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군화 신고 지구 한 바퀴
잠시 정들었던 산악전 학교를 떠나 좀 더 높은 곳으로 이동하게 되었다. 빙벽 등반 훈련을 위해서였다. 빙벽을 타기 위해서는 만년설이 있는 지역까지 올라가야 하기 때문에 하루에 이동하기는 힘들고 중간에 케상이라는 지역에서 이틀을 보내며 고도에 적응한 뒤 더 높은 곳으로 이동하기로 돼 있었다.
우리는 각자의 짐을 꾸려 배낭에 짊어지고 집합했다. 학교 교관들과 지원부대 군인들도 짐을 꾸려 나왔다.
특히 그동안 한가로이 풀만 뜯던 당나귀들이 드디어 일을 할 때가 되었다. 우리가 먹고 마실 식량과 각종 훈련 장비들 그리고 살림살이들이 모두 당나귀들 등에 실려 있었다. 21세기 우주 정복 시대에 당나귀라니.
모든 준비를 마치고 학교를 떠났다. 좀솜 마을길을 지나 닐기리 산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얼마 가지도 않았는데 좀솜을 멀찍이 지나 왔다. 중간 중간 동네 풍경도 구경하고 가보지 못했던 외딴 마을에 집들도 구경했다.
산 아래 마을들에는 상수도가 없는지 수로들이 개울에서 부터 집집마다 연결되어 있었다. 개울물을 직접 끌어다 쓰는 모양 이었다. 물론 전깃줄도 없었다. 분명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것 같았다. 좀솜에서 잠깐 벗어났는데 바로 오지 마을로 접어 든 것이다. 좀솜 역시 오지였다는 것이 실감났다.
두어 시간을 걸은 뒤 잠시 쉬었다. 쉬면서 동네 집들을 둘러 보다 벽에 붙은 어떤 돌 판에 글씨가 새겨진 것을 발견했다. 불경을 적어 놓은 것 같았다. 마을마다 원통에 불경을 새겨 돌릴 수 있게 해 놓은 것은 많이 봤는데 이렇게 불경을 새긴 돌 판을 섞어 집을 짓는 것은 처음 보았다. 오지에 지은 허술한 돌집들에 부처님의 공력이라도 불어넣어야 집주인들이 안심하고 살 수 있을 것 같긴 했다. 카트만두 보다 불교문화가 더 강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쉬고 있는데 교관들이 덜 익은 풋사과를 가져 왔다.
좀솜은 사과산지로 유명하다. 아침에 장이 설 때 보면 판매하는 물품 중 사과가 가장 많고 좀솜 마을 안에 매우 큰 규모의 사과 과수원도 있다. 하시브와 그 사과 과수원에 들른 적이 있었는데 그 과수원에서는 사과를 생산할 뿐만 아니라 잼도 만들고 럼주도 만들어 팔았다. 하지만 그 생산 시설들은 차라리 우리 집 부엌에서 만드는 게 낳겠다 싶을 정도로 열악했고 만들어낸 럼주는 형편없는 맛이었다.
사실 좀솜의 사과자체가 별로 맛이 없긴 하다. 과수원에서 보니 사과나무 가지에 사과가 너무 많이 매달려 있었다. 그 씨알도 작았다. 당연한 결과였다. 과일이 너무 많으면 양분이 분산되어서 씨알이 작을 수밖에 없다. 당도도 떨어진다. 그러니 좀솜의 사과는 생산량만 많을 뿐 상품성은 떨어지는 편이다.
그런데 교관들이 근처 어느 집 사과나무에 달린 사과 몇 개를 따온 듯싶었다. 그마저도 덜 익었다. 역시 맛이 없었다. 다만 목마름을 달래줄 시큼함은 있었다.
다시 출발해서 또 한참을 더 가니 드디어 저지대를 벗어나 본격적인 산행이 시작 되었다.
우리는 먼저 침엽수림으로 들어갔다. 고지대의 척박한 환경이라 활엽수는 자라기 힘든 모양 이었다. 나무들은 모두 싱싱하고 생기가 넘쳤다. 청명한 공기에 숲의 피톤치드 냄새까지 더해져 상쾌함이 극에 달했다. 공기가 너무 달콤해서 어떤 치명적인 병이라도 다 나을 것 같은 생명력이 느껴졌다.
