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10월 24일
아버지는 불편한 사람이다. 한국 남성 가장의 전형적이고 보수적인 서사를 가졌다. 아무리 봐도 닮은 구석은 없었다. 그는 일곱 명이나 되는 남매 중에 다섯째로 태어났다. 전라도의 시간이 멈춘 한 농촌이었다. 어린 그가 본 시골의 모습은 내가 본 풍경은 다르지 않다. 작은 집에서 형제들이 한꺼번에 보낸 어린 시절은 얼마나 치열했을지 그리긴 쉽지 않다. 난 아직도 친척들의 순서를 외우지 못한다. 하지만 그는 보이지 않는 아귀다툼 속에서 용케도 살아남았다. 스무 살에 직업 군인의 길을 택하면서 남보다 일찍 앞가림을 시작했다. 형제자매 중에서 고등교육을 마치고 대학교를 나온 것도 유일했다. 그리고 '개천에서 용이 난다'는 말처럼, 공군의 조종사가 되어 존경을 받았다. 장남이나 막내가 느끼는 가족의 사랑이나 도움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는 TV도 전화기도 없는 촌구석에서 스스로를 증명해냈다. 그리고 의젓한 사회인이 되어 돌아온 뒤엔 무거운 책임이 기다리고 있었다. 온 집안의 부러움과 시샘을 한 몸에 받아야 했다. 다섯 남매에서 자란 막내딸의 사위가 됐던 처가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아버지는 평생 ‘소년 가장’이었다. 유독 어깨에 짊어진 것이 많은 삶이었다.
그런 그에게 불편한 사람을 꼽자면 내가 있었다. 남들보다 늦은 나이에 얻은 장남은 친구들의 아들 또는 조카들과 비교 대상이었다. 그는 일찍이 아들을 자신과 같은 사관학교에 보내고 싶어 했다. 나는 노골적인 반항심을 드러내며 거부했다. 거창한 이유로 아버지를 무척 싫어했기 때문이었다. 늘 몸에 밴 군인의 말투와 습관들은 나를 숨 막히게 만들었다. 돌이켜보면 가까워질 기회도 많지 않았다. 직업 특성상 한 달에도 며칠씩 집을 오랫동안 비웠고, 돌아오면 잠을 자거나 가족 대신 오랜 친구들과 술자리를 찾았다. 나는 어린 시절 또래 친구들과 달리 그 흔한 부자간의 추억이 없다. 아버지와 함께 공놀이를 하거나 유원지를 놀러 다니는 휴일은 찾을 수 없었다. 다만 내가 어디를 가도 곁에 없는 그의 꼬리표는 따라붙었다. 친구나 친척 집에 가도, 학교에 가도 마찬가지였다. 그가 무슨 일을 하시는지 묻고 감탄하는 얘기뿐이었다. 그래서인지 그에 대한 얘기를 하는 걸 유독 싫어했다. 내가 남들의 부러움을 받는 아버지를 두고 있다는 사실이 꺼려졌다. 지금도 나는 그에 대한 글을 쓰기를 어려워한다. 사춘기를 겪으면서 모종의 반항심은 더 커졌다. 특별히 싸운 일도 없었는데 그와의 대화는 잔소리뿐이라 느꼈다. 그는 내가 대학교에 입학할 때도, 기자라는 직업을 준비할 때도 못마땅하게 여겼다. 나는 사사건건 아버지와 충돌했고, 당신처럼 되고 싶진 않다는 말을 스스럼없이 내뱉었다. 그때마다 아버지는 더 이상 말을 꺼내지 않으셨다.
