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 없는 것만 바라보고 그걸 가져야만 내가 행복하다고 한다면, 과연 나는 언제쯤 행복해질 수 있을까. 나는 직업은 없지만 시간이 있고 내 하루를 선택할 수 있는 여유가 있다. 회사 일이나 상사로 인한 스트레스도 없고 대체로 평안하고 안온한 하루를 보낸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그 자리에서만 누릴 수 있는 행복이 있다. 지금이 가장 좋을 때다. 나는 언제나 '지금' '이 자리에서' 행복하기로 했다.


사진 출처 Unsplash_Kelly Sikkem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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