건조하고 척박했던 좀솜의 땅과는 달리 땅이 기름지고 습기가 많았다. 분명 고도는 좀솜보다 높아졌지만 물이 강으로 몰려 흐르던 좀솜과는 다르게 땅으로 스며들어 촉촉한 대지가 나무와 풀들을 키워내는 것 같았다.
그런데 나중에 생활하다보니 다른 의심을 하게 되었다. 아직 나무를 주 연료로 태우고 있는 좀솜 사람들이 주변의 숲을 황폐하게 만든 것은 아닐까 하는 의심이었다. 네팔 산악지역 사람들은 집을 지을 때도 나무를 베어 쓰고 강가에서 돌을 주워다 집을 지었다. 거기에다 땔감으로도 나무를 베어다 써서 좀솜 주변이 척박해진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튼 오랜만에 숲에 들어오니 무척 기분이 상쾌했다.
그렇게 숲 지대를 지나자 점점 나무들의 수가 줄고 숲이 사라졌다. 그리고 가느다란 계곡들이 나왔다. 그런데 그 계곡을 건너기 위해 놓인 다리들이 통나무 두개를 겹쳐 놓은 좁은 통나무 다리들 이었다. 한사람이 겨우 지날 수 있는 폭이어서 모두 지나는데 한참이 걸렸다. 역시 위험과 모험을 구분하지 못하는 우리는 그것도 재미있는 경험이라고 아슬아슬함을 즐기며 즐겁게 건넜다.
고도가 점점 높아지자 맑았던 하늘에 안개가 끼기 시작했다. 좀솜에서 봤다면 구름이라고 얘기 했을 텐데 지금 눈앞에 있으니 안개였다. 안개가 햇빛을 가리니 날이 좀 쌀쌀했다. 가벼운 바람막이를 꺼내 입고 계속 길을 걸었다.
이제 좀 힘들다 싶은데 목적지에 도착했다. 우리는 케상 캠프에 각자 숙소를 배정 받고 짐을 풀었다.
정들고 포근했던 느낌의 좀솜 숙소와는 전혀 다른 느낌이었다. 돌로 지은 벽에 회반죽을 바르고 흰색 페인트를 칠한 방에는 침대만 놓여 있었다. 정신병원 느낌 이었다.
나는 이틀만 있을 예정이라 필요한 짐만 꺼냈다. 우선 좀 씻을 생각으로 세면도구를 꺼냈는데 샴푸나 세안제 같은 튜브형태로 된 제품들이 모두 부풀어 올라 있었다. 고도가 높아지면서 기압이 낮아져 부풀어 오른 것 이었다. 처음 카트만두에 도착해서 짐을 풀 때도 경험한 일이었지만 다시 한 번 보게 되니 똑같이 신기하다. 그런데도 아직 고산병 증세를 느끼지 않는 걸 보면 다행이다 싶었다.
저녁을 먹을 시간이 되었는데 전기가 들어오지 않았다. 각자 헤드랜턴을 쓰고 다녀야 했고 식당에는 촛불이 켜져 있었다.
불도 켜지지 않은 밤에 할 일 도 없어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다음날 일정은 고도 적응을 위해 주변 지역 트레킹을 다니는 것이었다. 보통 이정도 고도면 고산 증세를 보이는 사람들이 하나 둘 나온다는데 우리 반 교육생들은 모두 말짱했다. 그리고 아직까지는 모두 팔팔했다. 트래킹 다니면서 서로 장난도 치고 앞서거니 뒤서거니 경주도 했다.
점심은 가볍게 싸가서 들판에서 먹었다. 풀을 뜯는 조, 야크와 나란히 앉아 먹었다. 이런 고산지대에서 이끼를 뜯어 먹고도 저렇게 큰 덩치를 유지하다니 정말 경이로운 동물이다.
이 날도 날씨가 좋지 않았다. 안개가 심했다. 좀 날이 추워 샤워도 못하고 저녁에는 밥 짓는 불이라도 쬐려고 식당 옆 아궁이에 앉아 있었다.
고산병 증세를 아무도 보이지 않아 다음날 바로 빙벽등반 캠프로 이동했다. 날씨가 좋았다. 케상캠프에서 약 500미터정도 고도를 더 올라갔다. 이제 고도가 4000미터 정도 됐다. 만년설이 있는 지역과 케상캠프의 중간 지점정도 되는 것 같았는데 계곡이 흘러 물을 얻기 쉬웠고 넓은 개활지가 있어 텐트를 여럿 치기도 좋았다. 매년 쓰는 캠프 인 것 같았다.