먼 부자가 대화를 하기 시작한 건 군대에 갈 무렵부터였다. 그 시절 나는 90Kg에 육박하는 몸무게와 여린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대학 친구보다 컴퓨터 게임과 만화책이 전부였던 시절이다. 체력 검증에서 윗몸일으키기 스무 개를 하지 못해 중도 포기하고 돌아온 날이었다. 아버지는 크게 화를 내셨다. “야이 자식아! 허리가 끊어졌어도 했어야지” 평소 같으면 나도 목에 핏대를 세웠을 텐데. 그날은 고개를 들지 못했다. 가정을 떠나 처음으로 마주할 외력에 무력할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시작된 군 생활의 출발은 예상한 대로 부적응에 가까웠다. 나는 아버지가 청춘을 바쳤던 곳에서 그의 이름에 먹칠을 하고 있다며 죄책감이 들었다. 그리고 아버지가 육필로 된 편지를 처음으로 보내셨던 것도 그때였다. 거기에 뭐라고 쓰여있었는지 기억하지 않는다. 편지를 읽으며 문득 고등학교 3학년 시절이 떠올랐다. 담임 선생님은 나태한 우리들에게 이런 말을 했던 기억이 났다. "너희들이 최소한 너네 아버지 세대보다는 더 나은 삶, 더 나은 직업을 가져야 할 거 아니냐'. 그 말은 수험생활에서 충분한 동기부여가 됐던가. 훈련소에서부터 나는 그건 너무나 벅찬 일이라 생각했다. 나는 절대 아버지처럼 될 수는 없다고 느꼈다. 다만 다른 방법으로 그를 뛰어넘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처음으로 경외감 같은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와 다른 느낌을 받았다. 그 후로 나는 절대 포기하지 않는 법을 새겼다. 그 어떤 어려움이 나를 덮치더라도, 허리가 끊어지는 한이 있더라도 노력해야 한다는 것. 몸서리치도록 힘겨웠던 2년간의 언론사 취업시험을 버티게 해 주었던 것은 그의 혹독한 다그침 하나 때문이었다. “너 같은 놈이 방송국에 들어가면 손에 장을 지진다”는 아버지의 매몰찬 도발도 거들었던 것 같다. 다만 내 인생에서 철이 들었다고 여길 분기점을 꼽으라면 주저 없이 그날의 꾸지람을 꼽겠다.
이런 내가 스스로 밥벌이를 하면서 그가 더 먼 사람이 됐다는 게 이해하기 쉽지 않다. 새로운 직장 동료, 새로운 취재원, 새로운 관계를 만들면서 가족과는 거리가 생겼다. 그런데 더 멀어질수록 아버지의 무거운 어깨는 더 선명해져 갔다. 그는 꾸준히 눈에 밟히는 사람이었다. 고지식한 모습은 자신을 위한 씀씀이는 결벽증에 가까울 정도로 거부하는 사람. 할인 매장에서 반값 이하의 상품을 사는 게 아니면 쳐다보지도 않는 사람. 아내와 아들이 선물을 해준다고 안겨줘도 당장 반품해달라고 하루 종일 괴롭히는 사람. 그를 제외한 모든 식구들은 그가 남긴 유산을 고스란히 누리고 있었다. 나는 철이 덜 들었지만 그의 몸에 있는 수 십 년 된 물건들은 자꾸 눈에 밟혔다. 아버지는 유행이 다 지나가버린 누구도 입지 않을 것 같은 옷만 입으셨다. 월급을 받아 사드린 새 옷들은 움직임이 불편하다면서 절대 입지 않으셨다. 정말 중요한 연말 모임에 나갈 때만 그 옷은 옷장 밖으로 나왔다. 그러나 가까이 다가서면 나는 그와 더 자주 부딪혔다. 아버지는 싸울 때마다 '네가 그렇게 대단한 사람이냐. 기자가 뭐가 그렇게 대단한 사람이냐'라며 화를 냈다. 어머니는 그가 친구들에게, 동료들에게 아들이 기자라는 사실을 대수롭지 않게 말한다고 일러주었다. 그래서인지 그가 하늘길에서 동료들에게는 몇 시간씩 아들이 나오는 방송을 보여주며 자랑을 한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나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수다쟁이 아줌마처럼 굴었을 그의 모습을 상상하기 어려워 웃음이 절로 나오기도 했다. 나한테도 똑같은 비밀이 하나 있었기 때문이다. 언론사에서 일하면서 가장 자랑스러워하는 일이 있다면, TV에 내 모습이 나오는 것보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최고로 유명한 손석희 앵커와 점심 식사를 하게 해 드렸다는 일이다. 부모님께, 특히 그에게는 평생의 자랑거리가 될 추억을 안겨드렸다는 생각은 지난했던 수습기자 시절을 버티게 해 줬던 경험이다.
