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비를 부탁드렸는데 비를…
니콜라스, 나의 세례명이다. 2004년 봄, 달게 낮잠을 자는데 ‘루치아’를 찾는 전화가 왔다. 단잠을 깨운 전화라 성의 없이 그런 사람 없다며 전화를 끊으려 하니 다급하게 아내 이름을 얘기한다. 지금 없다고 하니, ‘자매님은 안 계시는군요’라고 한다. ‘자매 아니고 아내’라고 대답하니 저쪽에서 웃음이 터졌다. 그렇게 대화가 이어져 서초3동 성당이 우리 집 앞에 신축해서 이사를 왔으니 성당에 나오라고 권하고 엉겁결에 알았다 대답했다. 그게 계기가 되어 교리공부를 하고 그해 크리스마스에 세례를 받고 니콜라스가 되었다.
한동안 열심히 다니다 오랫동안 냉담했다. 지난겨울 안중근의사를 다른 영화 ‘영웅’을 보며 다시 교회를 나가게 됐다. 손가락을 자르며 다진 맹세에도 중요한 순간에 기도를 하며 도움을 청하는 모습에서 인간은 본질적으로 약한 존재이며 신을 갈구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톨릭 신도로서의 당위와 나를 위해 늘 기도한다는-한다고 얘기하는- 후배의 당부도 있고 해서 바티칸 투어를 신청했다. 교황이 머무시는 곳, 세상에서 가장 큰 베드로 성당이 있는 곳, 여의도 면적의 반의 반도 안 되는 작은 면적이지만 그 영향력은 어떤 나라보다 큰, 세상에서 자장 작은 나라 정도로만 알고 있었다.
6시에 체크아웃을 하고 짐을 맡기고 지하철을 탔다. ‘Repubblica 역’은 주위의 유적지와 땅 속에 있을지 모르는 유물 때문인지 정말 깊었다. 이른 시간인데 지하철에 사람들이 많다. 가방을 앞으로 멘 한국 관광객들도 꽤 보인다. 7시부터 바티칸 입장을 위해 줄을 섰는데 3시간을 넘게 입장을 기다렸다. 날은 스산한데 예의 차린다고 여름 재킷을 입고 나왔더니 으슬으슬 춥고 허리도 아프다.
10시 20분쯤에 바티칸박물관에 입장했다. 이집트 유물도 전시되어 있다는 데 우리는 르네상스와 바로크 작품 중심으로 처삼촌 벌초하듯이 보며 지나갔다. 다행히 파리의 루브르박물관과 피렌체의 우피치미술관에서 전문가이드에게 설명을 들어서인지 설명이 귀에 잘 들어온다.
르네상스의 천재화가 ‘라파엘로 산치오’가 그린, 바티칸이 소유한 가장 유명한 그림인 ‘아테나 학당’ 앞에 많은 사람들이 몰려있다. 교황의 개인 서재인 ‘서명의 방’의 네 벽면에는 철학, 신학, 법, 예술을 주제로 벽화가 그려져 있는데 이중 ‘아테네 학당’은 철학을 상징하는 그림으로 54명의 철학자가 등장한다. 그림의 주인공들은 자신의 사상이나 업적과 관련된 자세와 제스처를 취하고 있다. 그림의 정중앙에 배치된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는 중세의 스콜라 철학 이후 이어져 온 아리스토텔레스 사상과 르네상스 시기에 널리 확대된 신플라톤주의의 조화를 상징한다. 이 두 사람이 클로즈업된 티켓 사진을 들고 모두들 인증샷을 찍는다.
가이드가 미리 바티칸 안에선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이라고 했는데 시스티나 경당의 천장화 아래 사람의 규모가 엄청났지만 모두들 고개를 젖히고 천장을 올려다보고 있어 그 장면 자체가 장관이다. 노동절 연휴와 겹쳐 더 많은 인파가 몰린 탓이리라.
천장화는 15세기 미켈란젤로가 교황 율리우스 2세의 명을 받아 그렸다. 주제는 미켈란젤로가 직접 정했다고 하는데, 구약성서의 빛과 어둠, 해와 달, 땅과 물, 인간의 창조, 에덴동산과 노아의 방주, 인간의 타락 등 9개의 장면이다. 20미터 높이의 천장에 폭 13미터, 길이 40미터에 이르는 큰 그림을 4년 8개월간 미켈란젤로 혼자서 그렸다. 4년 8개월간 혼자서 그림을 그리고 허리와 목디스크, 한쪽 눈의 실명 등 건강이 악화되었다 하니 그의 천재성을 뛰어넘는 집념과 투지가 놀랍다. 천정화 바로 옆에 있는 ‘최후의 심판’ 벽화도 미켈란젤로가 나이 60에 8년 이상이 걸려 완성한 그림이다.