우리는 2인 1조로 텐트를 받아 정해진 곳에 설치했다. 이번에도 하시브와 한조로 같은 텐트를 쓰게 되었다. 텐트를 다 치고 짐을 정리하고 나니 아늑한 게 기분이 좋았다.
사실 텐트라는 게 얇은 천 조각으로 된 보잘 것 없는 집인데 이것 하나 치고 들어앉으면 기분이 여간 좋은 게 아니다. 딱히 외부 온도를 크게 막아주는 것도 아니고 내부가 넓고 쾌적한 것도 아닌데 말이다. 그저 황량하고 척박한 대자연으로부터 이 한 몸 가려주고 바람을 좀 막아 줄 뿐인데 이렇게 기분이 좋다니. 참 신기한 물건이다. 아마도 캠핑을 좋아하는 분들이라면 공감하실 것으로 안다.
내 텐트를 치고 뭐 좀 도울 것이 있나 하고 본부로 가봤다. 돌을 쌓아 아궁이를 만들고 있기에 좀 도와주었다. 식수는 계곡물을 호스로 끌어다가 쓰는 것 같았다. 그럼 씻는 건 어떻게 하느냐고 물었더니 계곡에서 씻으란다. 하지만 용기를 가져야 할 거라고 했다. 무척 차가울 테니 말이다.
그래서 용기를 갖고 시도 해봤다. 인적이 드문 곳을 찾아 물살이 제법 세고 몸을 충분히 담글 수 있을 만한 곳을 골라 옷을 홀랑 벗고 들어갔다. 날씨가 좋아 괜찮을 줄 알았는데 완전히 잘못된 생각이었다. 계곡에 흐르는 물은 무려 만년설이 녹아 흐르는 물이라는 것을 생각하지 못한 것이었다. 그 물의 차가움이란 머리가 곤두서고 온몸에 돋은 닭살을 바늘로 찌르는 듯 했다. 그렇게 차가움에 놀란 나는 용수철처럼 뛰어 나왔다. 하지만 이미 몸은 적셨고 이제 비누칠하고 다시 들어갈 차례였다. 엄두는 나지 않았지만 다시 용기를 내서 들어갔다. 알면서도 깜짝 놀랄 만한 냉기가 다시 온몸을 때렸다. 그렇게 만년설 얼음물로 한 첫 번째 샤워를 순식간에 마쳤다.
샤워를 하고 나오면서 이거 내가 깨끗한 히말라야의 환경을 오염시킨 것 아닌가 하고 죄책감을 안고 나오는데 나보다 더 상류에 네팔 교관들과 교육생들이 씻고 있었다. 저 아래에 한참동안은 민가가 없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돌을 쌓아 만든 부엌에서 연기가 피어올랐다. 가스불은 아니고 역시 주변에서 베어온 나무를 때서 연료로 썼다. 그걸 보고 훈련기간 동안 자연보호는 개나 주기로 했다.
불 피우기는 캠핑의 또 하나의 묘미다. 모닥불이 주는 안락함과 안도감, 그리고 곧 음식이 익어 먹을 수 있을 거라는 기대는 아마 원시 시대 때부터 유전자에 각인 된 것이리라. 그 본능을 잊지 못해 우리는 주말이면 장비를 싸들고 캠핑장을 찾거나 숯불구이 고깃집에 둘러 앉아 고기를 굽는 것 아니겠는가.
한참 동안 불을 피우고 식사준비 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밥을 짓던 병사가 뜨거운 물에 홍차를 한잔 타서 건네줬다. 살짝 한기가 느껴지던 차에 홍차 한잔을 받아드니 너무 행복해 졌다.
그때 우리 백인 동료들은 열심히 ‘쉿 헤드’를 외치고 있었다. 카드놀이에 열중하고 있는 것이었다. 전날 밤 케상의 불도 들어오지 않는 식당에서 촛불에 의지해 카드놀이를 할 정도였으니 정말 대단한 열정들이었다. 도대체 백원짜리 한 장 걸지 않고도 저렇게 카드놀이에 열중한다는 게 나로서는 이해할 수 없었다.
저녁을 먹고는 교관에 의해 내일 교육에 대한 브리핑이 있었다. 낮에 햇빛이 강해지면 눈사태가 날 수도 있기 때문에 빙벽 훈련은 기온이 오르기 전에 일찍 해야 한다고 했다. 그래서 새벽에 일어나서 빙벽 훈련장까지 올라갔다가 아침나절에 훈련을 하고 오전 중에 내려 와야 한단다.