우리는 더 솔직할 수 있었는데 그렇지 않았다. 몇 해 전 아버지의 은퇴 기념사진을 미리 찍으러 공항에 간 적이 있다. 그에게 보내는 선물이라고 생각하고 사진 기자 친구에게 부탁을 해서 전문 사진사도 불렀다. 그날 찍은 사진은 우울한 영화 같았다. 비행기에서 내린 아버지는 절대 웃고 있지 않았다. 난생처음 보는 표정이었다. 그리고 아버지 어깨에 짊어진 것들은 죄다 사진 속에 남아있었다. 하지만 그는 내 앞에서 한 번도 울지 않았다. 그리고 할머니가 돌아가셨을 때에도 그는 아무도 보이지 않는 납골당에서 눈물을 조용히 닦을 뿐이었다. 그게 태어나서 처음 본 아버지의 눈물이었다. 그는 사랑하는 이들에게 자심이 더 해주지 못한 것들만 아파하며 먹먹히 가슴에 묻어야 했다. 그리고 어느 날 갑자기 수십 년 몸담았던 회사에서 불행한 종말이 찾아왔다. 그는 코로나로 인해 하루아침에 은퇴를 강요받아 자연인이 되어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철저히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다. 가족들에게 결코 말할 수 없는 회한이었다. 특히 자신이 아끼는 장남에게는 말을 꺼내지 않았셨다. 어머니는 눈물을 흘리며 무너졌고 그를 중심으로 온 가족이 침묵했다. 나는 그날 이를 악물고 아버지의 은퇴를 축하하는 인사를 드렸다. 이제 그가 들고뛰었던 바통은 나에게 넘겨졌다는 걸 깨달으면서. 그리고 아버지는 금방 노인이 되었다. 아니 이미 노인이 된 그를 비로소 알아차린 게 맞다. 그 후로도 나는 수차례 아버지를 떠올릴 때마다 어린아이처럼 울었다. 그리고 너무 쉽게 터지는 눈물은 좀처럼 멈추질 않았다.
나와 그는 서로를 너무 많이 닮았기 때문에 거부했다. 내가 미워했던 것은 아무런 말도 없이 묵묵히 떠맡기만 하는 그의 모습이었다. 나는 외모도 아버지를 많이 닮았지만 성격도 그렇다. 언젠가 내가 저지른 실수에 주체할 수 없이 마음이 흔들릴 때 한 선생님이 말했다. “당신이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 알 것 같아요. 아버지를 너무 많이 닮았어요. 아버지의 사랑은 책임이셨군요.” 나는 그 모든 순간순간을 되새기기 시작했다. 그토록 되고 싶지 않았던 아버지는 내게 너무 거대한 존재였고, 너무나 되고 싶었던 존재였다. 그때마다 스스로에게 묻고 해답을 구한다. '당신이라면 어떻게 했겠느냐'면서. 그래, 내게 아버지는 영웅 그 이상의 존재다. 그리고 아버지처럼 될 수는 결코 없다. 물론 그렇게 될 필요는 없다. 우리는 이미 서로가 그렇게 되기를 바라지 않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내가 그 모든 근거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당신이 세상의 모든 슬픔과 아픔을 다 떠안았기 때문에 내가 있었다는 사실을, 그리고 모든 걸 무한 책임지는 삶이 결코 틀리진 않았다는 걸 말이다. 우리 부자는 장남이 아닌데도 강요받았던 아버지와, 그의 장남으로 태어난 아들이 돼야 하니깐. 나는 그의 삶을 존경하고 닮고 싶다. 그리고 나만의 방식으로 우뚝 서야겠다. 문득 아직까지 내가 부르지 않는 유행가가 떠오른다. 그 노래만 부르면 코끝이 찡해지고 목이 막힌다. 가장 따라 부르기 힘든 부분은 이렇다. “아버지 이제야 깨달아요. 어찌 그렇게 사셨나요. 더 이상 쓸쓸해하지 마요. 이제 나와 같이 가요” 이제 내가 당신을 따라가겠다.