10분 정도 관람을 했는데 항상 스마트폰으로 고개를 숙이고 있다가 목을 계속 젖히고 있었더니 보상 동작을 한 것 같아 다행 아닌가 라는 생각을 얼핏 했다. 이곳에서의 사진 촬영은 금지되어 있다.
이어 세계에서 가장 넓고 큰 ‘성베드로 성당’으로 갔다. 황금빛 천장의 화려한 장식과 거대한 돔의 규모에 압도된다. 성당 입구에는 속죄의 마음으로 지나가면 모든 죄가 사하여진다는, 25년에 한 번 열리는 ‘천국의 문’과 미켈란젤로의 역작인 ‘피에타 상’이 있다. 피에타는 이탈리아 말로 ‘자비를 베푸소서’라는 뜻이라 한다. 그 앞에서 짧은 기도를 했다. 저에게도 자비를 베푸소서!!
교황의 힘과 권위를 나타내는 화려한 성당과 많은 미술품과 교황의 재위시기마다 채워간 그들의 방을 지나며, 단견이지만 종교혁명이 필연적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잠깐 했다.
바티칸을 나와 지하철을 타고 호텔로 돌아왔다. Repubblica역 밖으로 나오니 거친 비가 내린다. 자비를 부탁드렸는데… 금방 그칠 비가 아니다. 준비해 간 우산을 썼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신발이고 바지고 흠뻑 젖었다. 비를 피해 식당에 들어갔다. 어제 꽤 많은 손님이 있길래 들어왔는데 자리에 앉아 평점을 보니 3.3이다. 음식은 리뷰와 같았다. 양갈비는 지방이 많고 나이프는 무디다. 창밖으로 우르릉 천둥소리가 몇 번 들렸다.
식당을 나와 호텔에 맡겨 둔 짐을 찾고 우버를 불렀다. 우버 택시는 14유로인데 우버 블랙은 44유로다. 우버 택시를 선택했는데 앱에선 3분 내 도착이라고 나오는 데 몇 번 시도하는 데 연결이 안 된다. 3분은 우버 블랙을 불러야 가능한 듯.
빗줄기가 줄어들기를 기다려 버스 정류장으로 갔다. 바람에 우산이 자꾸 뒤집힌다. 한참을 기다려 버스를 탔는데 몇 정거장 지난 후 더 이상 승객이 탈 수 없을정도로 버스는 만원이다. 버스에서 내려 울퉁불퉁한 길을 트렁크를 끌고 한참을 걸었다. 이 새로 산 가방의 바퀴가 유럽에서 호된 신고식을 치르는구나. 골목길은 낡고 지저분하고 울퉁불퉁했다.
로마의 마지막 2박은 회사 프로그램으로 예약을 했다. 호텔을 찾아올 때만 해도 골목길 안쪽에 입구나 리셉션 등이 초라해 적잖이 실망했는데 방에 들어오니 침대 옆에 자꾸지가 있다. 창문을 여니 난간에 매달린 화분에 허브가 가득하다. 이런 뜻밖의 디테일이 좋다.
저녁을 먹으러 ‘나보나 광장’에 나왔다. 8시가 다 됐는데 아직 훤해서 인지 깃발을 따라다니는 투어팀이 몇 팀 있다. 1세기경 콜로세움이 있던 곳인데 운동장은 광장으로 바뀌고 관중석이 있던 자리는 광장을 에워싼 카페로 바뀌어 있다.
하얀 천막아래 삼각뿔 모양의 가스난로를 피운 식당들이 운치 있어 보인다. 테라스에 빈자리가 있는 식당으로 들어갔다. 바로 옆에 있는 가스난로를 켜 준다. 해산물 파스타를 주문하고 와인을 한 모금하니 긴 하루가 마치 꿈같다. 아침 6시부터 어떻게 시간이 지났는지 아득하다. 집 나오면 고생이다.
와이파이 비밀번호를 물어 네트워크에 연결하고 메시지들을 확인하는데 제목이 “CK 님, 필요할 때 언제든 이용할 수 있어요”라는 우버가 보낸 광고 메일이 있다. 가차 없이 삭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