그러니 밤에 훈련준비를 끝내놓고 일찍 자서 4시에 기상. 간단하게 요기를 하고 각 조별로 출발하기로 했다. 나는 교관 B.J 중사, 하시브와 한조가 되었다. 그렇게 브리핑을 마치고 교관의 지시대로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다음 날 새벽에 일어나서 간단하게 아침을 먹고 장비를 챙겼다. 손에 들고 얼음벽을 찍어 오르는 장비인 아이스 엑스, 커다란 아이젠처럼 생겼지만 발가락 앞쪽으로 날카로운 발톱이 튀어 나와 얼음벽을 찍고 오를 수 있는 크램폰, 크램폰을 부착할 수 있는 목이 긴 스노우 부츠, 방한 장갑이 추가 되었고 나머지 헬맷과 하네스 확보줄 등의 기본 장비가 있었다. 이것저것 챙기다 보니 짐이 제법 묵직했다.
아직 동이 트지 않았는데 여기저기 각 조별로 벌써 출발하기 시작 했다. B.J. 교관이 우리 텐트로 와서 합류했고 우리 조 3명도 바로 출발했다.
만년설. 아주 오랜 시간 늘 상 거기 있다고 해서 만년설이다. 교관은 만 년 전에 내린 눈도 저 깊은 곳에 얼어 있다고 했다. 보통 산을 덮은 눈들은 정상에 내린 눈들에 밀려 점점 아래로 내려오고 결국에는 눈사태를 일으키며 무너져 내리거나 햇빛에 녹아내리게 마련이다. 하지만 어느 골짜기 깊은 구덩이에 갇혀 아래로 내리지 못한 눈이 있기도 해서 만년 아니 그보다 더 오래전에 내린 눈이 있을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단군할아버지 때 보다 더 오래전에 내린 눈이 아직도 있을 수 있다니. 손에 닿으면 곧 사라지는 눈송이의 연약함을 보며 살아온 나에게는 단군신화만큼이나 신비한 이야기였다.
그 만년설을 머리에 얹은 영엄한 산. 그 산을 직접 만나러 간다니 마음이 설레었다.
산을 오르는 동안 날이 밝아졌다. 잠시 멈춰 해가 뜨는 것을 보았다.
저 멀리 여러 산들이 도열한 군인들처럼 서 있었다. 그리고 구름이 그 산들 사이를 한 마리의 거대한 용처럼 꿈틀대며 기어오고 있었다. 또 그 위풍당당한 산들의 정상을 비추는 아침의 여명. 다시 그 빛을 받아 빛나는 황금빛 산들. 정말 한동안 넋을 잃고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평생 본 일출 모습 중 가장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많은 시간이 지난 지금도 아침 해를 보면 가끔 그 장관이 떠오르곤 한다.
날이 밝아지자 주변의 광경도 눈에 들어 왔다. 커다란 절벽들과 깊게 패인 협곡들, 절벽위로 떨어지는 눈 녹은 폭포들. 눈이 닿는 곳마다 장관이고 영험한 산의 속살들 이었다.
드디어 만년설 지역에 도착했다. 그런데 첫인상은 좀 실망 이었다. 멀리서 바라 봤을 때는 너무나도 희고 깨끗했던 눈과 얼음이 가까이서 보니 온통 검은 흙과 섞여 연탄재 맞은 골목길 눈처럼 지저분했다. 나중에 다른 빙하지역을 여행하면서 알게 된 사실은 높은 산정에 있던 얼음들이 밀려 내려오면서 산비탈에 있는 흙을 깎으며 내려오고 그것들이 눈과 얼음에 섞여서 빙하지역 아랫부분은 검은 빙하들이 생기기 마련이란다. 그러니 더 깨끗한 눈과 얼음을 보려면 더 높이 올라가야 했다.
하지만 우리의 목표는 빙벽 등반훈련이었다. 나중에 고고도 등반 훈련 때 그 순수하게 하얀 눈과 얼음을 볼 수 있으리라 기대했다.
빙하에 오르기 전에 우선 장비를 착용했다. 스노우 부츠를 신고 크램폰을 장착했다. 방한 장갑을 끼고 아이스 엑스를 손에 들었다. 마치 전문 산악인이라도 된 양 자신감이 솟았다.
