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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규진 Oct 25. 2021

서울역

2014년 10월 6일

술을 조금 줄여야 한다. 버릇이 고약해지는 게 주사가 생겼을까 봐 겁이 났다. 나보다 먼저 길을 간 형들에게 전화를 건다. 혀가 한껏 꼬부라진 소리로 하소연하는 버르장머리가 생겼다. 서소문에서부터 걸으면서 억눌러왔던 심장은 이내 서울역 길바닥에서 터졌다. 고장 난 것처럼 육교 위에서 울었다. 모든 슬픔을 다 토해냈는데도 분이 풀리지 않았다. 쓰레기통 옆에서 고개를 파묻고 흐느꼈다.


누군가 떨리는 어깨를 두드렸다. 아는 사람이 나를 알아본 건 아닐까. 아찔한 생각이 들어서 쳐다보고 싶지 않았다. 자신을 형이라 소개한 경찰관이었다. 요 앞 서울역 지구대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들려서 왔다고 했다. 그때 나는 부끄러움을 모르고 눈물 섞인 사연을 읊는다. "제가요. 기자 시험에 또 떨어졌거든요. 그게 너무 서러워서." 나는 새벽의 도로 옆 연석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취객이나 다름없었다. 의사소통이 불가능할 정도로 인사불성이었을 텐데 그 말을 꺼내는 것도 서러웠다.


 “나도 경찰 시험 4년 봤는데 이거 가지고 뭘”. 그는 나에게 담배를 권했다. 이 시간이면 말썽을 일으키는 부랑자들에 시달리는 게 일상일 텐데. 나는 그가 보인 따뜻한 말에 덜컥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미안해요. 난 담배를 태우지 않아요". 그는 데려다주겠다면서 집주소는 기억나느냐고 물었다. 나는 손사래를 치면서 물리치고 발걸음을 옮겼다. 술이 깨면서 느낀 부끄러움 때문이었을까. 언젠가 당신이 권했던 한 까치의 위로를 갚겠다는 꼭 생각이 들어 소속과 이름을 물었다. 그리고 아침이 되어 술이 깨고, 며칠 뒤 언제 올지 모르는 다음 시험을 준비하며 책상 앞에 앉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속이 타들어간다. "넌 기자가 되면 정말 잘할 텐데". 인사치레라도 응원 한 마디에 녹아내릴 정도다.


어느 날 집에 오는 길에 너털 걸음으로 광화문에 갔더니 예전에 인턴으로 일했던 건물이 보였다. 또 다른 낙방 소식을 전해 준 바로 그 회사. 건물 입구에서 술에 취해 큰 절을 올렸다.'그동안 감사합니다. 잘 먹고 잘 사십시오' 라면서. 주머니엔 흡연을 처음 시도하다가 입에 맞지 않아 보관해 둔 담배가 있었다. 바로 옆에서 서성거리던 노숙자에게 권하자 감사 인사를 받았다. 타들어가는 연초의 끝을 보며 부끄러움과 서러움이 한꺼번에 밀려왔다. 어제는 기타의 줄을 풀어서 보관함에 닦아 넣었다. 이젠 정말 안녕. 나는 무엇을 떠나보내고 있는 걸까. 기름칠을 하고 지판의 묵은 때를 벗겼다. 가슴은 풀어진 줄에서 나는 소리 마냥 여전히 먹먹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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