첫날은 가볍게 기초 빙벽 등반 코스에 도전 했다. 굴곡이 전혀 없는 수직 벽에 높이는 10m 정도 됐다. 구령을 넣으며 장비점검을 하고 왼손 오른손에 든 아이스 엑스를 먼저 찍고 왼발 오른발 크램폰 발톱을 빙벽에 박아 넣었다. 얼음이 부서져 내리지는 안을까 걱정 됐는데 생각보다 튼튼했다. 그리고 아이스 엑스나 크램폰 발톱이 얼음을 파고들 때의 쾌감이 짜릿했다.
등반을 시작하고 단번에 코스를 통과했다. 하시브도 통과한걸 보니 정말 쉬운 코스였던 것 같다.
다음번엔 좀 더 어려운 코스였다. 약간의 굴곡이 있어 몸을 뒤로 뉘어야 하는 오버행 코스였다. 우리 모두 실패했다. 우리 조 뿐만 아니라 우리 외국인반 학생들 거의가 실패했다.
하지만 마지막 희망 로저가 남아있었다. 다른 곳에서 다른 코스를 연습하던 로저가 우리 쪽으로 합류했다. 모두들 실패해서 낙담해 있었는데 로저가 도전했다. 자신 있게 등반을 시작한 로저도 오버행 구간에서 잠시 머뭇하며 애를 먹었다. 그런데 아이스 엑스를 좀더 길게 잡고 팔을 크게 돌리더니 오버행 구간을 가로질러 아이스 엑스를 벽에 꽂아 넣었다. 로저의 팔이 길다는 건 알았지만 그렇게 길 줄이야. 나와는 애초에 신체조건이 달랐다. 그리고는 단한번 몸을 튕겨 성큼 올라섰다. 이미 상반신은 오버행 구간 위쪽으로 올라왔고 다시 아이스 엑스로 더 위쪽을 찍고 있었다. 역시 교관은 교관 이었다. 우리 모두 휘파람을 불며 박수를 보냈다. 가장 신난 건 로저와 같이 온 데이브였다. 데이브도 역시 우리와 함께 실패자 무리였다. 같은 교관인데 어쩜 저렇게 다른지. 도대체 어떤 과목의 교관인지 궁금해졌다.
해가 더 높이 올라왔다. 얼음들도 햇빛을 받아 물이 맺히기 시작했다. 이제 내려 가야할 시간 이었다.
장비를 벗고 산을 내려왔다. 다들 빠른 속도로 내려가는데 우리조가 제일 늦었다. 하시브의 속도에 맞추다 보니 어쩔 수 없었다. 게으른 건지 체력이 약한 건지 아니면 둘 다 인 건지 올라올 때도 제일 늦고 내려 갈 때도 제일 늦었다. 하시브는 분명 코만도 출신은 아닌 것 같았다.
내려와서는 점심을 먹었다. 점심을 먹는 와중에 멀리서 천둥소리가 들려 하늘을 보는데 라비 소령이 하늘을 보지 말고 산을 보란다. 그러면서 아침에 우리가 훈련했던 방향을 손으로 가리켰다. 하지만 그쪽에도 별것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비록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그 소리는 눈사태가 일어나는 소리란다. 낮에 햇빛을 받아 눈들이 녹기 시작하면 압력을 받은 하단부가 무너져 내리면서 그 위에 있던 눈들이 한꺼번에 쏟아져 내리는 거라고 했다. 우리가 새벽에 일찍 서둘러 올라가서 훈련해야 하는 이유였다.
점심을 먹고는 자유 시간 이었다. 자유라고 해봐야 캠프를 벗어날 수도 없으니 수다를 떨거나 운동을 하거나 책을 읽거나 해야 했다.
나는 다들 뭐하나 구경을 다녔다. 우리 영국친구들과 미 해병 죠와 루다 레인져 해쉬는 또 모여서 ‘쉿 헤드’를 외치며 카드게임에 집중했고 마두라와 하시브는 도란도란 이야기 중이였다. 아침 빙벽 등반의 영웅 로저는 손에 전화기를 들고 통화중이었는데 그 전화기에 안테나가 유난히 커 보였다. 가까이 가서 보니 무려 위성 전화기였다. 오지에 훈련 나온다고 부대에서 위성전화기를 줘서 보냈단다. 역시 미국이다. 위성 전화기 통화비용도 만만치 않을 텐데 말이다. 그보다도 전투용 장비 외에 교육 나오는 사람한테도 지급할 정도로 장비수량에 여유가 있다는 것이 부러웠다. 누구랑 통화 했냐고 물었더니 아내에게 했단다. 이렇게 오지에서도 그렇게 가족과 통화할 수 있다는 게 또 부러웠다.
그렇게 여유 있게 오후 시간을 보내고 밤이 되자 다들 무료 했는지 밖으로 모였다. 그리고 별을 봤다. 위험과 모험을 구별하지 못하는 사나이들이 모여 앉아 별을 보며 수다를 떨었다. 공기가 맑고 희박하며 주변에 빛 공해도 없어서 별이 너무 잘 보였다. 마치 아주 어렸을 때 시골에서 본 것 같은 풍경이었다. 그때는 우리나라에서도 은하수를 선명하게 볼 수 있었다. 그런데 이제는 이렇게 외국에 나와서나 선명한 은하수를 볼 수 있다는 게 안타까웠다. 좀솜만 해도 가로등 같은 빛 공해가 있어 이정도로 선명하지는 않았다.
빙벽 훈련 첫날, 아침에는 멋진 일출을 밤에는 은하수를 보며 첫 교육에 아름다운 기억을 더했다.
다음날도 찬란한 여명을 받으며 훈련장으로 갔다.
이동하는 내내 몸이 풀려서 장비를 착용하자마자 곧바로 빙벽에 달라붙었다.
빙벽 등반에는 암벽 등반과는 또 다른 매력이 있었다. 암벽등반은 주어진 홀드를 활용해야 하는 피동적 등반이라면 빙벽등반은 아이스 엑스와 크램폰이 닿기만 하면 어디든 오를 수 있는 능동적 등반이었다. 그래서 좀 더 자유로운 기분이 들었다.
가볍게 어제 통과했던 코스들을 한 번씩 타보고는 오늘의 실습과제인 크레바스 극복과 추락하는 등반자 구하기를 배웠다.
빙하지역을 걷는 등반가에게 가장 위험한 것 중 하나가 크레바스이다. 크레바스란 얼음이나 땅바닥이 갈라져서 깊고 좁은 틈을 만들어 놓은 것인데 이 틈의 넓이가 수 미터 정도로 작으면 깊이와 상관없이 그 위에 눈이 쌓여 등반자의 눈에 전혀 보이지 않게 된다. 그러나 등반자가 그 눈 위에 발을 내딛는 순간 마치 함정에 빠지듯이 천 길 낭떠러지 속으로 떨어지게 되는 무척 위험한 지형이다. 실제 이런 크레바스에 떨어져 사고를 당하면 시신을 찾기도 힘들어 영영 산의 일부가 되는 경우도 있다.
그래서 빙하지역을 이동할 때는 2명이상이 한조가 되어 서로 로프로 연결한다. 만약 그 가운데 한사람이라도 크레바스에 빠지게 되면 먼저 나머지 사람들이 엎드려 크램폰과 아이스 엑스를 땅에 박고 더 이상 추락하지 않게 확보한다. 그러고 나서 가용한 범위 내에서 말뚝을 박고 추락한 동료를 끌어 올리는 로프 시스템을 구축한 뒤 천천히 구조 활동을 한다.
또 사전에 발견된 크레바스는 사다리를 놓고 사다리 양쪽에 로프로 난간을 만들어 이중으로 안전장치를 만든 후에 한사람씩 건넌다.
이런 과정을 배우는 것이 오늘의 숙달 과제였다.
추락한 동료를 구조하는 시스템은 이미 산악전 학교에서부터 단계적으로 배웠던 상태라 비교적 쉽게 배웠다. 그리고 크레바스를 가로지르는 사다리와 안전 로프 설치도 어렵지 않았다. 또 그 위를 건너는 것도 아슬아슬한게 스릴있었다.
이렇게 또 재미있게 교육을 마치고 캠프로 복귀 했다.
복귀하는 길에 어제와는 다른 루트로 내려왔다. 굽이굽이 각각 다른 광경들이 숨어 있다가 우리에게 발각 되었다. 오른편에는 수직 절벽에서 이어지는 완만한 능선이 기와지붕 처마 끝을 닮았고 왼편에는 깊은 협곡이 펼쳐져 있었다.
또 염소 때를 끌고 올라오는 목동도 만났다. 족히 50여마리는 되어 보이는 검고 흰 염소 때를 일사 분란하게 몰아대는 목동의 솜씨가 좋았다. 이 척박한 고산지대에서 염소는 돌 사이에 나는 작은 풀들과 이끼만 먹고도 잘 자라는 모양이다. 모두 생기 있어 보였다. 하긴 그 덩치 큰 야크도 살아가는 걸 보면 척박하다는 것은 인간만의 생각인지도 몰랐다.
교육 내내 제공되는 육류는 닭 아니면 염소였다. 닭이야 한국에서도 워낙 많이 먹었지만 염소고기는 평생 두 번 인가 먹어본 게 전부였는데 이곳에서 질리도록 먹고 있었다. 한국에서는 보양식으로 취급돼서 가격이 비싼 축에 속하는데 여기선 가장 대중적이고 저렴한 편이었다. 풀이나 이끼 심지어 종이나 천조각도 소화시키는 타고난 먹성 덕분에 그 어떤 척박한 땅에서도 잘 자라는 염소는 마치 토질을 가리지 않고 잘 자라는 감자 고구마와 같다. 육류 구황 식품인 것이다.
그런데 고기를 손질하는 솜씨가 형편없는지 음식을 먹다 보면 여기저기 뼛조각들이 섞여 있어 조심해서 씹어야 했다. 조리된 염소 고기조각 들을 보면 뼈를 발라낸 것들이 아니라 대충 토막처서 나온 것들이다. 그러다 보니 큰 뼈를 토막 치면서 부서진 뼛조각 들이 여기저기 튀어 섞이는 모양 이었다.
귀중한 양분을 제공해 주는 고마운 염소 때를 지나 캠프에 도착했다. 장비를 정비하고 천연 샤워장에서 샤워를 마치고 역시 염소고기로 점심을 먹었다.
오후에는 매튜에게 간단한 호신술을 알려 주었다.
매튜는 미국에서도 주짓수 도장에 다니며 운동하고 이종격투기 중계도 매일 보는 격투기 마니아였다. 그래서 그런지 열심히 배웠다. 보통 이렇게 ‘시간 날 때 좀 가르쳐줘’하고 오는 경우 일주일 정도 하고 나서 흐지부지 배우러 오지 않는데 매튜는 열심히 찾아왔다. 일주일에 세 번 정도는 꼭 찾아와서 가르쳐 달라고 했다.
매튜와 함께 호신술을 연습하는데 다른 동료들도 무료했는지 빙 둘러 구경했다. 매튜에게 손목 꺾기 등 몇 가지 관절기를 가르쳐 주었는데 구경하던 동료들도 저마다 따라했다. 하시브와 마두라는 서로의 손목을 붙잡고 꺾어 댔고 시크한 로저는 자기 손목을 붙잡고 원리를 분석하고 있었다. 해병대 죠는 루다와 삐딱하게 서서는 ‘다 필요 없고 총 한방이면 돼’하고 훼방을 놓았다.
그렇게 한 시간 정도 수업을 하다가 마지막으로 매튜의 머리위에 컵 하나를 올려놓고 점프 뒤돌려차기로 차서 떨어뜨리는 시범을 보여주고 수업을 마쳤다. 다들 좋아했다.
저녁을 먹고는 모두 차 한 잔을 들고 나와 다시 별을 올려다봤다. ‘별 하나의 추억과 별 하나의 사랑과…’ 하는 윤동주님의 시가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시라고는 전혀 좋아하지 않았지만 이때만큼은 정말 잘 쓴 시라는 생각이 들었다. 별 하나 하나를 볼 때마다 아련해지는 마음과 기분을 그렇게 적절하게 표현하다니. 시가 쉽게 씌어져 괴로웠다는 그는 정말 천재였던가 보다.
빙벽교육 기간 동안 오전에 훈련을 마치고 오후에는 별 일과가 없다보니 다들 무료해 했다. 그래서 이런저런 이벤트를 꾸렸는데 하루는 모닥불을 피우고 닭 두 마리를 굽기로 했다.
이번에는 레인저 출신 대표로 해쉬가 나섰다.
먼저 불을 피워야 했다. 불 피우기는 영국 대위 더그가 맡기로 했다.
그런데 마른 나무가 없었다. 이곳저곳에서 잔가지들을 주워 왔는데 다들 젖어 있었다. 그래서 내가 식당 아궁이 옆에 말려둔 잔가지를 몇 개 얻어 왔다. 그 사이 다들 흩어져서 땔감을 주워 왔는지 모닥불을 피울 자리에 제법 많은 양의 땔감이 쌓여 있었다.
해쉬가 생닭(이번에는 죽은 닭이었다.)을 손질하고 밑간도하고 기름을 발랐다.
불만 피우면 되는데 영 진도가 나가지 않았다. 잔가지로 밑불을 만들고 그 위에 좀 더 큰 가지들을 쌓으면 되는데 불을 피워보겠다고 나선 더그가 자꾸만 젖은 가지들을 쌓았다.
더 가관인건 모아온 땔감들 이었다. 매튜가 자라고 있는 나무를 잘라서 가져 왔고 톰은 관목을 뿌리 채 뽑아 왔다. 이런 생나무 채취는 자연 보호는 둘째 치고 전혀 전술적이지도 않고 불을 붙이기도 힘들다. 그마저도 가져온 나무들이 모두 물을 한껏 머금고 있는 나무들이었다. 모두들 레인저나 해병대 기초 과정에서 배운 생존훈련 이후 한 번도 불을 붙여 본 적 없는 것 같았다. 부자나라의 첨단 군대라서 불을 피울 필요가 없었던 것일까? 아니면 아직 경험이 부족한 때문이었을까?
특전사에서는 겨울 혹한기 훈련을 나가면 생존훈련을 병행하기 때문에 불을 피워 밥도 해먹고 토끼나 닭도 조리해 먹는다. 그래서 불 피우기는 기본중의 기본이었다. 땅을 파서 화덕을 만들거나 구들장 온돌까지도 만들 수 있다.
이렇게는 절대 불을 붙일 수가 없다는 판단이 들어 내가 지휘하기로 했다. 오지랖을 제대로 발휘해야 했다. 먼저 굵은 나뭇가지들을 잘게 깎아 부스러기를 만들도록 했다. 큰 나무들은 옆에 칼집을 내어 불이 타들어가기 좋게 만들었다. 마지막으로 마른 풀들을 최대한 많이 모아오도록 해서 밑불을 크게 만들었다 그 옆에 작은 부스러기들을 늘어놓고 최대한 물기를 말리고 마른 것들부터 불에 넣었다. 작은 부스러기들이 타들어가자 큰 나무를 불 옆에 놓고 물기를 말렸다. 그리고 조금씩 천천히 큰 줄기에 넣어놓은 칼집을 따라 불이 타들어 갔다.
드디어 불을 붙이기 시작한지 한 시간 만에 안정적인 모닥불이 만들어 졌다.
그리고 쇠막대기 몇 개를 얼기설기 엮어 그릴을 만들고 그 위에 닭을 올렸다. 해쉬는 로저의 실패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닭을 불에서 멀리 떨어트려 놓았다. 가만 보니 칼집을 넣거나 닭 관절을 꺾어 날개나 다리의 살이 겹치는 틈을 벌려 놓지도 않았다. 이렇게 되면 열기가 구석구석 전해지지 않아 부위별로 안 익는 경우가 많다. 이럴 바엔 차라리 조각을 내서 굽는 게 낫다.
다시 한 번 오지랖을 발휘해서 그렇게 하면 안 된다고 해야 하는데 의욕적으로 나선 헤쉬의 모습을 보니 찬물을 끼얹는 것 같아 그러지 못했다.
그러다 보니 닭이 천천히 익었다. 닭이 익기를 기다리던 우리는 커피도 마시고 비스킷도 먹고 하며 불 옆에 앉아서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눴다.
국가별로 급여가 얼마나 되는지 부터 여자, 가족, 스포츠, 영화, 별, 훈련 등 온갖 주제에 대해 이야기를 다했는데도 닭이 익지 않았다. 심지어 해가 다 지고 저녁식사도 끝났는데도 익지 않아서 결국 저녁식사 후식으로 먹게 되었다.
보통 생존 훈련 나가서 이렇게 곁불에 천천히 익히는 직화 통 바비큐로 조리하면 한 시간 정도 걸리는데 세 시간이 훨씬 넘게 걸렸다. 조리를 맡은 해쉬도 상사계급에 10년 넘는 경력이 있었지만 야전 조리 능력에는 의심이 들었다.
기어코 닭이 다 익어서 각자 한 두 조각씩 분배 받았다. 천천히 익혀서 그런지 잘 익기는 했다. 많이 타지도 않았다. 쿠크리 럼 한잔과 아주 잘 어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